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傳聞)증거에 대한 검토
10.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
11.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2.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1. 박은용 필(筆) '애국가攷'의 쟁점(爭點) 복기(復棋)
지난주 연재 글에서 1948년 10월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던 박은용의 글 '애국가攷'를 개략적으로 소개한 바, 이는 작가 이광수가 전년(前年)에 집필한 '도산 안창호' 전기(傳記)에서 '애국가는 원래 도산의 작'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데 대한 반론으로서 '윤치호 작사설'을 본격 주장한 최초의 칼럼임을 언급하였다. 논의의 심화(深化)를 위해 주요 쟁점을 복기(復棋)해보면 이렇다.
박은용은 대통령 이승만과 시인 서정주의 말을 빌려와 '애국가는 독립협회 시절(즉 1896~1899년 전후) 윤치호가 작사한 것이다'라는 전제하에 논의를 전개했다. 나는 이 전제가 근본부터 오류임을 지적한 바, 왜냐하면 독립협회 시절이란 황실가(무궁화가1)가 나온 시기이고 현행 애국가가 탄생한 시기는 1907년경이라는 것이 확고한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은용이 "도산은 1878년생이니 이 가사가 제작된 독립협회 발족 시엔 불과 17~8세의 소년이었는데 애국가를 작사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추정한 것 또한 명백한 오류였다. 현행 애국가가 탄생한 1907년경에 도산은 29세~30세였다.
그보다도 나는 박은용이 윤치호 아들 집에 전해왔다는 '1907년 윤치호作'이라 서명(署名)된 애국가사(愛國歌詞) 필적을 두고 "1907년作이라고 쓰여있으나 내 생각으로 그것은 작사(作詞)한 연대가 아니라 필서(筆書)한 연대일 것"이라고 추정한(확언한) 대목이 도리어 의문의 단서가 된다는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대해 다시 좀 되돌아가서 점검해보자.
박은용이 이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윤치호 아들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것인지, 아니면 동아일보로부터 간접 제공받은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직접이든 간접이든 '애국가 가사지'를 제공받으며 칼럼 집필을 청탁받았을 터인데, 여기서는 이 가사지 자료를 입수한 동아일보가 박은용에게 원고 청탁을 한 것으로 가정하고 그 담당자와 박은용의 대화 내용을 추정(推定) 복기(復棋)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 직업이 한때 연극 연출가였으므로 당시의 장면을 희곡으로 한번 구성해 본 것인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좀 되었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박은용이 이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윤치호 아들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것인지, <동아일보>로부터 간접 제공받은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허나 그 과정이 어느 쪽이었든 앞의 대화에 들어있는 내용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요체(要諦)이다. 내가 이 장면을 굳이 복기(復棋)까지 하면서 재현한 이유는, 윤치호 씨 아들은 1948년 이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동아일보> 또는 박은용에게 제공할 때 "작사한 해가 1907년으로 적혀있지만, 이 가사를 필서한 해는 1907년이 아닌 다른 해였다(예를 들어 1919년이라든가 1945년이라든가)"라는 말을 결코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은용이라는 필자가 <동아일보>라는 공식 매체에 칼럼을 쓰면서 '1907년作'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는데도 "1907년이란 햇수는 작사한 연대가 아니고 필서한 연대일 것"이라는 '대단히 자의적인 판단'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자, 내가 '박은용의 자의적인 판단'이라고 지적한 단서(端緖)로부터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 보자. 윤치호 씨 아들은 1948년 <동아일보>와 박은용을 통해 이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공개할 때 "애국가 가사는 1907년에 아버지 윤치호가 작사했으며, 그해 아버지가 친히 붓글씨로 써놓은 가사지를 가보(家寶)로 40년 넘게 보관해왔다"는 뜻을 은연중(隱然中)에 전파하려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박은용의 동아일보 칼럼은 일단 '가사지의 붓글씨가 윤치호 친필이라는 것'과 '그 가사지를 필서한 연대가 1907년이라는 것'이 두 가지를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이 증거 유품은 1955년 애국가 작사자 논쟁이 본격적으로 발단한 초기에 다시 등장한다.
