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도착했다. 불록하게 솟은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우뚝한데 그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石間水)가 북쪽에서 그 속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위쪽엔 동찰(東刹), 서찰(西刹)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종자를 가려서 돌려보냈다.”
조선시대 탁영 김일손 선생이 1489년(조선 성종 20년) 정백욱(일두 정여창) 선생과 함께 지리산의 정취에 빠져 두류산을 기행 할 때 ‘속두류록(屬豆流錄)’에 등구사의 내력을 언급한 부분이다.
두류산은 지리산의 옛 이름이다. 김일손 선생은 1489년 4월14일에서 4월2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했는데 등구사에서 2박을 했다.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 촉동마을 뒤쪽에 있는 등구사는 가락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구형왕(양왕)때 터를 닦아 서기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2년)에 창간한 사찰이다. 당시는 가락국 왕실의 기원 사찰로 동찰과 서찰이 창건되었으나 가락국의 멸망과 더불어 별궁은 무너지고 사찰마저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1709년 편찬된 등구사 중창기에 따르면 당시 무너진 사지(寺地)를 지키고 있던 주지 초학(楚學)대사와 탄기(坦機), 자상(慈祥), 초익(楚益) 등 고승들이 뜻을 모아 3년여 권선 끝에 장엄하게 옛 모습을 되찾아 중창했으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더 이상 원형을 복원하지 못했다.
등구사 인담스님. 지난 2006년부터 인담스님은 무너진 사지에서 토굴을 일구어 등구사 복원에 나섰다. 스님이 구한선원에 앉아 하봉·중봉·천왕봉·제석봉·촛대봉 등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세월이 흘러 2006년 인담스님이 무너진 사지를 걷어내고 토굴을 일구어 다시 등구사란 이름으로 주석하게 됐다. 현재의 선원은 현대식 건물로 법당, 승방, 공양간, 종무소, 선원 등 모두 5동이 사찰을 지키고 있다.
등구사란 지명은 이 일대가 거북이 형국으로 마치 거대한 거북이가 기어 올라가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절이 있는 연화봉에서 삼봉산을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거북이가 산을 오르는 풍수를 갖추고 있다.
법당 내에 봉안된 석불(마애불)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이 선원에서 수행하던 두어 명의 학승과 주지 인담스님이 맨손으로 풀을 베고, 돌을 고르며 잡초로 무성한 터를 다듬기 시작할 때, 문득 한 석공이 나타나 “어찌 부처님 바위에 앉아 있느냐”며 다그쳤다.
인담스님은 당황하여 그 연유를 물은 즉 석공은 “스님들이 앉은 바위가 부처바위다”고 하였다. 20년 넘게 불상만 조각해 온 석공의 눈빛은 자신에 차 있었다. 그는 그 길로 산을 내려가 잠시 후 트럭을 몰고 다시 나타나 주지의 허락을 받은 후 그 바위를 가지고 내려갔다.
이후, 그는 당초 가져갔던 바위가 아닌 장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새긴 마애불을 조각하여 등구사를 찾았다. 그 마애불은 석공의 혼이 담긴 석불로 수천년에 걸쳐 조각되어온 부처님의 모습과 닮았다.
이 일로 인담스님은 등구사지 복원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수수세월동안 바위의 모습으로 등구사를 지켜온 마애불상의 모습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등구사에는 가라국의 마지막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은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고 9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의 제한역(蹄閑驛) 아래 머물렀다.
구형왕은 나라를 양도했다하여 양왕(讓王)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 구형왕의 증손자다.
구형왕은 오도재 너머 촉동에 대궐터를 잡아 역사를 시작했으나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추성(秋城)을 쌓고 피란했다. 그때 9만 대군이 머물렀던 곳을 대군지(大軍地)라하며 구만동(九萬洞)이란 마을이 형성됐다. 현재의 함양읍 구룡리 구만마을이다.
구만마을을 지나면 할개미고개가 있다. 할개미란 곳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곳으로 활을 감는다는 의미다. 활개미가 음변화를 일으켜 할개미가 되었다.
구형왕은 신라군의 계속된 침공을 피해 험준한 지리산 촉동마을 뒤 골짜기에 숨어들었다. 그곳에 궁궐을 지내다 또 다시 쫓아온 적군을 피해 산청 왕산으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무덤은 특이하게 흙 한줌 없는 돌무덤으로 조성됐다.
물려준 나라도 지키지 못하여 조상에게 면목이 없고 후손에게는 부끄러운 조상으로 묘를 가꾸고 돌보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돌로 무덤을 만들라고 유언을 했는지, 도굴을 막기 위해 후손들이 임의로 했는지는 모른다. 가락종친회는 양왕(구형왕)과 왕비 위패를 모신 덕양전에서 봄·가을 제향을 올리고 있다.
마천면 촉동마을에는 빈대궐터가 있고 추성마을에는 석성과 대궐터, 파수대, 뒤주터 등 옛날의 흔적이 남아있다. 구형왕이 떠난 대궐은 주인 없는 빈대궐이 되었다. 이때부터 촉동마을 뒤 골짜기는 빈대궐, 빈대골로 불리게 됐다. 인근 창원마을은 오랜 옛날 곡식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원이라 불렀다.
