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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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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⑩

원래 이번 주 계획된 글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이었으나, 글을 전개하다 보니 '무궁화노래'에 관한 별도의 탐색이 요구된지라, 애국가의 원형인 '무궁화노래'의 진실을 밝히는 글 한편을 특별히 추가하고자 한다.

1. 민요(民謠)로서의 '무궁화노래'와 <애국가>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무궁화가1=황실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무궁화가2=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현행 <애국가>는 '성자신손 오백년'으로 시작되는 '황실가'와 후렴(後斂)이 똑같다. 민요적 관점에서 보면 후렴이 같은 노래는 동일한 노래군(群)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진도아리랑'의 경우 본가사와 후렴(後斂) 또는 전렴(前斂)을 메기고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노래가 전개된다.

(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본가사) 문경 새재는 얼마나 먼가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 난다.

(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본가사) 청천 하늘엔 별도나 많고

우리네 가슴속에는 수심도 많다

(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여기서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진도아리랑'에 본가사(메기는 소리)가 있고 후렴(받는 소리)이 있는데, 어느 것이 먼저 생겨났을까? 잠시 생각해본 후에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답은 '후렴'이다. '받는 소리'인 후렴이 먼저 생겨났고, '메기는 소리'인 본가사가 나중에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민요가 애초에 일노래(노동요)로서 생겨났기 때문에 생활민요나 여흥민요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받는 소리'는 집단적인 흥얼거림이 깔린 대목이고 '메기는 소리'는 개개인의 의견과 생각이 튀어나오는 대목이다. 따라서 '받는 소리'는 변하지 않는 원형(原形)이고, '메기는 소리'는 첨삭(添削) 수정되면서 변화 축적(蓄積)되어가는 변형(變形)이다.

그러니까 민요의 생성 과정에서 모태(母胎)가 되는 것은 '후렴'이 먼저이지 본가사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다. '진도아리랑' 제목이 '아리랑'으로 된 것은 후렴이 아리랑이기 때문이지, 본가사만 갖고는 노래 제목을 '아리랑'이라고 부를 아무 근거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애국가>는 후렴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되어있는 '무궁화노래'의 한 유형이다. '성자신손 오백년'이나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본가사가 먼저 있어서 생겨난 노래가 아니라, '무궁화 삼천리'라는 후렴이 먼저 생겨나서 불리면서 본가사들이 여기 덧붙여져 첨삭 축적되어갔다고 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황실가=무궁화가1'이 완성된 단계가 있었고, 다시 10년 만에 '혁명적인(충군애국⇒주권재민)' 사고(思考)의 전환을 거쳐 '애국가=무궁화가2'가 탄생했던 것이다.

2. '무궁화노래'는 누가 만들었나?

1)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절에 불린 '무궁화노래'

그렇다면, 현행 <애국가>의 원형이랄 수 있는 '무궁화노래'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무궁화노래'라는 제목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것은 1897년 8월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절에 이 노래를 불렀다는 <독립신문> 기록이다. 당시 <독립신문> 8월 17일 자에는 관련 기사와 함께 그 노랫말이 소개되어 있고, 같은 날 <독립신문> 영문판(The Independent)에는 편집인 서재필의 주(註-editorial note)가 실려 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립신문 –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노래를 부르난대,

"우리 나라 우리 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ᄒᆞᆫᄀᆞ지로

만만셰를 길거ᄒᆞ야 태평 독립 ᄒᆞ여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률에 맛쵸아 병창하더라.

The Independent – The Paichai boys sang a song 'National Flower'

which was composed by the poet laureate of Korea,

Mr. T. H. Yun, for the occasion.

They sang i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accompanied by Mrs. M. F. Scranton on the organ.

번역 :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의 계관시인 윤치호씨가 이번 행사를 위해

작사한 '국화(國花) 노래'를 부른 바,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었고,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를 맞춰주었다.

▲ 자료1. 1897년 8월 17일 자 한글판 <독립신문>과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서재필의 주(註-editorial note).


