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대한 검토
10.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11.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12.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13.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4.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1.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와 <애국가> 노랫말 시상(詩想)
1907년 초 본격적인 국권 회복과 독립 투쟁을 위해 미국에서 돌아오던 길에 안창호는 일본 동경에 들러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유길준을 찾아간 사실이 있다. 이때 안창호는 유길준에게 새 애국가 가사를 지어주십사고 간청했으나, 유길준은 자기는 노래 짓는 재주가 없다며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안창호는 또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박영효를 찾아가서 태극기의 의미를 물었으나 "태극(太極)이 무극(無極)"이라는 모호한 말만 듣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안창호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깨워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기(國旗)와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라는 상징물이 시급히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그것은 앞으로 국가(國歌)로 불릴만한 새 애국가 가사가 필요한데 왜 하필 유길준을 찾아갔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안창호가 어떤 근거에서 애국가 가사를 지을 능력과 명분이 유길준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단서가 1895년에 있었던 조선 정부 독립선고식 절차에서 발견된다.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박재순 박사는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결정적 문헌 증거로 1895년 조선 정부 독립선고식에서 불린 독립기념경절회 창가(약칭 독립경절가)를 제시한다. 12절로 되어있는 이 '독립경절가'가 바로 유길준 작사로, 애국가(무궁화歌)와는 가사(歌詞)나 곡(曲)의 형식과 운율이 전혀 다르지만, 그중 6절에서 8절까지의 가사가 현행 애국가와 시상(詩想)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재순, '안창호 작사설을 위한 결론', <기독교사상> 2019년 9월호 참조)
'독립경절가'의 가사는 국내에는 전해진 문헌이 없고,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그 가사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실려있다. 1895년 6월 18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독립경절가 중 6절~8절까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독립경절가'의 우리말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고로 요미우리신문에 번역되어 있는 가사를 다시 우리말로 재번역할 수밖에 없는 바, 박재순 박사가 제시한 번역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박재순 박사는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와 애국가 노랫말을 비교하면서, "안창호와 유길준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할 때 '독립경절가'야말로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문헌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박재순 박사의 견해에 크게 공감하고 있거니와, 박재순 박사의 논리를 인용하고 나 나름대로 생각을 덧붙여 의견을 개진(開陳)해 보면 이렇다.
'독립경절가'는 조선 말기인 1895년 6월에 나온 12절 가사(歌詞)의 노래이다. 전체적인 기조는 임금과 조선국을 찬양하는 노래이지만 6~8절은 현행 애국가와 그 내용과 시상(詩想)에 있어 일치하거나 맥락이 유사하다.
두 노랫말을 한번 비교해 보자.
현행 <애국가=무궁화歌2>의 노랫말이 완성된 것은 1907년의 일인데, 그보다 12년 전에 나온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노랫말이 이렇듯 적지 않은 일치와 상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뜻밖이다. 이는 1907년 안창호가 '무궁화歌2'의 본가사를 새로 작사할 때, 12년 전 나온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는 안창호가 동경에 기거하던 유길준을 찾아간 사실과 교차검증(croos check)되고 있다.
'독립경절가'가 나온 1895년에 안창호는 서울 구세학당(밀러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이때 이미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함께 '독립경절가'를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1895년 조선 정부의 독립선고식에서 부른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는 이제 막 세상 물정에 눈뜬 17세의 소년 안창호에게 큰 자극과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유길준이었다. 1895년에 발행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 중심의 국가에서 벗어나 세계 속의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서양의 문명을 단순히 모방하는 개화가 아니라 나의 좋은 것을 지켜가는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문명 개화를 주장했다. 약육강식 부국강병의 제국주의적 문명관에서 벗어나 정신 개화, 지식 개화, 물질 개화를 말하는 동시에 국민 개개인의 교육을 강조하고 국민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안창호는 유길준을 존경했을 뿐 아니라 그가 작사한 '독립경절가'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경에 있는 유길준을 찾아갔을 것이다.
