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의 웅동 명동근린공원에 부서지는 모래로 곧잘 무너지는 우리 삶을 쌓아 올렸습니다.
한 무덤의 모래가 오늘을 노래하고 내일을 마련하는 형상이 되어 봄날 나비처럼 작가의 손끝에서 날아 올랐습니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것이 내일을 마련하기 위한 일임을 굳이 알려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 아름다움을 알고 있습니다.
머물지 않더라도 잠시 멈춰 서서 작가와 함께 손을 맞잡고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 올라갑시다"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그 옆에 한사람이 구슬땀을 흘리며 나무젓가락으로 모래 언덕을 조각하자 '도깨비 꿈' 테마로하는 잉어 형상이 그려졌다. 모래조각가 김길만(61)씨다.
김씨는 경주출신으로 중.고등학교는 부산에서 졸업했고 2000년쯤 양산에 이사와 현재까지 살고있다. 김씨가 모래조각을 시작한것은 1987년 부산 서동에 살고 있을때 친구와 함께 부산 해운대 바닷가에서 놀다가 모래 촉감이 좋아 우연히 첫 작품인 '인어'를 만들었다.
이 모래 조각이 김씨의 첫 작품이다. 김씨가 모래 조각 도구를 나무젓가락으로 사용하게 된것은 한 아이가 핫도그를 먹고 버린 젓가락에서 영감을 얻었다. 조소칼 같은 조각 도구는 머리카락, 얼굴 등 곡선을 디테일 하게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나무젓가락은 곡선을 처리하는데 탁월했기 때문이다.
1992년쯤 돼서야 김씨의 작품이 디테일화 됐다. 이후 김씨는 1998년 광복절 기념행사로 초청을 받아 중국 용정해란강변과 2000년 미국 시카고 몬트로스호변 모래조각 작품시연을 했다.
<시카고 선 타임스> 1면에 “한국에서 온 모래조각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동안 김씨의 1000여 개 작품 가운데 초,중, 고등 미술교과서에 실린 것만 5차례 정도가 되었다.
김씨는 현재 해운대 세계모래축제 초청작가로 활동 중이며, 양산 미술협회원 이다. 지난 29일 <프레시안>은 김길만 작가를 만나 모래조각 인생에 대한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프레시안: 모래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김길만 작가: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 생활이 어려워 미술공부를 할수 없었다. 1987년 쯤 친구와 해운대에 놀러가 우연히 바닷가 모래를 쓸어보니 손안에 만져진 감축이 좋았다. 돈도 안들면서 재미있게 다 싶어 그 때부터 모래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작품이 ‘인어’ 였다.
프레시안: 미술을 전공한 적이 있는지?
김길만 작가: 미술을 전공하지 못했다. 정말 미술을 배우고 싶어 학원은 딱 한달 다녔다. 그 당시 학원비 1만 5000 원은 나에게 너무나 부담스런 금액이었다. 하지만 미술 창작 욕구는 있는데 풀때는 모래밖에 없어 주말마다 백 사장을 찾았다. 사람들은 “밥먹고 할 일없는 미친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어짜피 파도에 휩쓸여 사라지는 것을 왜 땀을 흘리며 무모한 행동을 할까”라는 말은 이론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모래에 만져지는 감촉이 너무 좋아 직장을 다니면서 주말마다 봄부터 겨울까지 백 사장을 찾아가 창작활동을 펼쳤다.
프레시안: 모래작품에 빛쳐지는 역광을 좋아한 이유?
김길만 작가: 모래조각을 해보면 실내보다는 야외를 좋아한다. 일본 돗토리현에 모래전시장이 있다. 그곳은 작품의 미를 살리려고 조명을 비추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명보다 더 멋있는 것이 햇살이라고 생각한다. 햇살이 역광으로 작품을 빛출 때 더욱 더 멋 있었다. 특히 작품을 아침에 역광을 보면 그 어느 순간 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모래작품은 햇살에 죽고 산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작품 활동은 주로 어디?