그동안 '윤치호 작사설'을 옹호해온 측에서는 <독립신문> 영문판 서재필의 편집 주(註-editorial note)가 발견된 후, 이를 근거로 "'무궁화노래'를 지은 이가 윤치호이므로 현행 애국가의 작사자도 윤치호"라는 주장을 해왔다. 이는 논리 자체가 비약(飛躍)한 터라 언급할 수준이 아니거니와, 분명히 따져 밝혀야 할 사항은 서재필이 계관시인(?) 윤치호 작사(作詞)라고 언급한 노랫말은 분명 '우리나라 우리님군 ~ 태평독립 하여보세'로만 나와있을 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하는 후렴구절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두 번째 연재 글에서 이 장면을 언급하면서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 바, 하나는 노래 제목이 '무궁화노래'라면서 왜 <독립신문>에 수록된 노랫말에 '무궁화'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그 당시에 이 노래를 4절까지 다 불렀는지 아니면 1절만 부른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관련 기사 :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2) 배재학당 방학예식에서 불린 '무궁화노래'

그런데 조선개국 기원절 행사 몇 달 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출범하고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1899년 6월, 배재학당의 방학예식에 '무궁화노래'가 다시 등장한다. 이 사실 역시 <독립신문>에서 확인되는 바, "배재학당 방학예식에서 학생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는데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으로 불렀다"는 기사와 함께 4절까지의 노랫말을 전부 수록해놓은 것이다.

4절로 완성된 이 '무궁화노래'의 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절. 셩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하셰
2절. 애국하는 렬심의긔 북악갓치 놉고

츙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갓치 깁허 (후렴)

3절. 쳔만인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야

사롱공샹 귀쳔업시 직분만 다하셰 (후렴)

4절. 우리나라 우리황뎨 황텬이 도으샤

군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하셰 (후렴)

▲ 자료2. 1899년 6월 29일 자 <독립신문> 기사.

여기서 우리는 1897년 '무궁화노래'가 처음 출현했을 때 나온 가사가 2년 뒤인 1899년 '완성된 무궁화노래' 즉 '무궁화歌1'의 4절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무궁화歌1'의 본가사 4절 "우리나라 우리황뎨 황텬이 도으샤, 군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하셰"라는 구절은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행사 때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무궁화노래'의 본가사와 글자 수(數)와 운율만 다를 뿐 사실상 똑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님군과 백성이 한가지로 만만셰를 길거하야'라는 가사가 '군민동락(君民同樂) 만만셰에'로 축약 · 운문화(韻文化)되어 있을 뿐, 나머지 가사는 똑같다.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가사가 왜 2년 후에 이렇게 축약·운문화되어 바뀌어 있을까? 어째서 그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3) 1897년 '무궁화노래'의 가상(假想) 악보 비교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이를 음악적 측면에서 한번 들여다보자.

항일음악 연구에 가장 큰 공적을 남긴 고(故) 노동은 교수가 1897년의 '무궁화노래'를 당시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어떻게 불렀을 것인지 추정하여 악보로 작성한즉, 다음의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다.


▲ 자료3. 노동은 교수가 '무궁화노래'를 가상(假想) 채보한 사례1.(연도 표기 중 1899년은 1897년의 오류임) '애국가 가사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1994년 <역사비평> 여름호 p23)

▲ 자료4. 노동은 교수가 '무궁화노래'를 가상(假想) 채보한 사례2.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민족문제연구소 p88)

노동은 교수는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1897년의 '무궁화노래' 가사를 가급적 보태거나 바꾸지 않고 가상(假想) 채보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이 '무궁화노래'인데도 <독립신문> 기사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팩트만 그대로 받아들여 채보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드 랭 사인'은 네 소절로 구성돼 있어서, 1897년 <독립신문> 기사에 실린 윤치호 가사만으로는 그 분량과 운율이 맞지 않게 되어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은 교수는 자료3의 채보사례에서 보듯 '만만셰를 길거하야 태평독립 하여보세'를 후렴처럼 간주해서 두 번 반복하는 것으로 가상(假想) 채보를 해본 것 같다.

그런데 고인(故人)의 유고(遺稿)를 정리한 '항일음악 330곡집'에서는 '만만셰를 길거하야 태평독립 하여보세'를 반복하지 않고 원래의 가사 그대로 '올드 랭 사인' 3소절과 4소절 두 소절에 길게 맞춰 놓았다. 그러다 보니 가사 진행이 너무 늘어져서 음악적으로 더 부적합한 결과가 되었다.