안창호가 동경에서 유길준을 찾아가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유길준은 이를 사양했지만 '독립경절가'에 대해 12년 전의 기억과 발상을 반추(反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귀국한 안창호가 선천교회를 방문하여 우연히 '백두산과 두만강 물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찬미가를 듣고 깨친 바 있어 바로 평양에 와서 새 애국가 노랫말을 지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선천교회 찬미가 노랫말과 더불어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가사가 떠올랐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유길준이 애국가 작사를 고사(固辭)하자 안창호는 자신이 직접 애국가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 선천교회에서 들은 '백두산과 두만강' 찬미가사에 자극을 받고 이를 바탕으로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일부 가사를 복원·융합하여 새 애국가 노랫말을 착상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유길준에 대한 안창호의 존경심이 특별했다는 것은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 명칭을 이어받아 안창호가 흥사단을 설립한 사실로 충분히 증명된다. 흥사단은 원래 1907년 유길준이 일본에서 돌아와 조직한 계몽단체이다. 유길준은 '흥사단'을 조직하여 국민개사(國民皆士),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훌륭한 선비로 만듦으로써 훌륭한 나라를 이루려고 했다.
안창호는 문명 개화를 향한 유길준의 정신과 철학을 존중하고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서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만들었다. 존경하는 마음,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굳이 유길준이 만든 조직 명칭을 가져왔을 리 없으며,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핵심 대목을 이어받았을 리 없다.
여기서 나는 더 나아가 좀 엉뚱한 추측을 한번 해보려 한다. 안창호와 유길준의 관계가 단지 그런 경외(敬畏)하는 사이였는지 아니면 보다 밀접한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서 나는 1896년 11월 밀러학당 학생 안창호가 독립문 정초식에 부를 '무궁화노래'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의문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 말고 그 당시의 본가사는 무엇이며 몇 절까지 불렀을까 하는 문제였다.
윤정경 씨의 전언(傳言)에 의하더라도 안창호 선생이 윤형갑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무궁화노래는 내가 지었다. 무궁화는 꽃 이름이 아니고 꽃처럼 피고지는 조선 사람을 뜻한다"는 '후렴'에 대한 설명뿐이고, 본가사 노랫말에 대한 언급은 없다. 1896년에 청년 안창호가 '무궁화노래'를 착상하고 계획할 때 어떤 식으로든 '무궁화노래'의 본가사를 만들어 불렀을 터인데, 대체 그 가사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안창호가 1896년 구상한 최초의 '무궁화노래' 본가사가 혹시 1895년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서 가져온 것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증거는 없지만 개연성(蓋然性)은 있으므로, 나는 '독립경절가' 6절~8절까지를 '무궁화노래'의 본가사로 설정하고 '올드랭사인' 악보에 말을 한번 놓아보았다. 그랬더니 기(旣) 재번역된 문장으로는 악보에 말이 놓이지 않았다. 글자 수와 음율(音律)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가사와 한국어 재번역가사를 자세히 비교해보니 번역에서 재번역으로 가고 오는 사이에 원래의 우리말 어휘(語彙)와 운율(韻律)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감지되었다.
그래서 나는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번역가사를 내 나름대로 우리말로 재번역해 보았다. 다음은 내가 임의로 재번역한 '독립경절가' 6절~8절 노랫말이다.
내가 지금 재번역한 이 노랫말이 유길준이 직접 쓴 '독립경절가' 6절~8절 가사와 얼마나 일치할지는 알 수 없다. 원래의 '독립경절가' 가사는 아마도 글자수와 운율이 이와는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안창호가 그 가사를 바탕으로 '무궁화노래'의 본가사를 만들고자 했다면 아마도 내가 재번역한 노랫말에 가깝게 글자수와 운율을 조정(調整)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조정된 노랫말을 '무궁화노래' 악보에 얹어보면 다음과 같다.
딱 맞아떨어진다. 1896년 독립문 정초식 단합대회에서 환호 속에 불린 최초의 '무궁화노래' 본가사 노랫말이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6~8절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 가상(假想) 악보인데, 딱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 악보는 전적으로 나의 추측이다. 내가 그동안 이 연재글에서 주장한 모든 내용들은 비록 가설(假說)이라 하더라도 합리적 근거가 있거나 실제 전언(傳言)에 바탕한 것이지만, 위 악보만큼은 엉뚱할 만큼 가설(假說)이다. 그러나 만약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안창호 작사설을 증빙하는 마지막 퍼즐이 비로소 찾아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발굴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윤치호가 주도한(작사한) '성자신손 무궁화歌' 즉 '황실 충성가'로 인해 사라졌던 애초 '무궁화노래'의 본가사인 '장백산, 동해물' '우리 국민의 기염과 진심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등의 시상(詩想)이 10년 뒤 안창호에 의해 '주권재민 국민가'인 '동해물과 무궁화歌' 즉 현행 <애국가>의 본가사로 부활했다."