2. <애국가> 작사자 논쟁의 본격적 발단(1955년)과 '4者위원회'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논쟁으로 번진 것은 1955년의 일이었다. 1955년 4월 초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문교부에 '한국애국가'의 작사자와 작곡자가 누구인지 물어왔다. '세계대백과사전'에 한국 애국가의 연혁(沿革)을 수록하기 위한 것이라 하므로 문교부 당국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에 바탕해서 '작사자는 안창호, 작곡자는 안익태'로 통보하기로 하고 이 자랑스러운 경사를 언론사에 알렸다.
다음날 도하(都下) 각 신문에 "우리나라 <애국가>가 미 백과사전에 삽입된다"는 기사가 보도된 후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문제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문교부 또는 언론지상에 문제 제기를 한 민원인(民願人)은 세 곳을 꼽을 수 있는 바, 민원이 제기된 순서대로 하나씩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김인식(당시 생존)과 그 아들 – 김인식 작사설
② 최병헌의 후손들 – 최병헌·윤치호 합작설
③ 윤치호의 아들들과 딸, 사위 – 윤치호 단독 작사설
김인식은 우리나라 음악사에 있어 '양악 도입기(導入期)의 선구자'로 불리는 음악인으로, 찬송가의 번역과 작사·작곡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현행 애국가가 생겨난 1907년 전후로 진명·경신·배제·보성 등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한 바, 당시 성행한 애국가류의 가사에 서양 찬송가나 민요의 곡(曲)을 입히는 음악(작곡) 분야의 역할을 담당했을 개연성이 높다. 김인식은 1955년 당시 생존해 있었는데, 자기가 작사자라는 주장만 했을 뿐 정작 본인은 조사위원회의 출석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증거 자료도 제출하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다.
김인식의 경우 그가 1910년경 작사하여 보급한 애국가가 따로 있음이 훗날 밝혀지긴 했으나, 그 가사 내용이 현행 애국가 가사가 아닌 '무궁화가' 가사와 똑같은 가사였으므로(1절만 다름) 지금은 논외로 밀려나 있다.
최병헌은 농공상부 주사 출신으로 종교사상과 정치개혁에 관심 갖고 문필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아 아펜젤러 사후 정동교회에서 시무(始務)한 목회자이다. 그는 젊은 시절(1896년) 독립신문에 '독립가'를 발표한 인물로 전해오며, 정동교회 목사 시절에는 윤치호와 형제처럼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최병헌의 가족들이 주장한 내용은 '최병헌·윤치호 합작설'로, 그 내용인즉슨 "4절 가사는 최병헌이 지은 '불변가'에서 왔으며 후렴은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 후렴을 가져와 합쳐졌다"는 취지이다.
'최병헌·윤치호 합작설'은 애국가 작사자 논쟁이 시작되자 뜬금없이 등장하여 '안창호 작사설'을 반박(反駁)하는 가설(假說)로 잠깐 활용됐다가 '윤치호 단독 작사설'에 자리를 내준 '근거가 모호한' 설(說)이다.
윤치호가 누구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인터넷 들어가면 바로 그의 행적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1955년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불거지자 윤치호의 아들 윤영선과 윤기선은 "우리 아버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고 주장하면서, '1907년 윤치호作'이라고 서명(署名)되어있는 소위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문교부와 언론 등에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1948년 <동아일보>에 박은용의 칼럼과 함께 사진으로 복사되어 공개된 적 있는 바로 그 붓글씨 가사지이다.
작사자 논란이 일어나자 문교부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史學科), 인문학 및 국학의 선구자 최남선, 서지학(書誌學)의 권위자 황의돈 씨 등으로 4者위원회를 구성,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다.