이 같은 시도가 노동은 교수의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고인(故人)의 후학들이 달리 판단하였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으나, 내 생각으로 둘을 비교하면 자료4의 채보사례보다는 자료3의 채보사례가 음악적으로 합당하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1897년의 '무궁화노래'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하는 후렴구 없이 본가사인 "우리 나라 우리 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성이 한가지로 만만셰를 길거하야 태평독립 하여보셰"만으로 불리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노래 제목이 '무궁화노래'가 절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궁화노래'이니만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구는 반드시 들어가 있었을 것이며, 당시가 아직 조선시대였으므로 그 다음 후렴구는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올드 랭 사인' 곡조 네 소절에 위의 본가사와 '무궁화' 후렴이 다 들어가려면 본가사는 반드시 "우리나라 우리황뎨 황텬이 도으샤 군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하셰."로 축약 · 운문화(韻文化)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1897년 조선 개국 505주년 기원절에서의 '무궁화노래'는 윤치호가 써 준 본가사 그대로 부른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축약 · 운문화되어 적용(適用)되었을 터이며, 거기에 '무궁화' 후렴이 결합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때 불렸음 직한 '무궁화노래'를 가상(假想) 채보해보면 다음과 같다.

▲ 자료5.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행사에서의 '무궁화노래' 가상채보 사례3.(글쓴이의 추정이며 1899년 '무궁화가1'의 4절과 같음)

4) 윤치호는 '무궁화노래' 후렴의 작사자가 아니다

이제 당시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시도해보자.

서재필은 조선개국 505년 기원행사에서 불린 '무궁화노래'에 대해 일종의 편견 혹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국가적 공식행사에 처음 출현한 '무궁화노래'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된 후렴이 더 중요한 바탕(원형)이라는 점을 서재필은 인식하지 못했다. 그 점을 인식했다면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무궁화노래' 가사를 소개할 때 '우리나라 우리 님군 ~ 태평 독립 하여보세'를 소개할 것이 아니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됴선사람 됴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소개했어야 옳다. 제목이 '무궁화노래'니까 당연히 그랬어야 맞다.

그런데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우리나라 우리 님군 ~ 태평독립 하여보세'를 실었다. 그 이유는 그 가사가 윤치호 작사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하는 후렴은 굳이 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재필은 '무궁화노래'가 갖고 있는 민요적 특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더구나 후렴은 개국 기원절 행사 이전에도 불린 적이 있어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윤치호 작사가 아닌 젊은 학생들 수준에서 창작된 것이었으므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후렴이 윤치호 작사였다면 서재필은 당연히 본가사에 더해 후렴까지 신문지면에 소개했을 것이다. 제목이 '무궁화노래'니까 당연히 '무궁화'란 낱말이 들어있는 가사를 소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렴이 윤치호 작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재필의 안중(眼中)에 후렴 가사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 자료6. 1897년 8월 17일 자 한글판 <독립신문> 기사.

추리해 보자.

'무궁화노래'는 이미 후렴이 먼저 나와 있었고, 아마도 다른 행사에서 선을 보였을 터이며 매우 좋은 반응을 얻은 사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 국가행사에 공식순서로 추천되었을 터이고, 누군가가 윤치호에게 수준 높은 본가사를 작사해 줄 것을 요청했을 것이다.

추정컨대 윤치호는 조선건국 505주년 기원행사를 위해 가사를 지어주면서 이 노래가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부르기로 돼 있다는 것, '무궁화 삼천리'로 된 후렴이 따로 있어 함께 결합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잘 알고 있었다면 가사의 분량과 운율을 그렇게 만들어주지는 않았을 터.

윤치호의 가사를 받은 서재필은 그것을 원문 그대로 <독립신문>에 실은 것으로 보인다. 허나 실제 행사에서는 누군가가 윤치호의 가사를 정형(定型)의 운문으로 축약하여 '올드 랭 사인' 첫 소절과 둘째 소절의 본가사로 배치해서 불렀던 것이다.

내가 원래 직업이 연출가이고 축제 총감독인지라 이만한 규모의 행사에서 어떤 일이 준비되고 실행되는지 잘 알고 있는 바, 120여 년 전에도 조선 건국 505주년 기원이라는 국가적 행사에 능력 있는 음악인을 포함한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순발력 있는 공동작업이 있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는 2년 후, 1899년 6월 배재학당 학생들의 방학예식 때 이 '무궁화노래'가 네 절로 된 구성(춘하추동 또는 기승전결)으로 완성되어 불리었고, 윤치호가 써준 가사를 운문으로 축약한 '우리나라 우리 님군 ~ 태평 독립하세' 는 '완성된 무궁화노래' 즉 '무궁화歌1'의 4절 본가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후렴 '조선사람 조선으로'는 당연히 '대한사람 대한으로'로 바뀌었다.

생각을 정리해보자.

