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傳聞)증거에 대한 검토
10.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
11.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2.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1. 김구 제(題) '한국애국가'는 도산 선생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이다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연재 6편에서 나는 '안창호 작사설'을 증빙하는 유력한 증거로 1945년 10월 김구 주석(主席)이 기록하여 남긴 '한국애국가' 악보집 주석(註釋)에 주목한 바 있다. 나는 이 김구 주석(主席)의 주석(註釋)이야말로 증거법상 전문증거(傳聞證據) 수준을 넘어 인적증거(人的證據)나 물적증거(物的證據)로 수용되어도 될 만한 중요한 증거자료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끌어냈던 몇 가지 생각들을 복기(復碁) 정리해보자.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중국에서 발간된 악보집 '한국애국가'에는 현행 애국가의 가사와 악보가 실려있고, 김구 주석(主席) 인물사진 밑에 '한국애국가의 고사(故事)'에 관한 주석(註釋)이 달려있다. 이에 관해서는 '흥사단'이 창립 100주년을 맞아 펴낸 '애국가와 안창호'(오동춘·안용환 共著, 2013)라는 책에 상세히 기술(記述)되어 있거니와, '안창호 작사설'의 대표 주창자인 오동춘 박사가 한문(漢文)으로 된 이 글을 이미 한글로 풀어놓은 바 있다.
다만 내가 달리 해석한 부분은 '일명(佚名)'이란 단어의 미묘한 개념 차이를 '알려지지 않았다'에서 '이름을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으려 한다'로 수정하여 보완한 것일 뿐이다. 일명(佚名)이 '이름을 숨긴다'는 뜻임에도 자칫 '이름을 잃어버렸다(失名)'는 뜻으로 와전(訛傳)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구 주석의 주석(註釋)에서 내가 얻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김구 선생이 애도(哀悼)한 '50년 전 애국지사'가 결코 윤치호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는 1945년 9월 3일 충칭(重慶)에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포고문을 발표한즉, 여기에는 임시정부 당면 정책 14개 조항이 열거되어 있는 바, 그 14조(條)의 내용이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노에 대하야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환국 후 어느 시점에 김구 주석의 지시로 숙청 대상 친일인물들의 명단이 작성되었는데, 당시에는 공개되지 못했던 것이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2001년에야 어떤 시사 월간지에 그 명단이 발굴·공개되었다. 이 명단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이었던 김승학 씨가 직접 육필(肉筆)로 써서 갖고 있던 것으로, '반민족특별재판소 재판관·검찰관'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 사료이며, '친일파 군상(群像)'이라는 중간제목 아래에 친일민족반역자들의 이름과 직책이 열거되어있는 바, 그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월간중앙>, 2001년 8월호 참조)
이 외에도 명단에는 언론계·문학계·연예계 인물 45명, 교육·종교계 인물 19명, 다액 국방금 헌납자 19명 등 263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여기서 일렬번호로 된 숫자는 대체로 각 분야에서 친일반역의 정도가 극심한 순서로 배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이름 오른쪽에 작대기로 표시된 숫자는 각 인물이 부역(附逆)한 친일단체의 숫자이거나 혹은 각 인물과 긴밀히 연결된 동조자들 숫자를 표시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윤치호에 대한 평가는 친일민족반역자 서열에 있어 최상위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명단에 들어간 각계 숙청대상 친일파 인물 263명 중 사망자로 기록된 이는 윤치호 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 경우는 모두 일제시대 부역(附逆)한 공직(公職)이나 단체 직위를 표기해 놓았는데, 윤치호 씨 단 한 사람만 '1945년 12월 사망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김구 주석 지시로 이 명단을 최초 작성할 시기에는 윤치호 씨가 살아있었으나, 이 명단을 작성하고 있던 중에 윤치호 씨가 사망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구 주석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하였고, 윤치호 씨는 그해 12월 9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숙청 대상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라는 김구 주석의 지시는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9일 사이에 내려졌을 가능성이 있고, 김승학 씨가 위의 친일파 군상(群像) 명단을 작성하여 김구 주석에게 보고한 시기는 윤치호 사후(死後),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어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구 주석에게 윤치호는 '사망했는데도 명단에 올라있을 만큼' 친일민족반역자 서열 상위권에 있던 숙청 대상이었던 것이다.