당대 최고의 권위자들이 모여 논의한 바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의견이 확연히 갈렸다. 최남선과 황의돈은 일관되게 '안창호 작사설'을 지지하였고, 국사편찬위원회와 역사학계의 태두(泰斗) 이병도는 처음에는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애국가 가사지' 물증(物證)을 앞세워 '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며 '안창호 작사설'에 대립하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안은, 당시 조사 과정에서 최남선은 윤치호 가족이 제출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의 필체가 윤치호 본인 것이 아니라고 호통을 쳤다고 하며, 황의돈은 가사지에 침을 발라 문질러보기까지 하면서 "이 글씨는 쓴 지 10년도 안 되는 것으로 1907년작이 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조사 과정에서 친필(親筆) 논란과 필서(筆書) 연대(年代) 논란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도하(都下) 각 신문들(<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연합뉴스>, <중앙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붓글씨 가사지의 진위(眞僞) 문제를 비롯해서 새로운 증거나 주장이 나올 때마다 앞다투어 그 내용을 전달하며 관심을 보였다.
3. 언론인 주요한의 문제 제기와 윤치왕(윤치호의 동생)의 반론
그러던 중 4월 19일, <경향신문>에 시인 주요한의 기고(寄稿)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주요한은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상해 임시정부 초기 이광수가 주필로 있던 <'독립'신문>의 기자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그 역시 일제 말기 친일에 몸담아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인물이다. 그러한 주요한이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벌어지자 자신이 '목격한 바'와 '들어 알고있는 바'를 정리하여 원고를 썼는데, 이 칼럼은 애국가 작사자 논쟁에 있어 지금까지도 인용되고 있는 유력한 증언 자료의 하나이다.
주요한이 쓴 칼럼의 전반부는 일종의 서론(序論)격으로, 그 요지(要旨)는 "필자 자신도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 선생인지 아닌지 확답하기 어렵다"는 솔직하면서도 애매한 진술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론에서 주요한은 대단히 중요한 '새로운' 관점을 피력하는 바, 안창호와 윤치호 두 사람의 독특한 관계에서 착안한 일종의 '안창호·윤치호 합의설'이다. 이 대목을 주요한의 기고(寄稿)에서 그대로 가져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주요한이 진술한 내용 중 대성학교 교원 출신 김동원 씨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안창호·윤치호 합의설'은 대단히 새로운 관점이다. 주요한의 이 진술은 1955년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애국가 작사자 규명 논의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문증거(傳聞證據) 중 하나로 간주(看做)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상론하기로 한다.
주요한은 이어 본격적 문제 제기로서 윤치호 씨 서명(署名)이 있는 '애국가 가사본'에 대해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바, 하나는 철자법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가사(歌詞)의 변경에 관한 것이다.
주요한이 발견한 철자법에 관한 의문을 설명하면 이런 내용이다. 우리글의 철자법에서 아래아字 「·」 모음이 철폐되고 「사·샤」 등의 구별을 없이하게 된 것은 기미(1919)년 이후에야 보급된 사실인데, 윤치호 씨 가사지가 1907년에 기사(記寫)한 사본이라면 대체로 「하ᄂᆞ님」 또는 「보우ᄒᆞ샤」 「보전ᄒᆞ셰」 등으로 씌었어야 함에도, 제출된 가사본에는 '하나님, 하사, 하세'로 되어 있으니 이상스럽다는 문제제기이다. 그러면서 주요한은 "다만 윤치호 씨가 '문자 간소화론자'였던만큼 「아래ᄋᆞ」 모음이라든가 「샤·셔」 등을 폐기하는 것을 그 당시부터 실천했을 수 있다"고 부연하여 퇴로(退路)를 열어주는 조심성을 발휘하였다.
가사 변경에 관련한 문제 제기는 제4절의 '충성을 다하야'라는 구절에 관한 것이다. 원래 이 구절은 '님군을 섬기며' 로 되어있던 것이 기미년(1919) 이후 상해에서 '충성을 다하여'라고 고쳐 불려지게 된 과정을 주요한 자신이 직접 목격하여 알고 있는 바, 기미년보다 12년 전인 1907년에 윤치호가 '충성을 다하여'라고 필서했다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문제 제기이다. 그러면서 주요한은 "윤 씨 자신이 군주제도보다 민주제도를 내심 신봉하였기 때문에 합방 이전에 벌써 '님군을 섬기며'를 불만히 여기고 '충성을 다하여'라고 개작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부연하여 퇴로를 열어주는 배려를 잃지 않았다.