나의 가설은 일단 유보해두기로 하고, 박재순 박사는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의 발굴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유길준이 쓴 '독립경절가'의 시상(詩想)과 내용이 <애국가>의 시상(詩想) 및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증거다. 안창호가 유길준에게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유길준이 사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 바탕해 애국가가 지어진 역사적 정황과 맥락을 생각하면, 그리고 안창호와 유길준의 정신적·사상적 일치를 감안하면,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안창호 선생이 직접 말씀한 '애국가에 담긴 뜻'
안창호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서부터 1932년 윤봉길 의거로 인해 체포·강제송환·구금될 때까지의 상당 기간 상해에 머무를 때, 선천 출신 윤형갑이라는 젊은이에게 여러 활동을 시키면서 곁에 두고 자신이 지은 <애국가>에 관한 많은 생각을 피력(披瀝)하곤 했다.
윤형갑의 종손인 윤정경이 채록하여 공개한 그 내용들은 너무나 놀랍고 처음 듣는 말인데다 기록의 방식이 너무 정보분석(?)적이어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 바, 여기서 윤형갑과 윤정경이 전하고자 했던 안창호 선생의 생각과 본뜻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알기 쉽게 정리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무궁화'에 관한 뜻밖의 이야기
① '무궁화'는 꽃 이름이 아니라 '조선 사람'을 가리킨, 새로 만든 개념이었다. '무궁화'라는 낱말은 그 당시 일상에서 쓰지 않던 낱말로 내(안창호)가 생각해낸 신조어인데, 대중들에게는 꽃이름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애창곡이 됐다.
② '무궁화'를 근화(槿花)와 동일어인 줄로 착각하거나 왜곡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앞잡이들이 꾸며낸 말이다. 근화(槿花)는 하루살이 단명(短命) 꽃으로 무궁한 꽃 무궁화(無窮花)와는 정반대 개념이며 나라꽃이 될 수 없다.
2)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대한 비판
① 윤치호는 '성자신손'으로 시작하는 '황실 애국가'나 '동해물과'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무궁화歌'라고 부른 적이 없다. 윤치호는 자신이 본가사를 지은 '무궁화歌1'을 '황실가'라 칭하거나 영어로 'patriotic hymn'이라 칭했다.
② 윤치호는 자기가 펴낸 '찬미가'에 내(안창호)가 새로 지은 '무궁화歌2'를 실으면서 가사 중 '우리나라 만세'를 '우리 대한(제국) 만세'로, '정성을 다하여'를 '임군을 섬기며'로 바꿔놓음으로써 '주권재민 애국가'를 '황실 충성가'로 변질시켰다.
③ 애국가의 가사를 한 사람이 지은 가사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되고 민요처럼 많은 사람이 참여해 가사를 개량하고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 맞지만, 윤치호가 주권재민 애국가를 황실 충성가로 바꾼 것은 개량(改良) 아닌 개악(改惡)이다.다만 '찬미가' 책을 통해 새로 지은 '무궁화歌2'가 널리 보급된 측면은 있다.
3) 평안도 선천예배당에서 떠올린 애국가 착상(著想)
○ 선천예배당 찬미가 중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이슬 맺힐 때 즉시 일어나'를 부르는 이유가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사시사철 부지런히 소명을 다하자"는 뜻이라는 말을 듣고, 춘·하·추·동 네 계절을 담는 기승전결(起承轉結) 구조를 착상했다.