김구 주석이 기록한 '韓國愛國歌的故事'에 나오는 '한국애국지사'가 윤치호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광복은 되었으나 미·소 양군이 3.8선을 갈라 한반도를 분할하고 있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귀국하여 독립정부를 세우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라고 맹세(盟誓)하고 있던 김구 주석이 친일민족반역자의 대표 격인 윤치호를 아쉬워하는 마음에서 '한국애국가' 악보집을 펴내고 주석(註釋)을 달았다?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친일매국노 윤치호가 작사자였다면 진즉에 애국가를 바꿨을 일, 김구 주석이 윤치호를 '애국가를 작사한 한국애국지사'로 생각하고 아쉬워했을 가능성은 1%도 없다.
결론, 1945년 김구 제(題) '한국애국가'에 실려있는 '韓國愛國歌的故事'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이자 초대 국무총리 대행이었던 도산 안창호가 자신이 지어놓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의 '무궁화가2'가 국가(國歌)를 대신하게 되매 자신의 작(作)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을 서두르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主席) 김구가 만고의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를 사모(思慕)하며 <한국애국가>로 명명(命名)하여 헌정(獻呈)한 통한(痛恨)의 애도사(哀悼辭)였다.
2. 주요한이 기록한 김동원과 안태국의 전언(傳言)에 애국가 작사자 문제의 답이 있다
1) 안창호와 가까웠던 김동원과 안태국의 전언(傳言)
시인이자 언론인인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벌어졌던 1955년 4월, 경향신문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는데, 그 글 안에는 다음과 같은 색다른 전언(傳言)이 들어있었다.
주요한이 전한 이 내용은 이를테면 애국가 작사자 논쟁에 있어 '단독작사설'과는 다른 일종의 '안창호·윤치호 합의설'이다. 그런데 주요한은 1963년에 본격적으로 '안도산 전서(全書)'를 발간하면서, 안태국이라는 독립운동가로부터 나온 애국가 작사자에 관한 전언(傳言)을 그의 사위인 홍재형을 통해 다시 전해 들은 말로서 다음과 같이 수록해 놓았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은 도산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보시라"고 청하였다.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놓았던 것을 꺼내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 되었다고 찬성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도산은 다른 일에도 자기 공(功)을 세우지 않고 남에게 공(功)을 돌린 일이 많은 것처럼, 이때에도 윤 교장에게 공(功)을 돌린 것이라 하는 것이 안태국의 증언이었다고 한다."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에 관련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의 전언(傳言)을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서 들은 셈이다. 한 사람은 대성학교 교원으로 있던 김동원 씨이고, 또 한 사람은 도산이 가장 믿고 아끼던 독립운동가 안태국 씨의 사위 홍재형이다. 주요한이 두 사람의 지인(知人)으로부터 들은 이 증언은 전문증거(傳聞證據), 게다가 중첩된 전문증거라는 한계는 있지만, 전언(傳言)의 내용이 교차검증(cross checking)된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주요한이 두 사람으로부터 각기 따로 들은 이 전언의 공통된 핵심 내용은 세 가지이다.
그런데 주요한이 두 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 중 김동원 쪽에서는 나오지 않고 안태국(홍재형) 쪽에서만 나온 추가(追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생각에 주요한이 전해 들은 김동원과 안태국의 설(說)에 설혹 작은 착오(錯誤)는 있을 수 있더라도 큰 틀에 있어 거짓이 있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목격자(또는 전언자)가 거짓말을 꾸며내야 할 이유나 상황이 전혀 없고, 또 전언의 내용이 '없는 일을 꾸며냈다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2) 윤치호와 안창호 간에 있었던 합의와 묵계(默契)
그렇다면 두 목격자의 전언이 사실(事實)이라는 전제하에 그 이면(裏面)에 숨어있는 진실(眞實)을 한번 탐색해보자. 애국가 작사에 관련하여 윤치호와 안창호 두 사람 사이에 대체 어떤 이유와 사연이 있어 이러한 합의와 묵계(默契)가 생겨났을까 하는 점이다.
