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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수능란한 그루밍 범죄자들, 아동 청소년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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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수능란한 그루밍 범죄자들, 아동 청소년을 노린다

[인터뷰] 이현숙 사단법인 청소년과 함께 꿈꾸는 탁틴내일 대표

조주빈 일당이 활용한 범죄 방법인 텔레그램 성착취는 온라인 그루밍의 전형이었다. 사진을 얻기까지 피해자를 속이며 피해자와 신뢰관계를 형성했다. 금품 등을 미끼로 피해자를 유혹해 사진과 개인정보를 확보한 다음 "유포하겠다"는 협박으로 요구사항의 수위를 높여갔다. 주위에 알려지는 게 두려운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요구사항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졌다. 바로 '온라인 그루밍'이다.

지난해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에 미성년자 온라인 그루밍을 형사범죄로 규정하라고 권고한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텔레그램 n번방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온라인 그루밍 개념조차 생소했다. 관련법은 계류되다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온라인 성착취는 온라인 그루밍과 한 덩어리"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21일 <프레시안>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그루밍을 동반한다"며 "온라인 그루밍부터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온라인 그루밍 가해자는 게임 아이템을 선물하거나 고민을 들어주는 등의 방법으로 피해자와 친밀감을 형성해 정서적으로 의지하게 만든 뒤, 성적인 대화나 성적인 사진 등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를 빌미로 '부모님에게 알리겠다', '주변에 소문을 내겠다'는 식으로 압박해 요구 수위를 높여간다.

오프라인에서 이뤄지는 그루밍과 온라인 그루밍의 차이점이 있다. 실제 대면이 필요한 오프라인 공간의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온라인 그루밍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의 특징으로 인해 가해자를 특정하고 수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조주빈이 공범으로 지목한 '부따' 강훈이 17일 검찰에 소환되며 얼굴이 공개됐다. ⓒ연합뉴스

사회적 경험·판단력 부족한 아동·청소년이 주요 표적

이 대표는 온라인 그루밍 가해자를 "능수능란한 사기꾼"에 비유했다. "절대 사기 당하지 않을 것 같은 똑똑한 사람도 능수능란한 사기꾼한테 걸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온라인 그루밍에 대한 이 대표의 설명이다. 온라인 그루밍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피해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능수능란한 그루밍 가해자'들은 아동·청소년이 '아동·청소년이기 때문에 가지는 취약성'을 노린다. 아동·청소년은 성착취 과정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몸 사진 찍어 보내주면 문화상품권을 주겠다'는 요구에도 넘어가는 이유다.

가해자가 '어른'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이 대표는 "내가 당하는 게 뭔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동·청소년은 어른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며 "그 어른이 피해자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학대를 당하거나 소외·고립된 아이라면 그루밍에 더욱 취약해진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경험해본 적 없는 아이일수록 조금만 칭찬해주거나 재밌게 해주면 그 사람에게 넘어가기 쉽다.

이 대표는 "피해자들은 '내가 스스로 사진을 보냈다'는 사실, 혹은 '그 사람과 특별한 사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면서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루밍을 당하는 피해자는 자신이 그루밍을 당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좋은 어른이 나를 예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연인관계'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 관계가 그루밍인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구분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대표는 "핵심은 '보호자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며 "외국의 경우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따로 연락을 취하거나 만나면 그루밍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텔레그램상에서 대규모 성착취가 자행된 '박사방'을 운영한 '박사' 조주빈이 지난달 검찰에 소환되며 얼굴이 공개됐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법)에 근거해 신상공개가 이뤄진 첫 사례다. ⓒ연합뉴스

오래된 성착취 방식...법적 제재 절실

'온라인 그루밍'이 널리 알려진건 최근의 일이지만 전문가들이 온라인 그루밍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지적한 지는 오래됐다. 이 대표는 "온라인 그루밍을 처음 고민한 건 2008년 정도"라고 말했다. 채팅 사이트에서 친밀함을 쌓은 뒤 유인하는 성착취 사례가 다수 보고되면서다.

이 대표는 "n번방과 유사하게 성착취를 당하는 10대 피해자들이 많았다"며 "텔레그램 성착취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가담하지는 않더라도 아이들을 노예로 삼거나 이들을 알선해 돈벌이에 이용하는 일들은 예전에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법적 제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단 '성매수 유인행위'라는 개념으로 아동·청소년성보호에관한법률(아청법)에 관련 조항이 있다. 아청법 제13조 2항에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사기 위하여 유인하거나 성을 팔도록 권유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온라인 그루밍 행위 자체로는 처벌하기 쉽지 않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관련 법 조항과 함께 함정수사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대표는 "경찰이 가상의 아동·청소년으로 위장해 수사하는 게 범죄 예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영미권 국가들과 유럽연합(EU) 등 많은 국가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해외 국가들은 온라인 그루밍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영국은 '성적 친밀감 형성을 위한 일련의 모든 행위를 수반하는 아동과의 만남'을 중범죄로 규정한다. 성적인 행위가 일어나기 전 단계에서도 범죄자로 간주하는 셈이다.

호주도 온라인상 이루어지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를 위한 유인과 권유, 그리고 그루밍 행위를 처벌한다. 미국의 경우 그루밍에 관한 별도의 법은 없으나 연방법 내에서 온라인 그루밍을 성착취와 관련해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미국 연방법은 만 18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을 성착취 목적이나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유인 혹은 권유의 모든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다.

이 대표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우리 사회의 성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조주빈이나 몇몇 개인의 일탈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이런 문제들이 왜 생기고 있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지금까지 여성을 상품화하고 성적 대상으로 삼고 거래하는 것을 '있을 수 있는 일'로 취급해왔던 문화가 오늘날 n번방과 조주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사회의 성문화·성산업은 어떤지, 수요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 어떻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방지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시민단체로 구성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달 기자회견을 열고 박사방 가담자 전원의 처벌을 촉구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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