"애가 거짓말을 해서."
가정 내 아동학대는 여전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다. 최근 동거남의 아들을 7시간 동안 여행용 가방에 가둬 심정지 상태에 이르게 한 40대 여성은 경찰 조사에서 "애가 거짓말을 해 훈육차원에서 가방에 들어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지난 2월에도 5살 의붓아들을 목검 등으로 때려 숨지게 한 20대 남성 역시 "거짓말 한 아이를 훈육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훈육=체벌'이라는 사고방식이 아동학대를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이상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성인일 경우에는 처벌을 받을 수준의 폭행도 아동의 경우엔 '훈육의 의도가 있었다'며 참작이 되는 경우가 있다"며 "정당한 징계권 행사였다고 주장하면 감형이 되거나 처벌이 아예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징계권'은 민법 제915조에 규정돼있다. 민법 제915조는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라며 친권자의 징계권을 인정하고 있다. 징계가 반드시 체벌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체벌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근거로 활용된다는 게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이 변호사는 "체벌의 정도가 가혹하면 아동학대로 처벌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훈육으로 판단해 감형의 여지가 남는 것"이라며 "아동복지법 제5조 2항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나, 아동학대처벌법과 내용적으로 상충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체벌 금지' 이미 세계적인 추세
세이브더칠드런·굿네이버스·초록우산어린이재단 등 아동인권단체들은 수년 간 민법의 징계권 조항 삭제를 촉구해왔다. 현행 아동복지법이나 아동학대처벌법이 아동학대를 금지하고 있지만 민법 제915에 따라 '훈육'을 이유로 한 가정 내 체벌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남기 때문이다.
고우현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 매니저는 "민법 제915조는 사문화된 조항"이라면서도 "'훈육을 위해서는 체벌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남아있어 아동 체벌을 금지한 아동복지법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를 혼내다보면 때릴 수도 있다', '애는 맞으면서 커야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상징이 바로 민법 제915조라는 의미다.
고 매니저는 "스웨덴·핀란드 등 전세계 56개국은 가정을 포함한 모든 장소에서의 체벌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체벌에 관대한 프랑스도 지난해 체벌금지법이 마련됐으며 일본도 지난해 친권자의 자녀 체벌금지를 명시한 아동학대방지법과 아동복지법 개정안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도 지난해 5·6차 정기보고에서 한국정부에 "민법상 징계권을 삭제하고 체벌 금지를 명문화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따라 보건복지부·교육부·여가부 등은 지난해 5월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하며 민법상 친권자의 징계권에서 처벌권을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나아가 지난달 법무부 법제개선위원회는 "민법의 징계권을 삭제하고 민법에 체벌금지를 명확하게 규정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직접적인 변화의 시도는 요원한 상태다.
때려도 되지만 심하게 때리면 안된다? "아예 안돼"
아동 권리에 관한 인식도 많이 부족하다. 고 매니저는 "아동학대를 처벌할 때도 '아이들을 체벌하면 안된다'가 아니라 '일정 수준은 때릴 수 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잘못이다'는 식으로 접근한다"고 짚었다.
고 매니저는 "아이들을 훈육하다보면 때릴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여전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그러면서 "훈육에 체벌은 크게 효과가 없다"고 강조했다. 체벌이 감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고 매니저는 "체벌이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어 보일 수 있다. '맞는다'는 두려움에 부모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안 할 수는 있지만 아이가 내재적으로 그걸 왜 하면 안되는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며 "나아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맞았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약자를 향해서도 '네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때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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