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수학문제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어렵냐는 한탄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렇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돈이다. 돈과 관련하여 가장 쉽게 이해되는 것은 지폐일 것이다. 우리 국민 대부분이 많건 적건 몸에 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그걸 쓰기는 점점 더 주저하게 된다. 고액권일수록 이런 심정은 더할 것이다.
2006년 국회에서 고액권 발행 결의가 있었고, 2009년 6월 오만원권 발행과 함께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다. 올해로 오만원권 발행 11주년이 된다. 2019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오만원권 발행 10년의 동향 및 평가’를 보면 오만원권 지폐가 십만원권 수표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수표 사용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수표가 지급수단 사용 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14.4%에서 2018년 0.6%로 급감했다. 이와 함께 오만원권이 다른 화폐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생긴 효과로는 화폐 제조 및 관리 비용이 대폭 줄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만원권을 제조할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제조비용이 연간 약 600억 원 안팎으로 절감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런 분석과 더불어 최근 독특한 생김새로 인기를 얻고 있는 멕시코 도롱뇽이 멕시코에서 지폐 모델 데뷔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폐 교체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멕시코 중앙은행은 2022년 나올 새 50페소(약 3천 200원) 지폐에 ‘아홀로틀’로 불리는 이 멕시코 도롱뇽 모습을 넣을 예정이다.
현재 50페소 지폐 앞면엔 멕시코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뒷면엔 모렐리아 수도교가 담겼는데 새 지폐 앞엔 테노치티틀란 유적, 뒷면엔 멕시코 도롱뇽과 이들이 서식하는 소치밀코 호수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도롱뇽은 생김새가 독특한 데다 번식력과 신체 재생능력이 뛰어나 실험실에서 널리 쓰이고, 애완동물로 거래되기도 한다. 그러나 야생에서는 심각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생존 처지와 보존 노력이 화폐 도안 변경 사유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보훈과 화폐, 그 중에서도 도안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화폐는 온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사용하는 공공재이므로, 화폐도안을 결정할 때에는 예술적 측면 이외에도 국민들과의 공감대를 형성시켜야 하는 사회적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서 화폐도안 소재로는 일반적으로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과 그 나라의 문화적 자긍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문화재, 사적(史蹟) 등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과거 외세의 침략을 받았거나 식민 통치를 경험한 많은 나라에서는 자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외세와 투쟁한 민족지도자들을 화폐도안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무저항’, ‘불복종’, ‘비협력주의’를 내세운 독립운동 끝에 1947년 영국의 지배에서 조국을 해방시킨 간디의 초상을 화폐 앞면 도안에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최고액권인 100위안(元)권에서부터 50위안, 20위안, 10위안권까지 공통적으로 모두 독립운동과 신중국 건설 과정의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 초상이 들어 있다.
필리핀도 5페소화 앞면에 1898년 식민지배국인 스페인에 저항하여 독립을 선언한 에밀리오 아귀날도의 초상을, 뒷면에는 독립선언식 장면을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국(프랭클린, 해밀턴, 제퍼슨, 워싱턴), 터키(케말 파샤), 베트남(호치민) 등 많은 국가에서 외세에 저항한 민족지도자들을 화폐 도안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런 일반론과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화폐 초상인물은 당연히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족지도자 중에서 나와야 한다. 고액권 도입 당시 한국은행은 화폐도안자문위원회에서 결정한 후보인물 10명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의견을 접수 받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 이를 통해 고액권 도안인물로 십만원권에는 백범 김구, 오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을 각각 선정하였다.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으로서의 대표적 상징성이 있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백범 김구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민족영웅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우려, 뇌물로 인한 부정부패 조장 등의 우려로 십만원권 발행은 무산되고, 오만원권만 세상에 나왔다.
올 해는 광복 75주년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101년이 되는 해이다. 비록 현재 세계적인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얼마간 위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민주화 노력과 자유경제체제를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20세기 초 냉엄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더할 수 없는 시련을 감수해야만 했던 아픈 시절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 이제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 일류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아직도 남북이 분단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선진 일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명실상부한 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훈은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정신적·사회적 인프라로써, 선진 일류국가로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의의에서 백범 김구를 화폐 도안인물로 선정함으로써 대한민국 독립지사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으며, 뛰어난 실천력과 포용력을 갖추고 통일의 길을 모색한 지도자로서 청소년을 포함한 국민에게 미래의 바람직한 인물상(人物像)을 제시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한 당시 한국은행의 고액권 도안인물 선정에 대한 부연설명은 국가보훈처가 할 말을 대신 말해 주는 양 해 고맙게 느껴졌다.
또 이런 깊은 뜻이라면 지폐 앞에 ‘한국은행’ 표시와 더불어 ‘국가보훈처’ 명칭도 함께 해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재 십만원권 발행은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경우에 따라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막상 발행되고 나면 큰돈이라 함부로 못 쓸 수도 있겠지 싶다. 그러면 백범 김구를 지갑 속에 잘 모셔 놓고 수시로 보면서 애국애족과 민족단결, 그리고 문화국가를 강조하던 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
어떤 기회로든 백범을 비롯한 국가유공자들의 유지를 본받아 이를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선진국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희망해 본다. 지갑 속에도 보훈이 살아있는 때가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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