① 윤치호와 안창호는 당시 민족교육 계몽운동에 있어 매우 긴밀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나이와 경력, 사회적 지명도에 있어 당시 윤치호는 문명개화에 영향력 있는 선배어른 격이었고, 안창호는 민족운동 중심에 있는 청년후배군(群)의 대표 격이었다. 10여 년 전(1896년~97년경) 윤치호가 독립협회 요직을 거쳐 회장을 맡은 시기, 안창호는 열아홉 살 나이로 막 상경하여 독립협회의 신출내기로 참가하였다. 그러한 안창호가 10년 만에 무시 못 할 민족운동가로 성장하여 미국에서 막 귀국한 것이다.
② 윤치호와 안창호는 선후배 간이면서 상호 보완관계에 있는 협력자였다.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황실가(무궁화歌1)'의 본가사를 시대에 맞게 새로 고쳐 짓자고 제안한 것은 물론 '무궁화歌'가 당시 많은 애국가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애국가'로 널리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애초 '무궁화歌1'의 창작과 보급에 두 사람이 처음부터 공동으로 관여되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만일 '무궁화歌1'의 창작·생성 과정에 안창호가 아무 관련이 없었다면, 10년이 지난 후 명망가이자 대선배인 윤치호 작사의 노래 가사를 뜬금없이 감히 바꾸자고 요청할 필요도, 제안할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③ 좀 더 나아가서, 10년전(1896~97년경) '황실가(무궁화歌1)'라는 작품의 창작·생성 과정에 두 사람이 공동으로 관여된 모양새가 10년후 '애국가(무궁화歌2)'의 개작·형성 과정에 관여된 두 사람의 관계와 닮은꼴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예컨대 '무궁화노래'가 처음 생겨날 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하는 후렴 구절이 안창호에 의해 먼저 창출되었다면? 그리고 거기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하는 본가사가 윤치호에 의해 작사되었다면?
만약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얽혀있던 애국가 작사자 문제는 바로 풀린다.
④ 도산이 이처럼 자기가 지은 가사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한 배경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이 같은 합의와 묵계를 필요로 하고 또 용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청년 안창호는 한 나라의 '애국가'로 불리울 수도 있는 노래를 자기같은 한미(寒微)한 사람 이름으로 내게 되면 온 국민이 합심하여 부르기 어렵게 될 수 있음을 염려했고, 또 당시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과 활동을 되도록이면 감춰서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는 심려(深慮)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안창호가 자신이 미리 써둔 새 가사가 있었음에도 윤치호에게 새 가사를 지어줄 것을 청한 데서도 드러난다.
안창호가 윤치호라는 당대의 명망가를 앞세워 애국가 작사자로 발표한 것과 자신이 설립한 대성학원에 다시 윤치호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모신 것은 동일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3) 김동원과 안태국의 전언(傳言)에서 찾아낸 해답(解答)
그런데 이렇듯 김동원·안태국 두 목격자의 전언을 바탕으로 주요한이 진즉에 제시한 '안창호·윤치호 합의설'에 대해 그동안 애국가 작사자 연구가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두 목격자의 전언이 결국 전문증거(傳聞證據), 그것도 중첩된 전문증거일 뿐 직접적인 물적증거(物的證據)가 되지 못한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위조(僞造)된 물적증거에 의해서 송사(訟事)의 판결이 뒤집히는 사례를 수없이 보아왔으며, 합리성 있는 전문증거(傳聞證據)가 형식적인 법논리에 막혀 무시당한 사례 또한 적잖이 봐왔다. 내 생각에 주요한에 의해 전달된 김동원·안태국 두 목격자(또는 전언자)의 증언은 전문증거(傳聞證據)를 넘어서는 인적증거(人的證據)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본다.