이처럼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한 주요한은 칼럼 맨 말미에 "문제의 윤치호 씨 서명이 있는 사본만을 가지고 윤 씨 작사의 확증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주요한의 이 발언은 이 칼럼의 핵심이자 결론이다. 유력한 언론인인 주요한이 "윤치호 씨 서명이 있는 애국가 가사지를 윤씨가 1907년에 친히 필서했다고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주요한의 칼럼이 발표되자 윤치호 유족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며칠 뒤인 4월 24일, 같은 경향신문에 반론이 제기된 바, 이 칼럼을 쓴 사람은 좌옹 윤치호의 동생으로 의학박사였던 윤치왕 씨였다. 윤치왕 씨가 반론에서 제시한 주요 논거(論據)는 1907년에 발간된 한영서원 '팜풀렛'이었다. 그 '팜풀렛' 관련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보면 이렇다.
윤치왕이 언급한 '팜풀렛'이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집(讚美歌集)'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여기에는 점검이 필요하다. 윤치왕은 이 '팜풀렛'이 나온 시기가 융희원년 즉 서기 1907년이라고 기억하였다. 그런데 현재 전해오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집은 1908년에 발간된 재판본(再版本)만 존재하며, 초판본은 망실(亡失)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찬미가 초판본이 언제 발간되었는지, 그 내용이 재판본과 같은지 다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영서원 개원(開院)이 1906년 10월이므로 만약 이를 계기로 교육용 찬미가집 초판이 나왔다면 그 시기를 1906년~1907년경으로 추정해볼 수는 있겠다.
내 생각으로 윤치왕이 언급한 '팜풀렛'이 1908년 발간된 찬미가집 재판본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찬미가 재판본 표지에는 분명히 '찬미가'라는 책 제목(보통명사이자 고유명사로서의 제목)이 표기되어 있는바 이것을 그냥 '팜풀렛'으로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윤치왕이 말한 '팜풀렛'이 찬미가 초판본과는 다른 어떤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찬미가 초판본이 '팜풀렛' 수준의 간소한 형태였는지는 실물이 확인되기 전에는 단언할 수 없다.
어떻든 윤치왕 씨의 글 안에서 나는 또 다른 단서(端緖)를 발견하였다. 윤치왕은 칼럼에서 '붓글씨 가사지'의 철자법에 관해 딱 부러지게 설명한 바, 그 내용은 이러하다.
바로 이 점이다. 윤치왕 씨는 주요한이 "왜 1907년에 아래ᄋᆞ자를 쓰지 않았느냐?"고 추궁한 것에 대해 "당신 지적이 맞다. 좌옹 선생은 국문 간소화론자여서 그 당시부터 아래ᄋᆞ자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 윤치왕씨는 분명히 '붓글씨 가사지'가 1907년에 필서된 것임을 전제하고 이러한 해명을 했다는 사실이다.
윤치왕 씨는 그리고 나서 칼럼 말미에 '애국가 가사본'이 윤치호 친필임을 적극 피력하고 있는 바, 그 대목을 또 그대로 인용해 보면 이렇다.
이 분야 전문가도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형 윤치호를 변론하고 나선 윤치왕의 반박 내용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당시 애국가 사본의 '필적' 문제 또는 '문서위조' 문제가 심각하게 논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요한이 지적한 '가사지 필서(筆書) 연대(年代) 문제'에 대한 의심이 '애국가 가사지'의 진위(眞僞) 논란으로까지 번지고 되자 이에 대한 해명 또는 방어가 시급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윤치왕 씨는 신문 지면을 빌어 "애국가 가사는 1907년 형 윤치호가 작사했으며, '붓글씨 가사본'은 같은 해 윤치호가 친히 국문 간소화 방침에 따라 신(新)철자법으로 써놓은 유품"이라고 해명한 것이다.