김길만 작가: 해운대에서 주로했다. 그곳이 공개적인 장소이다 보니 1987년도에는 모래조각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송정에 몰래 숨어들어가 연습을 했다. 이후 모래조각 공법을 조금 익히면서 광안리에서 작품 활동을 했고 그 이외에 오랜세월 해운대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프레시안: 모래작품이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는 비결은
김길만 작가: 작품 초기에는 물과 모래를 사용했다. 해운대 모래 축제때 작가들이 목공용 풀을 물과 혼합해 분무기로 모래작품에 코팅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공법은 외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목공 풀로 코팅을 입히면 작품 수명이 오래가는 것을 알게됐다. 그때부터 이 공법을 사용하고 있다.
프레시안: 작품도구로 나무젓가락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김길만 작가: 처음 1년간 손으로 사용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손은 작품을 묘사하는데 섬세한 부분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어 작업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90년 초 쯤 해운대 백사장을 지나가던 한 아이가 핫도그를 먹고 버린 젓가락을 주워다가 쓴 것이 현재까지 작업도구가 됐다. 그는 “세계적으로 나무젓가락 작업 도구를 사용하는 작가는 제 밖에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외국작가들이 사용하는 금속 조각칼은 직선을 처리하는데 좋기는 하지만 곡선의 디테일하게 처리는 나무젓가락이 우월하다. 마치 연필을 사용하듯이 여성의 머릿결, 속 눈썹 등 디테일 부분을 묘사하는데 좋은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모래작품을 만들기 전 준비 작업은?
김길만 작가: 기본적으로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한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작품을 해보면 스케치 보다 더 좋은 착상이 나오기도 한다. 현재 만들고 있는 ‘도깨비 꿈’도 스케치를 해봤는데 작품이 너무 단순해 보였어 작품 현장에서 변경하니까 작품완성도가 생겼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스케치를 하지만 너무 의존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초,중, 고 미술 교과서에 실린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김길만 작가: 2013년 중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에 모래조각 작품 <바닷가재>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초,중,고 교과서에 실린 것만 5차례 정도가 된다. 특히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린 ‘해마가 꿈꾸는 꿈’은 해마가 뭍으로 올라와 신발속에서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그는 “여태까지 모래조각을 하면서 보람을 여기에서 느꼈다”며 껄껄 웃었다.
프레시안: 중국, 미국 등 해외진출 하게된 계기와 그 이후 해외진출 고사한 이유는
김길만 작가: 2000년 8월쯤 동의과학대 금형설계학과 교수 겸 동아리 연마을 촌장이신 고 이선일 교수가 시카고 한인회 초청으로 미국에 가게 됐다며 저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날 저는 이 교수에게 지나가던 말로 한 “미국 하외이 와키키 해변에서 모래작품을 만든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 것이 현실로 다가와 매우 기뻐 흔캐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 시카고 몬트로스호변에서 모래 작품을 시연했다. <시카고 선 타임스> 1면에 “한국에서 온 모래조각가”로 소개됐고 시연한 작품 ‘새 천년을 맞이하는 용’ 사진도 실렸다. 앞서 1996년쯤 광복절 기념행사로 초청받아 선구자 노래의 배경이 었든 중국 용정 해란강에서 모래조각 행사도 했다. 그 이후 필리핀 등 여러나라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고사햇다. 그 이유는 여기에서 공부도 많이 해야 돼고 모래조각 공법을 더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해운대 모래축제에 외국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만이 가지고 작품에 묘사된 디테일함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현재까지 나 만의 작품완성도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프레시안: 후배를 키워 본적 있는지
김길만 작가: 후배를 키워 보고 싶었고 배우려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 젊은 친구들이 너무 경제적으로 이득만 생각해 이런 힘든 작업을 안할려고 한다. 어떨 때에는 이틀도 견디보다가 다음날에 무슨 핑계를 대고 안나오곤 했다. 그는 “그 이후로 제자를 키워 본적 없었다”며 “그러면서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래 조각이 제 세대에서 끝나지 않길을 바란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프레시안: 앞으로 계획은?
김길만 작가: 현재 웅상 명동근린 조각공원 작업장에 완성된 작품이 ‘공주의 성’ , ‘어린왕자’, ‘백결선생’, ‘나무와 소녀’ , 겨울왕국의 소재인 ‘순록의 썰매’ , 아프리카 사막을 그린 ‘머나먼 여정’ , ‘도깨비 꿈’ , ‘고향의 집’ 등 9개 작품이다. 앞으로 명동공원에 11개 작품을 만들어 일본 돗토리 현의 모래미술관처럼 국내 최초 모래 테마파크를 운영하려는 소박한 꿈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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