덧붙여 이와 관련해서 '지엽적인 문제로 포괄적 타당성을 훼손하는 주장'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주요한이 기록한 '안태국 전언(傳言)'에 시기(時期)상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며 '안창호 작사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바,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이에 대해 해명해 두고자 한다.
나는 앞에서 주요한이 김동원과 안태국(사위 홍재형)으로부터 전해 들은 증언 중 공통된 핵심 내용 세 가지와 안태국 쪽에서만 나온 추가내용 다섯 가지를 열거해 놓았다. 여기서 지금 문제가 된 것은 단지 안태국의 추가내용 ①번항 '도산과 윤치호가 만나 새 가사를 논의한 곳이 평양 대성학교'라는 내용이다. 그 외의 모든 내용은 두 목격자(또는 전언자)가 거짓말을 꾸며내야 할 이유나 상황이 전혀 없고, 또 전언의 내용이 '없는 일을 꾸며냈다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 구체적'이다. 다만 안태국의 기억 중에서 '안창호와 윤치호가 만나 대화한 장소가 대성학교였다'는 기억만이 유일하게 착각 또는 혼동할 수 있는 부분으로, 실제 안태국은 그 부분에서 혼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착각 또는 혼동은 안태국이 대성학교 교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은 윤치호와 안창호 두 사람의 관계 설정에 있어 '무궁화歌 1, 2의 작사 문제'와 '대성학교 운영 직책 문제'를 분리해서 기억하였다. 그러나 대성학교와 무관한 안태국은 독립투쟁 현장에서 도산 안창호와 함께 지내며 직접 들은 이야기들, 이를테면 '무궁화歌 본가사 교체에 관한 안창호와 윤치호의 대화', '대성학교를 세운 안창호와 교장으로 모셔온 윤치호의 협력적 관계', '새 애국가를 대성학교에서부터 열심히 불러 전국으로 퍼져나간 사실' 등을 자신의 기억 속에 뭉뚱그려 저장해 놓고 있었고, 전언(傳言) 과정에서 그 기억소(記憶素)들이 분산 결합하면서 실제와는 약간 다른 착각이 일어났다고 본다.
추정컨대 안창호는 대성학교 설립 전 어디선가 윤치호를 만나 '무궁화歌'의 가사를 고쳐 바꾸는 것을 제안했을 터이며, 그 시기는 1907년 3월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한 후 1908년 6월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이 나오기까지의 어느 때였을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는 애국가 작사에 관련하여 주요한이 기록해놓은 '김동원과 안태국의 전언(傳言)'에서 일단 다음과 같은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첫째,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하는 '황실가'의 가사는 윤치호 씨 원작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의 가사는 도산 안창호의 작(作)이다.
둘째, '황실가'와 '애국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이어지는 동일한 후렴을 가진 '무궁화歌' 군(群)으로, 후렴은 그대로 두고 '황실가'의 본가사를 시대에 맞게 바꾸어 부름으로써 '애국가'가 탄생했다.
셋째, 도산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합의하였고, 대성학교 설립 후 새 애국가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건네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가사를 '언제' '어떤 계기에' 써두었던 것일까?
그렇지! 안창호가 애국가 새 가사를 써놓게 된 시기와 계기만 찾아낸다면, 애국가 작사자에 얽혀있는 수수께끼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2005년 5월 초, 안창호 선생이 1907년 3월경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가사를 발상(發想)하고 창작하여 건네준 장면을 목격한 전문(傳聞) 증언이 뜻밖의 인물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3. 윤정경이 채록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의 결정적 증거
1) 작은할머니 김정수(1894년생)의 목격 증언
200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88동문들이 입학 50주년을 기념하는 문집을 발간하였다. 88동문이라 함은 단기(檀紀) 4288년을 가리키는 말로, 서기(西紀)로는 1955년에 대학에 입학한 동문을 말한다. 기념문집의 제목은 '진리 찾아 50년, 진솔한 삶의 향기'로 되어있고, '삶과 꿈'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500쪽이 넘는 두터운 문집이다.