윤치호는 '무궁화노래' 후렴과는 애초에 관련이 없었으며, '올드 랭 사인'이라는 스코틀랜드 민요 역시 윤치호가 주도적으로 채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윤치호가 직접 지은 가사를 최대한으로 넓혀 수용해 본다면, 1897년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행사에서 부른 '무궁화노래'의 1절 가사와, 다시 그 한 절을 포함해서 1899년 배재학당 방학예식에서 부른 '무궁화歌1'의 1절부터 4절까지의 본가사들이 윤치호 작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 - 그러므로 윤치호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여 '무궁화 삼천리' 후렴이 따르는 현행 <애국가>에 있어서는 본가사와 후렴 어느 쪽에 있어서도 작사자가 아니다.

5) 1896년 독립문 정초식에서 처음 선보인 '무궁화노래'

그럼 '무궁화노래'는 1897년 8월 조선개국 505주년 기원행사 이전에 언제 어디서 처음 선을 보였을까? 그 전해인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던 독립문 정초식(定礎式) 장면을 취재한 아래의 기록에 그 단서가 나온다.

"지난 토요일 오후 2시반에 독립문 주춧돌 놓는 예식을 독립공원 땅에서 시행하였는데 (중략) 배재학당 학도들이 '조선가'를 부르고, 회장이 주춧돌을 놓고, 교사 아펜젤러씨가 조선말로 하나님께 축수하되 (중략) 회장 안경수 씨가 연설하되...(중략) 그 다음에 한성 판윤 이채연씨가 조선독립이 어찌하여 (중략) 그 다음은 배재학당 학도들이 독립가를 노래하고 그 후 외부대신 리완용씨가 연설하되 (중략) 그 다음은 의사 제이슨(서재필)씨가 연설하되 (중략) 그 후에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진보가를 노래하고 (중략) 각 학교 학원들이 다 대군주 폐하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독립협회를 위하여 천세를 부르고, 다른 애국가들을 부르더라.(후략)"(<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자)

이 기사에서 우리는 정초식 행사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바,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사안이 있다. 이 연재 글에 '독립협회' '독립신문'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흔히 일반인들은 '독립협회'라고 하면 선각자들이 주도하여 일본에 대한 독립을 도모(圖謀)한 단체로 알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협회 상층부의 의식은 '청국을 배척하고 일본을 추종하는' 성향이 강했다.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는데, 후에 독립협회의 지도부였던 이완용과 윤치호가 특출한 부왜역적(附倭逆賊)이 된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각설하고, 다음에 제시하는 자료7은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 때 배포된 전단(傳單)이다. 정초식을 목격한 어느 독일 선교사가 갖고 있던 자료인데, 117년이 지난 2013년에야 <뉴데일리(New Daily)>라는 인터넷 신문에 의해 발굴되었다. 1896년 11월 24일 자 <독립신문> 기사 내용과 딱 일치하는 자료이다.

▲ 자료7.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에 배포한 전단, 조선가 · 독립가 · 진보가의 가사가 실려 있다.

이 전단에는 그 당시 불린 애국가류 세 편(조선가 · 독립가 · 진보가)의 가사가 온전히 실려있는 바, 가사의 분량과 내용 그리고 율격의 다양성이 상당한 수준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가 발견되면서 그동안 애국가 연구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하나의 가설(假說)이 무너지게 되었다. 애국가 연구자들은 100여 년 전 <독립신문>에 기록돼 있는 '조선가'가 '우리 황상폐하 텬디 일월갓치 만수무강'으로 시작되는 'KOREA'이거나, 아니면 '무궁화노래'의 후렴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가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왔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발견된 전단에 실려있는 '조선가'는 '내 나라를 위해 상쥬께 빕니다. 도와주잔으면 나라 망하겠네'로 시작하는 아주 독특한 가사로 된 별도의 작품이었다.

이 자료의 등장으로 애국가 연구자들은 '무궁화노래'가 처음 출현한 것은 1897년 8월의 조선건국 505주년 기원행사로 보아야 한다는 설(說)을 고수하게 됐고, 아펜젤러 문헌에서 발견된 서재필 편집자 주(註 : editorial note)를 앞세워 '무궁화 삼천리' 후렴까지도 윤치호 작사로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서 놓친 부분이 있다. <독립신문> 기사 말미에 적혀있는 바로 이 구절이다.

"각 학교 학원들이 다 대군주 폐하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독립협회를 위하여 천세를 부르고, 다른 애국가들을 부르더라."

▲ 자료8. 1896년 11월 24일 자 <독립신문> 기사.

여기서 주목해야 할 내용이 '각 학교 학원들'이라는 구절과 "다른 애국가들을 부르더라'라는 구절이다. 즉 독립문 정초식에 동원된 참가단체의 주축은 배재학당이었지만, 행사의 규모로 볼 때 배재학당 말고도 여러 학교(학당)들이 참가했으며, 조선가 · 독립가 · 진보가 말고도 다른 애국가들을 불렀다는 사실이다.