① 예배볼 때 부른 '백두산이 다 닳고 두만강 물이 마르도록'이라는 '간도 땅 되찾기' 의지(意志)가 담겨있는 찬미가에서 독립전쟁 혁명기지로서의 새 이상향(理想鄕) 건설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진취적 기상(氣像)을 고취하고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시상(詩想)을 떠올렸다. - 1절(봄)
② 여름날 들풀의 성장기운이 왕성해지도록 앞장서야 할 '늘푸른 소나무'들에게 역동성과 안정성을 갖추자고 촉구하는 뜻에서 "철갑(鐵甲)을 두른 듯" 하다고 했고, 변화 속에서도 불변하는 대자연의 이치를 닮자고 하는 뜻에서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노랫말을 지었다. - 2절(여름)
③ 주권재민 혁명의 목표는 풍요와 평화인지라, 한가위 날 맑은 하늘 밝은 보름달에 비유해 일편단심 우리 민족의 미래와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는 뜻에서 "가을하늘 광활(廣闊)한데 맑고 구름없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라는 시상을 떠올렸다. - 3절(가을)
④ 엄동설한(嚴冬雪寒) 같은 간난(艱難)과 역경(逆境)이 닥쳐도 굴하거나 멈추지 말고 강인한 인내심과 단결심 투쟁 의식으로 극복해 나가자는 뜻을 담아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정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는 노랫말을 지었다. - 4절(겨울)
○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은 기독교 사회의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동지 날 자정에 신년하례(新年賀禮) 송구영신(送舊迎新)의 희망과 기쁨을 찬미하는 노래라고 한다. 태양이 기운이 빠져 점점 짧아지다가 다시 기운을 되찾아 늘어나기 시작하는 동지날에 태양 기운(氣運) 회복을 찬미하고 환희했던 풍습이 노래에 담겨있는 것이다.
다만 대자연은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겨울이 가고 봄이 와서 만물이 생동하지만, 주권재민 혁명의 봄은 앉아서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닌즉, 사생결단(死生決斷)의 투쟁으로 군왕제의 무능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추운 겨울을 퇴치하고 공화제 혁명 기운이 생동하는 따뜻한 봄을 빨리 맞게 하려는 갈구(渴求)의 노래로 춘·하·추·동 새 노랫말을 착상하였다.
4) '하나님' 또는 '하느님'에 대한 작사자의 생각
①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구절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에게 기대려는 의타적인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自主) 자립(自立)하려는 굳은 의지와 의욕을 실천해 나가면 신(神)의 가호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②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구절은 또 천신(天神)신앙이 넓고 깊게 퍼져있는 우리 겨레에게 혁명의 성공을 믿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③ 간도지방 대종교 집단에서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야말로 가장 잘된 사례이다. '하나님'에서 '하느님'으로 글자 하나 바꾸어 부름으로써 기독교 찬미가에서 겨레의 애국가로 승화(昇華)될 수 있었다.
3. 안창호 애국계몽가사와 애국가 노랫말의 시상(詩想)
비교사회학계와 역사학계의 원로인 신용하 교수는 '애국가 작사는 누구의 작품인가'라는 논문(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297호, 2018년 4월 1일 발행)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기 위해 안창호의 애국계몽가사들과 애국가 노랫말의 구상(構想)과 표현을 비교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실제로 이를 시도하였다.
이는 매우 실증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는 대단히 유효한 발상인 바, 그 논문에 전개된 비교 논리를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도산 안창호의 다른 애국계몽가사들 속에는 애국가 본가사의 시상(詩想)과 표현이 거의 일치하는 대목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애국창가 연구의 권위자인 신용하 교수는 이 같은 결과를 놓고, 구한말 다른 어떤 이의 애국계몽가사에도 애국가 노랫말과 이러한 일치를 보이는 작품이 없으므로 애국가 본가사 1·2·3·4절의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가 지은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후렴> 노랫말의 작사자에 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고 있는 바, 이 문제는 추후 재론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애국가 노랫말 자체에 담겨있는 사상과 철학
1) 씨알연구소 소장 박재순 박사는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라는 제목으로 2018년 10월부터 2019년 9월까지 12회에 걸쳐 관련 글을 연재하였다.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임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사상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가장 깊이 있게 밝혀낸 이는 신학박사 박재순 소장이라 생각된다.
박재순 소장이 안창호와 윤치호를 심리·철학적으로 비교하여 전개한 애국가 작사자 규명 과정을 보면, 한마디로 "자기 머릿속에 없는 생각을 어떻게 애국가 노랫말로 지어낼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이다.