이 책 안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詩想과 도산 안창호'라는 글이 실려 있다. 글의 필자는 서울법대 55학번 윤정경 씨이다. 졸업 후 경찰 정보 관련 부서에서 수십 년 근무한 경력자라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애국가> 작사자의 수수께끼, 현행 <애국가> 탄생의 결정적 장면이 눈으로 보듯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퍼즐(puzzle)이 대번에 풀리는 느낌이랄까? 애국가 작사자에 얽힌 수수께끼의 결정적 단서가 그 글 안에 들어있었다.
윤정경 씨의 글 ''동해물과 백두산이' 詩想과 도산 안창호'는 안창호 선생이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후 3월 초 경칩(驚蟄) 무렵에 평안도 지방을 방문하였다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 시상(詩想)을 떠올렸던 당시 상황에 대한 목격담을 종손(從孫)이 직접 청취하여 채록한 일종의 목격 증언(目擊 證言)이다.
안창호 선생은 1907년 귀국하자마자 그 전해에 개통된 용산~신의주 간 철도의 침략성과 철로 연변에 미칠 위험을 탐구하려고 기차로 신의주까지 갔다가 귀로에 선천(宣川)에 들렀었다.
그리고 나서 50년이 지난 1957년 어느 여름날, 평안도 선천교회 권사였던 김정수 할머니(1894년생)와 그의 아들 윤성실(醫師), 그리고 서울법대 3년생이던 종손(從孫) 윤정경이 함께 저녁밥을 먹으며, 2년 전 1955년에 있었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얘기를 화제에 올렸다. 대화는 주로 김정수 할머니와 아들 윤성실 사이에 오고 간 것이며, 종손 윤정경은 이 대화를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50년이 다 된 2005년, 서울법대 입학 50주년 기념문집에 이 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만들어 공개한 것이다.
윤정경 씨는 이 글에서 김정수 할머니가 안창호 선생을 만나 애국가 노랫말 작사 과정을 목격한 일화(逸話)뿐 아니라 당시 평안도 지방의 독립운동 기운과 간도·만주 지역에 대한 국토회복 염원에 대하여 기술한 바, 이는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각의 희귀하면서도 생생한 기록이다. 분량이 좀 많지만 너무나 중요한 증언기록이므로, 그 중 '안창호 선생과 애국가 시상(詩想)'에 관한 부분을 옮겨 소개하되 뜻이 통하는 범위에서 약간 수정·축약하고자 한다.(두 사람의 대화를 애초에 윤정경 씨가 마치 희곡 대본처럼 기록해 놓았다.)
이 생생한 대화는 1957년에 있었던 일이다. 김정수 할머니와 아들 윤성실이 주로 나눈 대화에 종손(從孫)인 윤정경 씨가 함께 묻고 들으면서 촘촘히 기록해놓은 자료를 글로 복원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서 "이 전언(傳言)에 혹시 어떤 허위(虛僞)나 작위(作爲)가 들어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윤정경 씨의 집필 동기와 김정수 할머니의 대화 정황에 그 어떤 허위나 작위가 들어갈 필요도 여지도 없다고 판단되었다. 김정수 할머니의 회상과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고 분명하며, 윤정경 씨의 기록과 관점 역시 대단히 상세하며 일관되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1907년 전후(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이 발행되기 전)에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건네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가사가 '언제' '어떤 계기로' 준비된 것인지 궁금함을 표한 바 있다. 그런데 좀처럼 풀리지 않던 퍼즐(puzzle)이 대번에 풀리는 느낌? 애국가 작사자에 숨어있던 수수께끼의 결정적 단서가 홀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단언컨대 윤정경 씨의 집필 동기에는 어떤 허위도 있을 수 없으며, 기록 내용에 있어서도 작위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다.
이를테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흥사단'은 2013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을 시작한 바, 윤정경 씨는 이 글을 쓴 2005년에 흥사단과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떤 정실(情實)이나 '편들기'가 전혀 개입될 수 없는 정황에서 오직 자신이 간직해온 필생(畢生)의 숙제(宿題)를 풀고자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집필에 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윤정경 씨가 대학에 입학하던 바로 그해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혼돈 속에 작사자를 규명하지 못한 채 '작사자 미상(未詳)'으로 발표하면서, 빈말이라도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조사를 재개하겠다"고 공언한지 50년 만에 드디어 그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이다.