특히 등구사가 자리한 촉동(燭洞)마을은 마을 뒤 촛대봉이란 산이 솟아 있는데 조천납촉(朝天納燭)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조천납촉은 촛불이 하늘을 밝히는 형국이다. 신라말 화재로 인한 등구사 소실의 원인이 촛불이었다 하니 이래저래 연이 얽혀있다.
등구사를 가기 위해서는 오도재를 넘어야 한다. 이곳 오도재는 마천, 하동, 구례로 통하는 고갯길이었는데 구형황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올라와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그로부터 성황당이 생기고 지나가는 길손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의 천황신을 모시고 제를 지냈던 것이다.
등구사터에는 9세기 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1979년 장충식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졌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고, 도굴 흔적이 뚜렷하며, 석탑의 윗부분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파손되거나 결실되어 2층의 기단 및 1층 탑신부만 확인된다. 2층의 기단에는 가운데 탱주(撑柱)가 있고 1층 탑신의 몸돌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잘 다듬어져 있다. 비록 1층밖에 남지 않았지만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 처마의 네 귀퉁이는 날렵하게 하늘로 치솟아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조각 수법을 볼 때 신라 후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규모가 크고 조각 수법 역시 뛰어난 석탑이다. 파손되어 방치되어 있던 삼층석탑은 2000년에 복원했고, 2012년 3월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7호로 지정됐다.
또 등구사 터 아래엔 튼튼한 성벽 같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글자가 새겨진 아래에는 인공적인 굴이 있는데 그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 일화에는 구형왕이 피신했던 동굴이라고 하는데, 수로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의 굴에는 후대의 사람들이 ‘남산김씨묘동’ 이란 글자를 입구에 새겨 넣어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 굴은 30미터 이상 깊게 뚫려있는데 중간에 무너져 있어 ‘가야사복원’을 위해서라도 자세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구형왕의 전설이 있는 성벽과 그 위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의 터가 남아 있는 지리산 촉동마을 주변은 지금도 땅을 조금만 파면 기와, 자기 등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716년에 발간된 등구사 사적기. “도선국사가 당나라 일행에게서 물러나 돌아와 등구 안국 두 절에 와서 우리나라 산수도 삼천팔백 선맥과 비보할 위치라 크게 감탄했다. (道詵之入唐辞一行而帰也登龜安國兩寺而入東方山水圖三千八百禪補而之點噫哉)” 부분이 나오는 구절.
“만리(萬里) 먼 곳에서 바라보니 부처님의 염화미소(拈花微笑)를 누가 알리요. 미미한 맑은 바람이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곳이 이 산(지리산) 이 절(등구사)이로다.”
“이날 밤에 다시 개어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전부 드러났다. 굽이굽이 뻗은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이 뜻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몹시 궁금했다. 지리산가는길 오도재 고개를 넘어 ‘지리산 조망 안내도’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담았지만, 등구사에 도착하기까지는 화려한 병풍이나 비단 장막 같은 지리산만 보였을 뿐이다.
주지 인담스님을 만나 등구사 중창기에 쓰여 진 연혁과 해석을 하나하나 듣고, 그때 지리산을 보고나서야 왜 선인들이 이런 말을 남겼는지 무릎팍을 두드리며 비로소 이해가 됐다. 수백번도 더 봐왔던 지리산이지만 이날처럼 가깝고 기쁘게 느껴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스님의 도움을 받아 하봉과 중봉 천왕봉을 차례대로 보는 순간 그곳은 산이 아니라 부처님이 누워 웃고 계셨다. 하봉은 부처님의 이마, 중봉은 코, 천왕봉은 입술의 모습으로 또렷하게 다가왔다.
함양 휴천면 견불동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면 부처님이 누워 계신 ‘와불’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여기에서 보는 부처님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연꽃 위에 누워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 지리산의 품속을 보는 듯 했다. 이 광경은 등구사에서만 보였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인담스님은 싱긋 웃으시며 “명산은 다 한 가지씩 모습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웃는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 곳이 등구사다”고 흐뭇해했다. 등구사 중창기에 쓰여진 문맥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변화하는 형상이 기이한 경관이었다.
등구사 뿐만 아니라 지리산 조망대에서 바라보면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촛대봉, 영신봉, 칠신봉, 덕평봉, 벽소령까지 주능선이 넓게 퍼진 바다와 같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하봉·중봉·천왕봉이 모여 부처님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던 것은 생경한 일이다. 김일손 선생이 연꽃 위에서 선인과 우객이 넘실넘실 춤을 추던 곳이라고 표현한 부분과도 일치했다. 다행히 등구사를 찾은 20일은 이틀 전부터 연이어 내린 비로 인해 지리산이 더 가깝게 다가온 덕분이기도 했다.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은 해발 700미터라고 한다. 인담스님은 “등구사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 해발 700미터이며 구한선원(龜閑禪院)이 있는 곳이 800미터 가량 된다”고 했다. 등구사는 정진도량(精進道場)으로 그 위세가 마치 하늘을 오르는 거북이가 그 뜻을 얻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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