애국가의 노랫말을 보면 윤치호의 머릿속에는 없고 안창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사상이요 철학인데, 두 사람의 정신과 의지가 다르고 생각과 행동이 달랐는데, 다시말해 두 사람의 애국심과 국가관이 엄연히 다른데, 어떻게 윤치호 작사라고 억지 주장을 하느냐는 질타(叱咤)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박재순 소장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 그의 논지의 핵심만 여기서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2) 애국가 작사자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애국가에는 작사자의 심리와 철학이 담겨있다. 애국가에 담긴 감정과 의식, 정신과 의지를 살펴보면 작사자가 어떤 심정과 뜻을 가지고 애국가를 지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박재순 소장이 애국가 각 절에 담겨있는 작사자의 뜻과 시상(詩想)을 분석한 내용이다.
나의 삶의 터전보다 우리나라가 더 중요함을 나타낸다. 삶의 터전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으면 동해 바다와 백두산에 터 잡고 사는 나의 삶과 몸, 나의 육체적 존재도 마르고 닳아 없어질 것이다. 삶의 터전과 나의 육체적 존재가 사라져도 '나라(國家)'는 영원히 살아남고 보전되어야 한다는 간절하고 사무친 염원이 1절에 새겨져 있다. '나라'를 떠나서는 '나'가 없다. '나' 없이는 '나라'도 없다. 여기서 '나'와 '나라'는 완전히 일치된다.
(앞서 언급했듯 '하나님'에서 '하느님'으로 글자 하나 바꾸어 부름으로써 기독교 찬미가에서 겨레의 애국가로 승화(昇華)될 수 있었다.)
외부의 변화와 시련에도 변하지 않는 확고한 주체성과 정체성을 말해준다. 어떤 시련과 유혹과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는 푸른 솔의 절개와 기개, 높은 기상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높은 기상을 내세우는 것이고,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확고한 주체성과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을 하늘은 땅의 물질적 조건과 현실을 뛰어넘은 높고 크고 깨끗한 이념과 뜻을 나타낸다. 높고 맑은 가을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은 이지러지거나 쪼개지지 않는 강하고 뚜렷한 신념과 의지를 나타낸다.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은 애국가를 지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을하늘과 같은 높고 큰 이념과 뜻을 가져야 하며, 밝은 달처럼 뚜렷하고 환한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
푸른 솔 같은 강인한 기상과 밝은 달 같은 떳떳하고 뚜렷한 마음으로 형편이 좋거나 나쁘거나, 이기거나 지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한결같이 몸과 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이다.
(1907년 안창호가 처음 이 가사를 지을 때의 노랫말은 '님군을 섬기며'나 '충성을 다하여'가 아닌 '정성을 다하여'였다. 애초 선천예배당 애국찬미가로서 착상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님군을 섬기며' '충성을 다하여' '민족을 도흐며' 등으로 바뀌어 불리던 이 노랫말이 다시 '정성을 다하여'로 돌아온 것은 1945년 발간된 김구 제(題) '한국애국가'에서였다.)
3) 이렇듯 애국가에 담긴 심리와 정신을 살펴보면 자아의 분열과 갈등에 빠지지 않고 '나'와 '나라'를 하나로 여김을 알 수 있다. 애국가를 지은 사람은 내적 자아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여 확고한 주체성과 통일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며, '나'와 '나라'를 일치시킨 사람이다.
내적 자아의 분열과 갈등에 빠져 헤매면서 '나'와 '나라'를 분리하고, 민족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수치스럽게 생각한 윤치호는 결코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다.
그와 달리 애국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애국가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으며, 애국가를 사무치게 부른 사람! 그가 바로 애국가를 지은 사람이며, 그가 바로 안창호다.
5. 덧붙이는 말
박재순 소장은 누구보다도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나와 의견이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는 바, 하나는 윤정경 씨의 전언(傳言)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 있어 나와는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고, 또 하나는 <무궁화 후렴>을 작사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 나와는 견해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는 절대 될 수 없고 안창호가 분명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와 똑같이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우선 전제해 두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기독교사상'에 연재된 박재순 소장의 글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덧붙여, '흥사단'이 2013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 도서로 출간한 <애국가와 안창호>라는 책이 있다. 오동춘·안용환 두 분 박사의 공저(共著)로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빙하는 종합보고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바, 꼭 필독해주시기를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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