묻는다. 애국가 작사자임을 증명하려면 꼭 물적증거(物的證據)가 있어야만 하는가? 인적증거(人的證據)든 전문증거(傳聞證據)든 김정수 할머니의 이 생생한 증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조작된 물적증거(物的證據)는 버젓이 활개 치고, 이 뼈저린 목격 증언(目擊 證言)은 묵살당한다면, 대체 실증사관(實證史觀)이니 채증법(採證法)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를 해체하면서 공언했던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면 언제든 조사를 재개하겠다"고 한 약속이 2005년도에 바로 이행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르고 지나쳤다면, 지금이라도 즉각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위한 재조사가 실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작은할아버지 윤형갑(1904년생)의 '직접 청취 증언'
윤정경 씨는 김정수 할머니의 목격 증언과 궤를 같이하는 또 하나의 증언을 채록해 두었으니, 바로 독립운동가였던 작은할아버지 윤형갑(1904년생) 님이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은 '직접 청취 증언(直接 聽取 證言)'이다.
윤정경 씨에게는 할아버지가 네 분 있는데, 친할아버지 윤형관 님이 첫째이고, 김정수 할머니는 둘째 할아버지의 부인(夫人)이고, 윤형갑 님은 넷째 할아버지다. 윤형갑은 큰형 윤형관의 배려로 상해에 가서 안창호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던 바, 안창호 선생께 직접 애국가에 얽힌 사연을 비롯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한 윤형갑이 도산과의 대화 내용을 30년이 지난 1950년대 후반에 종손인 윤정경에게 구술한 바, 윤정경은 이를 채록하여 두었다가 다시 50여 년이 지난 2013년에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 대한광복군총영 태동(胎動)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윤정경 씨의 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로 박연철 변호사가 있다. 박 변호사는 흥사단에서 주최한 애국가 작사자 규명 심포지엄에 우연히 토론자로 참석했다가 윤정경 씨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법조인인 만큼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법률적으로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여러 각도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변 회지에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관한 증거법적 접근에 관하여'라는 독특한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는데(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106호, 2015), 내가 보기에는 마치 민사소송을 맡은 재판관이 '안창호 작사설' 측과 '윤치호 작사설' 측의 사실심리부터 양측의 변론과 진술, 증언 및 증거를 취합하여 판결을 내리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연철 변호사가 가장 관심 갖고 있는 증인이 윤정경 씨였다. 박 변호사는 윤정경 씨가 펴낸 책에 담긴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에 관련한 증언(분석과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는 얘기를 나에게 들려줬다. 여기 박연철 변호사가 윤정경 씨의 증언에 대해 갖고 있는 법률가로서의 기본적인 관점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윤정경 씨의 책에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이런 파격적인 얘기를 할까,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궁금할 것이다.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어차피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거니와, 이 책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내용들을 사실적(事實的) 또는 개념적(槪念的)으로 일별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윤형갑 증인의 안창호 선생님 말씀 청취 및 증언' 부분을 보면, 윤형갑이 안창호 선생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시기는 두 차례였다. 첫 번째는 민국 4년(1922년) 안창호 선생을 찾아 중국 상해에 도착한 때부터 민국6년 안창호 선생이 상해를 떠날 때까지의 기간이고, 두 번째는 민국 8년(1926년) 안창호 선생이 상해에 다시 오셨다가 민국 14년(1932년) 윤봉길 의거(義擧)의 배후로 몰려 일본군 육전대에 불법납치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두 차례의 시기에 윤형갑이 애국가와 관련하여 도산 안창호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두 사람의 대화도 윤정경 씨가 애초 희곡 대사처럼 적어놓았다. 본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평안도 사투리는 표준말로 바꾸고, 대화의 순서를 조정하고 축약하여 소개한다.)