4. 정광현(윤치호의 사위)의 담화(인터뷰) 내용과 의문점
그런데 윤치왕의 이런 해명은 불과 며칠 후 윤치호의 사위인 정광현에 의해 부정된다. 정광현이 갑자기 담화(인터뷰) 형식을 통해 "'애국가 가사지'의 필서 연대는 1945년"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정광현이 밝힌 인터뷰 요지는 국사편찬위가 작성한 조사 자료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 확인되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윤치호 가족 간에 이러한 혼선이 빚어진 이유가, 주요한이 제기한 가사지 필서(筆書) 연대 의심에 더해 4자(者)위원회에서 최남선과 황의돈이 가사지 진위(眞僞)를 놓고 강력히 성토(聲討)한 사실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실은 중요하므로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하는 바, 조사 과정에서 최남선은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의 필체가 윤치호 본인 것이 아니라고 호통을 쳤고, 황의돈은 가사지에 침을 발라 문질러보기까지 하면서 "이 글씨는 쓴 지 10년도 안 되는 것으로 1907년작이 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 사실을 말한다. 추정컨대 윤치호의 가족들은 가사지 필서(筆書) 연대가 1907년이라고 더 이상 주장하다가는 '윤치호 친필 진위(眞僞)'는 물론 '윤치호 작(作)'까지도 문제될 수 있다는 우려를 했음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수습 역할을 맡은 윤치호의 사위 정광현이 급히 담화형식(?)으로 말을 바꾸어 증언한 바, '붓글씨 애국가 가사본'이 1907년에 필서된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으로 1945년에 쓰인 것임을 실토한 것이다(물론 이 실토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광현은 필적만큼은 좌옹의 친필이라는 점을 은연중(隱然中)에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정광현의 증언에서 또다시 납득하기 어려운 단서를 발견한 바, 그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
정광현의 주장을 보면 가사지 필사 연대가 1945년이라고 수정 실토한 것 외에도 윤치왕의 진술과는 매 사안에서 의견이 상반된다. 윤치왕은 1907년 발간된 한영서원 '팜풀렛'을 거론했는데, 정광현은 1908년 발간된 2~30매 정도의 찬미가집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찬미가집 제1장에 윤치호 작 애국가가 있으며, 공개된 가사본은 그 찬미가집에서 베낀 것으로, 등사(?)할 때 철자법도 고치고 가사 구절도 고쳐 썼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정광현의 이 증언에 까닭을 알 수 없는 오류가 있다. 정광현이 말한 1908년 찬미가집은 분명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을 가리키는 것인데, '찬미가' 재판본을 보면 제1장에는 애국가가 아니라 'Korea(일명 조선가, 한국가)'가 수록되어 있고, '성자신손 무궁화가'가 제10장에, 그리고 '동해물과 애국가'는 제14장에 수록되어 있다. 착각으로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찬미가' 재판본에 수록되어있는 '동해물과 애국가'에는 애초에 아래ᄋᆞ자가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오히려 "윤치호 씨가 국문 간소화론자여서 그 당시 이미 아래ᄋᆞ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윤치왕의 증언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정광현의 주장대로라면, 아래ᄋᆞ자가 없는 찬미가집을 베끼면서 무슨 철자법을 고쳐 썼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추정컨대 윤치호 씨 가족은 그 당시 '찬미가' 재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정황에서 '찬미가'는 옛 문헌이니까 주요한 씨가 지적한 대로 당연히 아래ᄋᆞ자가 들어있었을 것으로 잘못 추측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당시 신문지상에 '찬미가집'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기사)가 여러번 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윤치호 씨 유족은 1955년 당시에 1908년 발간된 '찬미가' 재판본을 갖고 있지 않았거나, 혹은 가지고 있었으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감추고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면 1945년에는 그 '찬미가' 재판본을 가지고 있었을까? 갖고 있지 않았다면 베껴 쓸 수 없었을 테니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1945년에 갖고 있던 찬미가집을 1955년에는 왜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때 가장 좋은 알리바이가 6.25동란(한국전쟁) 중에 잃어버렸다는 변명이다. 물론 그랬을 개연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허나 아버지의 유품인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해온 유족이 정작 그 필사본의 원본이자 아버지가 역술(譯述)한 희귀한 문헌인 찬미가집 재판본을 함께 보관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 윤치호 씨 가족은 1907년경에 발간되었을 '찬미가' 초판본은 가지고 있었을까? 나는 윤 씨 가족이 초판본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 해도 초판본을 보고 베낄 수는 없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찬미가' 초판본에는 아래ᄋᆞ자는 사용했을 수 있되 '동해물과 애국가'는 수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후에 상론하겠지만, 현행 <애국가>인 '동해물과 애국가'는 '찬미가' 초판본에는 없던 것이 1908년 재판본에 증보 수록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정이다.