배재학당 외에 참가한 다른 학원들 중 하나가 안창호가 다니던 '밀러학당'이었고, 조선가 · 독립가 · 진보가 말고 또 불렀다는 '다른 애국가' 중 하나가 바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이 있는 '무궁화노래'였다.

확인해보자.

베를린에서 발견된 전단에 보면 '환호'라는 항목이 있고, 만만세와 천천세를 외친 후 마치 응원하듯이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들어있다. 모두들 환호 응원하는 일종의 단합대회 격인데, 여기서 '또 다른 애국가들'을 불렀다는 것으로 그 안에 '무궁화노래'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조선가 · 독립가 · 진보가처럼 공식 순서에는 못 들어갔지만, 이날 환호 속에서 모두 함께 부른 '무궁화노래'가 대단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킨지라, 다음해 1897년 조선 개국 505주년 기원절 행사에서는 명망가 윤치호의 가사까지 받아 공식 순서에 배치되는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혹자는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 말미에 환호 속에서 모두 함께 부른 애국가들 중에 '무궁화노래'가 있었음을 어떻게 확언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 답을 바로 다음 항에서 확인해 드리고자 한다.

3. '무궁화노래'에 관련한 윤형갑의 직접청취(直接聽取) 증언

아홉 번째 연재글에서 나는 애국가 작사자 규명의 결정적 증인으로 서울법대 55학번 윤정경 씨를 소개한 바 있다. 윤정경 씨는 자신의 저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 대한광복군총영 태동(胎動)편'과 그 증보판(增補版)에 작은할아버지 윤형갑이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애국가 관련 전언(傳言)들을 상세히 채록(採錄)하고 분석해 놓았다.(☞ 관련 기사 :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에 대한 검토)

윤정경 씨의 글은 처음 듣는 내용들이 많고 전개방식이 난삽(難澁)하기까지 해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박연철 변호사도 진정성이 이해되고 심증은 가지만 증거법상 입증을 해내기에는 쉽지 않음을 토로한 바 있다.

나는 윤정경 씨의 전언(傳言) 내용에 일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 안에는 결코 거짓으로 지어낼 수 없는 놀라운 내용들이 있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작사에 관련한 말씀 중 윤정경 씨가 전하는, 진정성이 담보되는 대목들을 발췌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됴선사람 됴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 후렴은 내(안창호)가 지었다. 밀러학당 밀러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키면서 병신년(1896) 독립문 정초식날 부를 노래를 짓자고 해서 지었는데, '무궁화노래'가 선택됐었어."

"일본군에 의해 강행되는 갑오경장과 단발령을 보면서 느꼈던 민본 의식과 항일의식, 민족 자존의 뜻을 담아 지었지. 이 땅에서 무궁하게 꽃처럼 피고지는 억조창생 '무궁화 됴선사람'을 왜놈으로 만들지 말고 '됴선사람 됴선으로 길이 보전하자고' 읊었다."

"1899년 6월 독립신문에 '무궁화노래'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노래의 본문은 '황실가'이고 후렴은 '무궁화노래'이다. 윤치호는 '무궁화노래'를 '무궁화歌'라고 하지 않고 '황실가'로 표기했지. 황실이라는 단어는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 나온 것이고, 대한국이 선포된 후에는 '조선사람 조선으로'가 '대한사람 대한으로'로 바뀌어 불렸다."

"무궁화는 꽃이름으로 쓴 게 아니고 조선 백성을 뜻하는 말인데, 무궁화라는 낱말이 노래 제목이 되고, 밀러 학당이나 작사자 이름도 없이 여기저기서 갖다쓰다가 배재학당에서도 부르는 것을 보고 내가 잘 지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흐뭇하더군."

위의 내용들은 모두 안창호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젊은 윤형갑에게 직접 들려준 얘기들이다. 윤형갑은 1920년대 중반과 1930년대 초반에 들었던 도산 선생과의 대화내용을 30년이 지난 1950년대 후반에 종손인 윤정경에게 구술하였고, 윤정경은 이를 채록하여 두었다가 다시 50여 년이 지난 2013년에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 대한광복군총영 태동(胎動)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어 세상에 공개하였다.

▲ 자료9. 윤정경 씨가 펴낸 저서 표지.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이 '직접청취 증언'은 '무궁화노래'의 창작자가 안창호 선생이었음을 확실하게 증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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