안창호 선생과의 대화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내용은 애국가 작사에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는 정미년(1907년)에 선천교회 윤형관 집사가 지필묵(紙筆墨)을 짊어지고 안창호 선생을 따라 평양까지 와서, 한지(韓紙)에 정서(精書)한 애국가 새 노랫말을 갖고 선천으로 돌아갔다는 사실. 이는 김정수 할머니의 목격 증언과 교차검증(cross check)되는 유력한 직접 청취 증언이다.
또 하나, 안창호 선생이 그 직후 평양에서 서울로 가서 균명학교 강연을 할제 새로 지은 애국가를 되풀이 가르치고 매일아침 이 애국가를 창(唱)하자는 강연을 했다는 직접 청취 증언! 이 증언은 바로 그 무렵 보도된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자 기사에 의해 그 사실이 교차검증(cross check)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해당기사 내용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기사는 논리 전개로 볼 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뉜다. 첫 단락은 '서서(西署) 만리현 ~ 권면한 내개(內開)'까지, 두 번째 단락은 '미국 각종 학교 ~ 지금부터 시행하자'까지, 세 번째 단락은 '그 학교에서 ~ 거행한다더라'까지다.
첫 단락의 내용 중 유의해야 할 단어가 '대(對)하야'이다. 이 단어는 안창호 씨가 학생들을 만나 마주 대하였다는 뜻으로, 도산이 의무균명학교를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다음 유의해야 할 단어가 '권면(勸勉)'이다.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했다는 뜻이다. 애써 가르쳐주었다는 뜻도 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두 번째 단락은 안창호 선생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권한 실제 '내용'이다. 미국의 국기예배와 애국가 봉창을 예로 들면서 이들 개명한 나라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 학교도 지금부터 시행하자는 내용이다.
세 번째 단락은 균명학교가 지난 월요일부터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를 거행(擧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사다.
<대한매일신보>의 이 기사는 윤정경 씨의 작은할아버지 윤형갑 님이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들은 내용과 아퀴가 딱 들어맞는다. 1907년 3월 경칩 무렵 선천 예배당에서 있었던 일화(逸話)에서부터, 윤형관 집사가 지필묵을 싸 들고 평양까지 안창호 선생님을 따라가 새 애국가 가사를 받아온 사실까지 시기적으로도 아퀴가 딱 들어맞는다.
이만한 전문증거(傳聞證據) 또는 인적증거(人的證據)를 단지 물적증거(物的證據)가 없다고 해서 무시하려 드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그 당시 지고 갔던 지필묵(紙筆墨)이라도 나와야 물증으로 인정받는단 말인가?
나는 오늘 김정수 할머니의 목격 증언과 윤형갑 할아버지의 직접 청취 증언을 교차검증함으로써 윤정경씨의 주장에 충분한 신뢰도가 있음을 파악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에 못지않게 윤형갑의 질문에 답하는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에 대한 방침(方針)과 해석(解釋)에서 어떤 놀라움을 느꼈다. 애국가는 혼자 지은 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양한 생각으로 다양한 가사가 만들어져 부침(浮沈) 속에서 떠올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애국가의 파급이 '민요'처럼 이루어져야 한다고 인식한 것이 대단히 놀랍다.
안창호 선생이 우리 애국가의 미적 본질을 '민요적인 특성'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대한제국 말년의 수많은 애국가類 중에서 왜 '무궁화歌'가 민중 속에서 떠올랐으며, 또 왜 그중에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민족독립의 파도 위에 높이 솟아올랐는지를 증빙하는 탁견(卓見)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탁견은 윤형갑 님이나 윤정경 씨가 만들어서 지어낼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오직 애국가 노랫말의 작사자로서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 주권재민 독립과 혁명만을 위해 정진(精進)한 안창호 선생이 아니고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탁월한 경지인 것이다. 이만하면 이제 애국가의 진짜 작사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드러났다고 본다.
허나 이게 끝이 아니다. 다음 편에는 애국가 작사자 규명의 숨겨진 열쇠, '무궁화노래'의 생성과정을 밝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국가 작사자의 단서(端緖)는 애국가 노랫말 그 자체에 들어있다. 애국가 노랫말 시상(詩想)이야말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의 마지막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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