그런데 20년 뒤인 1975년, 이러한 나의 추정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문학평론가 임중빈 씨가 고(故) 윤치호 선생의 일대기를 연구하기 위해 장남 윤영선 씨가 소장하고 있는 윤치호 씨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집안에서 찬미가 원본(초판본?)과 재판본을 발견한 것이다(<중앙일보> 1975. 10. 16 및 <경향신문> 1975. 10. 17). 아니, 윤치호 아들이 찬미가 초판본과 재판본을 가지고 있었다고? 20년 전 1955년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한참 벌어질 때, 국사편찬위원회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신문 고지까지 해가면서 애타게 찾던 그 책들이 안 나오다가 당사자인 윤치호 아들 집에서 나왔다고? 그때 이 유품들이 제출됐으면 윤치호 작사설을 증빙하는 증거 자료로 작사자 규명에 훨씬 유리했을 텐데 왜 숨기고 안 내놨지? 그때는 소지하고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입수(入手) 확보했다는 건가? 그럼 이 기사는 또 뭐지? "친필 원고 등 이같은 결정적 증거는 그동안 가문을 내세우러들지 않는 유족들의 조심성 때문에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논리 아닌가? 앞서의 나의 추정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의심하려 드니 자꾸 더 의심이 생겨나는 바, "1945년 윤치호 씨가 작고하기 전에 딸의 요청으로 자식들 앞에서 찬미가집을 보고 애국가 가사를 베껴 썼다"는 가족들의 증언은 믿을 만한가? 혹시 '붓글씨 가사지'의 철자법이 현대 철자법으로 된 것도, 가사 내용이 후대의 것으로 바뀌어 쓰인 것도 그때는 '베껴 쓸' 원본 문건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그 붓글씨 가사지가 윤치호의 친필이 과연 맞는가? 이런 의문과 의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실 이런 의심은 1955년에 이미 최남선 황의돈 주요한 등이 제기한바 있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이분들은 도산 안창호와 좌옹 윤치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위치에 있었고, 나처럼 자료 찾아가면서 논리적으로 따지기 전에 경험적으로, 직감적으로 또는 서지학적으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허나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 과정에서 무슨 이유인지 누군가에 의해 교묘하게 묵살되거나 배제되는 쪽으로 사태가 흘러갔다.
5. 정광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의 문제점
윤치호 유족이 제출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의 필적 감정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고 실제로(사실상은 요식적으로) 필적 감정을 하는 등 양쪽(안창호설과 윤치호설)이 팽팽하게 맞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문교부와 국사편찬위는 기존의 4者위원회 대신 공식적인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 2단계 조사활동에 들어갔다. 조사위원회는 최남선, 이병도, 황의돈, 백낙준, 주요한, 서정주, 현제명 등 역사 · 언론 · 문화 · 교육 · 예술계 인사 19인으로 구성되었으며, 5월 13일 첫 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주목할 사안은 5월 13일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첫 회의에 제출된 국사편찬위원회의 문건이다. 이 문건의 제목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이다. 지금 시점에서 제목만 보면 이 자료가 마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활동을 다 끝내고 내놓은 결과물처럼 느껴지지만, 이 자료는 조사위원회 개시(開始)를 위해 국사편찬위가 독자적으로 사전에 준비한 자료이다.
