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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에서 만나는 월하 김달진의 생애와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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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에서 만나는 월하 김달진의 생애와 문학세계

[발길 따라] 복원된 생가와 김달진문학관, 예술의거리…20대 월하가 걸어올 듯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자 교사로 일생을 산 월하 김달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봄이면 벚꽃이 하늘이 되고, 꽃비로 내리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07년 진해구 웅동 소사리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서정주와 김동리, 오장환 등 생명파 시인들과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친 문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고향마을에 복원된 생가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김달진문학관’은 그의 문학세계를 만날 수 있고, 군항의 도시 진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이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김달진문학관 앞 동상과 복원된 생가. ⓒ프레시안(김병찬)

한국문단의 ‘빨간 피 한 방울’

‘하이얗게 쌓인 눈 우에 / 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 속속드리 스미어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 - 김달진 시 <눈>

김달진은 항일 민족 기독교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보’를 다니다 신병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요양을 했다.

192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가 ‘경신중학’을 다녔지만 4학년 때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운동을 벌이다 퇴학을 당해 다시 낙향한 뒤 1926년부터 모교인 ‘계광보통학교’에서 7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달진이 등단한 것은 이때이다. 1929년 순수 문예지 ‘문예공론’지에 무애 양동주의 추천으로 시 <잡영수곡>이 실리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모교이자 교사생활을 이어가던 계광보통학교가 민족 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자 민족 현실의 절망과 좌절에 빠졌던 그는 1934년 입산해 불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 때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해 학승의 길도 걸었다.

그의 문단활동이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은 서정주와 김동리, 오장환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이 되면서부터였다. 1940년 9월에는 시집 <청시淸枾>를 냈고, 만주시절에는 용정에 머물면서 소설가 안수길이 발간하고 있던 잡지 ‘싹’에 시를 게재해 ‘재만조선인시집’에 <향수>가 실리기도 했다.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찾아온 뒤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당시 동아일보 주간이던 설의식을 알게 돼 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고,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와 문학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때를 좋아 인심을 어지럽히는 세상에서 자신의 활기찬 순수를 보호하는 길은 수도생활과 같은 교사 시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울생활을 청산한 뒤 대구로 내려갔다.

경북여자중학교에서 다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죽순’ 동인으로 참여해 여러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진해로 돌아온 것은 1948년이었다. 당시 6년제 학교였던 진해중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 자유민보 논설위원과 해군사관학교 출강도 했고, 현재 창원남중학교인 남면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1962년 퇴직 때까지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퇴임 후 고려대장경 번역 사업에 참여하면서 문단의 은자로 잊혔던 그는 1967년 ‘신문학 60년 기념 100인시선’에 <임의 모습>이 게재됐고, 1973년 ‘불교사상’에 수상집 <산거일기>가 연재됐으며, 이듬해엔 불전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장편서사시로 불리는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를 내는 정도로 침묵했다.

이후 1979년 동인지 ‘죽순’ 복간호가 발간되면서 <벌레> <속삭임> <낙엽> <포만> 등을 발표했다.

김달진이 한국 문단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3년이다. 그의 시 선집 <올빼미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았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쓴 작품과 1950년 봄에 시집 발간을 위해 편집해둔 것을 합본한 것인데 반향이 컸다.

김달진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89년 6월 7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살이의 한 갈피를 접었다.

▲김달진문학관 입구. ⓒ프레시안
▲김달진문학관 내부 모습. ⓒ프레시안
▲복원된 김달진 생가. 문학관 옆에 있다. ⓒ프레시안

한국문학관협회 선정 최우수 문학관

김달진문학관은 한학자이자 승려이며 시인이자 교사로서 종교와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05년 10월 개관했다.

한국문학관협회가 지난 2016년 ‘올해의 최우수 문학관’으로 선정하기도 했던 김달진문학관은 지하 전시관과 1층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고, 인근에 생가가 복원돼 있다.

겉보기엔 여느 시골 학교 같은 느낌이지만, 문학관 내부에 들어서면 김달진의 실물 사진과 유품, 연구 문헌 등이 전시돼 있어 그의 생애와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문학관은 김달진문학제를 해마다 개최해오고 있기도 하다. 지난 1996년 10월 제1회 대회를 시작해 세계문학 특강과 시 낭송, 도서 전시회, 문학 심포지엄, 전국 백일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학적 자극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생가는 넓은 마당과 텃밭, 화단 등이 조성돼 있어 오래된 사진 속 옛 시골집 분위기에서 따스함과 정감이 넘친다. 문학관 주변에는 20대의 젊은 김달진이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온 것만 같은 1930년대 풍의 예술의 거리가 조성돼 있어 문학을 얘깃거리로 가족나들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김달진문학관은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명절을 제외하고 개관하며, 관람요금은 무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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