이 자료를 읽어본 나의 소감은 이 문건이 <애국가> 작사자를 가려내는 일에 집중했다기보다 오히려 대한제국 이래의 애국가류에 대한 연구논문 아닌가 할 정도로 산만했다. 이를테면 애국가 작사자를 둘러싼 제반 논의와 언론 동향, 당사자 의견 등을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담았다기보다 왠지 초점이 분산되어 있고 어딘가 편향적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던 바, 일단 의문이 생기는 단서(端緖)로부터 분석을 시도해보자.
내가 이 조사 자료에서 가장 의문스러웠던 부분은 부록(附錄)으로 첨부되어 있는 어떤 소자료(小資料)이다. 제목은 '애국가 작사자에 관한 의견서'이고, 제출자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정광현으로 되어 있다. 정광현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윤치호의 사위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표면상으로야 공적 기관의 장(長)이지만, 이해당사자(利害當事者)의 한 측(側)이라고 볼 수 있는 윤치호 사위의 의견서가 조사위원회 개시일에 맞추어 공식 조사 자료의 '부록'으로 함께 제출되었다? 더구나 다른 측(側)의 의견서는 없고 단지 윤치호 측의 의견서만, 그것도 공식 조사 자료에 공식으로 첨부된 부록이라? 이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자료 작성에 어떤 부당한, 불공정한 개입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정광현 명의로 제출된 이 의견서는 '윤치호 작사설'에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증거 자료(혹은 역증거 자료)이므로 거의 전문(全文)을 소개하겠다.
정광현 씨가 제출한 '의견서' 내용 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단서가 '찬미가'의 발간 연도이다. 바로 얼마 전 담화 형식(?)으로 발표를 할 때는 분명 1908년 발간된 찬미가라고 발언했는데, '의견서'에는 1907년 발간된 찬미가로 살짝 바뀌어 있다. 1907년이나 1908년이나 착각일 수도 있고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907년이면 '찬미가' 초판본을 말하는 것이고, 1908년이면 '찬미가' 재판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판본이나 재판본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또 생각할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정광현은 바로 얼마전 윤치왕이 1907년 발간된 '팜풀렛'을 언급한 데 대해서 수습하려는 의도를 보였는데, 도리어 자기 자신이 윤치왕의 언급을 따라가는 착각이나 실수를 범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추정은 이렇다. 정광현은 담화(?)에서 1945년에 좌옹이 베낀 찬미가가 1908년 발간된 것이라고 발표했었는데, 우여곡절 문헌을 입수해 확인해보니 어랍쇼, 찬미가 재판본에는 애초 아래ᄋᆞ자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베끼면서 신철자법으로 고쳤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는지라, 찬미가 재판본을 증거 자료로 제출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찬미가 재판본을 찾아내 제출하면 어떡하지?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일단 1907년 운운하며 애매하게 말을 바꿔놓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윤치호 씨 유족이 초판본이든 재판본이든 '찬미가' 책자를 갖고 있었는지 여부는 우리로서 알 수 없다. 다만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 '찬미가' 재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은 앞서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만약 윤치호 씨 가족이 '찬미가' 초판 책자를 갖고 있었다면? 그럼에도 이것 역시 증거 자료로 제출을 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찬미가 초판본에 아래ᄋᆞ자는 들어있지만, '동해물과 애국가'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치호 씨 가족이 가장 결정적인 또 하나의 증거 자료가 될 찬미가 책자를(재판본이든 초판본이든) 끝내 제출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추정하고 있다.
정광현의 '의견서' 내용은 전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전개되고 있는 바, 특히 "좌옹 선생은 애국가를 다 쓰시고 난 후에 이 찬미가책의 발간년도인 1907년을 작사년도같이 썼으나 사실상 작사한 해는 이보다 수년 전인데 그 정확한 연월일은 기억치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는 대목은 의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분명 1907년作이라 써놓고 사실상 작사한 해는 수년 전이다? 작사한 해를 기억 못한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소중한 애국가! 자기 분신이어서 죽기 직전 자식들에게 유품으로 남겨주고자 한 애국가의 작사연도를 기억 못한다? 아마 정광현은 혹 다른 명백한 증거가 나와서 애국가 가사의 출현이 1907년보다 앞설 수 있음에 대비해 미리 살짝 판을 깔아놓았을 것이다.
또한 정광현의 의견서 내용은 객관성 없는 자기주장으로 일관되고 있는 바, 애국가의 사본이 좌옹 선생 친필이라고 반복 강조하는 것, 좌옹 선생이 타인작(他人作)을 자작(自作)이라고 사칭할 인물이 아니라고 주관적으로 반복 강변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성격의 의견서가 국사편찬위원회 공식 조사 자료의 부록으로 첨부되었다는 것은 향후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 방향이 객관적 검증보다는 '윤치호냐 아니냐'로 갈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정광현의 의견서에서 가장 강력한 주문은 말미에 등장한다. 정광현은 당시 서울법대 교수였다고 하는데, 법률에 밝은 만큼 '의견서' 말미에 채증법(採證法)적 방향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윤치호 작사설' 같이 물적 증거를 제시한 이는 없다는 것, 윤치호 씨의 친필이야말로 가장 뚜렷한 문헌이라는 것, 증인담화(證人談話)보다는 물적 증거를 중요시하는 채증법(採證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좌옹 선생 애국가 사본을 감정하여 진위를 판단하여 달라는 것 등 향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평가 방향을 은연중에 주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확실한 문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가 작사자 미상론(未詳論)을 논함은 매우 유감지사"라는 항변은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을 미리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어 의문은 더욱 가중된다.
6. '안창호 작사설' 배제에 성공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결론
오늘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일단 논의를 정리해보자.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는 두 차례 더 모임을 가지고 해산하게 되는 바, 마지막 세 번째 회의에서는 결국 표결까지 벌였다. 결과는 11대 2로 윤치호의 압도적인 우세! 최남선과 황의돈은 마지막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도하 각 신문들은 이 결과를 놓고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씨설 유력' 또는 '확증 없어 무결론' 등으로 약간 뉘앙스가 다른 기사 제목을 뽑아놓고 있었다. 공식적인 결과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으니 당시의 신문 기사들로 정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바, 이병도 씨가 윤 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고 지적하고 작사자로 결정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과학적 증거가 막연하다는 다른 위원들의 반대로 동 제안은 철회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로써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未詳)으로 하느냐 윤 씨가 유력하다는 단정을 내리느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표결을 한 결과 11대 2로 윤 씨가 유력시된다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공식 결론은 '작사자 미상(未詳)'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점이었고 혹시 나중에라도 실제 작사자가 있어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게 되면 낭패가 될 수 있다는 신중한 결정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윤치호가 작사자로 확정될 경우 애국가 폐지론이 대두될 것을 염려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윤치호 작사설을 신봉하는 측에서는 이를 두고 '작사자 미상'이 아니라 '윤치호 작사자 미확정'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내 판단으로는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숨은 결론은 '작사자 미상'도 아니고 '윤치호 작사자 미확정'도 아닌 '안창호 작사자 배제(排除) 성공'이었다고 본다.
안창호 작사자 배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독자 여러분이 좀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구는 씨알연구소 소장 박재순 박사가 이미 정밀하게 분석해 놓은 바가 있다. 기독교사상 2018년 10월부터 2019년 9월까지 장장 12개월 동안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활동의 전말(顚末)에 관한 공작(工作) 배후(背後)와, 안창호 애국가 노랫말 시(詩)에 담긴 사상과 정신을 심도 있게 고구(考究)하여 놓았다. 오늘 이 글 연재의 제목을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활동의 전말(顚末)'로 잡았으나 이 제목에 딱 맞는 글은 박재순 박사가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다 밝혀놓았다. 박재순 박사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 독자들께서는 꼭 일독하시기 바란다.
그건 그렇고 '애국자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우여곡절 여러 달의 활동을 마쳤음에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유야무야(有耶無耶) 처리된 채, 객관적으로 검증된 '애국가 작사자 조사 결과보고서'는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1년쯤 지난 1956년 8월 10일, 경향신문에 아주 작은 크기의 단신(短信)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후 세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일개 간부의 무책임한 정보 제공이 마치 애국가 작사자 문제의 최종 규명인 것처럼 행세하게 되는 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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