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는 친일파이자 친나치주의자였다. 게다가 그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라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는 임시방편이며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임진택 씨의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연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안익태 애국가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본다.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傳聞)증거에 대한 검토
10.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
11.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2.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사자는 현재 공식적으로는 미상(未詳)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학계(學界)에서는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이 오랫동안 대립해 왔으며, 세간(世間)에서도 두 대립되는 설이 공공연하게 각축(角逐)을 벌여왔다. 두 설(說) 외에도 오래전에는 소위 '합작설'이란 것이 등장하기도 했고, 한때는 음악학자 노동은 교수가 추정(推定)한 이른바 '공동창작설'이 공감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세(勢)를 얻고 있지 못하다.
나는 이와 관련된 여러 주장과 근거들을 면밀히 살펴보았고, 그 결과 현재 나의 판단은 윤치호설보다는 안창호설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다만 향후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주제로 다섯 번 정도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나의 판단과 논리가 '안창호 작사설 + 공동 창작설'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음도 일단은 열어두고자 한다.
1. 김구 주석(主席)이 남긴 <한국애국가> 악보집 주석(註釋)에 대하여
애국가 작사자 논쟁에 있어 안창호 측과 윤치호 측이 상반된 해석을 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문건이 있는 바, 1945년 11월 중국에서 간행된 <한국애국가>라는 악보 자료이다. 이 문건에 대한 나의 해석을 피력함으로써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맞았다. 충칭(重慶)에 자리 잡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즉각 귀국을 추진했으나 임시정부를 인정치 않은 미군정에 의해 귀국이 지연되다가 석 달이 지난 11월 23일에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 기다리는 동안에 임시정부는 우리네 애국가를 정리하여 국내외에 알리고자 '음악월간'이라는 중국 내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4쪽짜리 인쇄물을 제작해서 보급한 바, 이 인쇄물의 제목이 '한국애국가'였다. 8절지 한 장을 반으로 접어 4쪽으로 인쇄한 이 '한국애국가'에는 애국가 4절까지의 가사와 악보가 실려있고, 중문(中文)과 영문(英文)으로도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나라와 친선과 외교 활동을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이한 것은 그 인쇄물에 애국가의 작곡자는 안익태로 명기(明記)되어 있음에도 작사자는 일명(佚名)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명(佚名)이란 '이름을 숨긴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거니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 증인인 김구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숨긴다(말하지 않겠다)"는 심정(心情)을 드러냈다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다. 혹자는 일명(佚名)을 '이름을 잃어버렸다' 또는 이름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교묘한 착각이거나 고의적인 혼동이다. 일명(佚名)은 실명(失名)과는 다른 개념이다. 佚(일)자는 '숨을 일' 자이고 失(실) 자는 '잃을 실' 자이다. 실명(失名)은 '이름을 잃어버렸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 맞지만, 일명(佚名)은 '이름을 알고 있으나 말할 수 없어 숨긴다'는 뜻이다. 김구 선생의 기록은 분명히 '작사자 일명(佚名)'이지 '작사자 실명(失名)'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그 인쇄물에는 '한국독립운동 40여 년의 혁명영수(革命領袖) 김구 주석(主席)'의 얼굴 사진이 크게 실려 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한문 활자로 한국애국가적고사(韓國愛國歌的故事)라는 주석(註釋)이 있어 <애국가>의 유서(由緖)를 상세히 설명해놓고 있는 바,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애국가가 창작된 것은 50년 전 어느 한국 애국지사 한 분의 손에 의해 쓰인 것이나, 그 이름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처음에는 서양의 어떤 이름난 곡(曲)에 가사를 맞추어 불렀으나 한국 인사(人士)들로서는 마땅치 않던 차에, 10년 전 한국 청년음악가가 만든 새 곡조가 있어 이를 조국 광복 운동에 국가(國歌) 대신 사용해왔다. 안익태 군은 한국의 저명한 작곡가이자 현악기 연주자로, 일찍이 오지리의 수도 비엔나에 유학해 음악을 전공, 구미(歐美) 각국에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는 서반아(스페인)에 살고 있는데 나이는 42세이다."
김구 주석(主席)이 남긴 <한국애국가>에 대한 이 주석(註釋)을 보면 "작사자의 이름은 숨기려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한국이 낳은 젊은 작곡가 안익태 군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듬뿍 넘친다. 다만 당시 안익태에 대한 정보는 일반적인 소문 수준으로 보이며, 아마도 미주 대한인국민회를 통한 소개 정도였을 터, 연락이 직접 닿는다거나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김구 선생이 남긴 이 자료를 보면서 나로서는 참으로 분하고 참담했던 것이,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수용(受容)해서 해외 동포와 독립군들에 열심히 보급하고 중국 미국 등 연합국(聯合國)과 함께 조국 광복에 매진했던 1940년대 초, 정작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추축국(樞軸國)을 순회하며 에텐라쿠와 일본축전곡, 만주환상곡을 열렬히 지휘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김구 선생이 만약 알았다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떻든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국내의 우리 국민은 물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6년간 <애국가>를 국가(國歌) 대용으로 사용해온 임시정부에서마저도 정작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 채(혹은 이름을 숨긴 채) 불러왔다는 것, 이것이 애국가 작사자에 관련한 첫 번째 사실(史實, 事實)이다.
김구 주석이 남긴 이 기록은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아직도 논쟁 중인 증거물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김구 선생이 언급한 '50년 전의 한국 애국지사'가 '진정한 애국지사 안창호이지만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인지 '한때 애국지사였으나 친일로 변절한 윤치호이므로 이름을 버렸다'는 것인지 그 해석을 놓고 상반된 견해가 대립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판단과 해석을 피력해보려 한다.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측은 김구 선생이 지칭한 '50년 전'이라는 시기를 1945년에서 거슬러 계산하면 1895년경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현행 <애국가>가 형성된 1907년과는 시간 차가 있음을 들어 '안창호 작사설'을 배제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일명(佚名)이란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므로 작사자가 친일로 변절한 윤치호이기 때문에 이름을 버린 것이라고 자해적(自害的) 강변(强辯)을 한다.
하지만 '50년 전'이라는 시기가 애국가 형성 시기와 맞지 않아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안창호가 작사했든 윤치호가 작사했든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안창호가 작사한 것이면 38년 전이어야 하고 윤치호가 작사한 것이면 50년 전이라도 괜찮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50년 전'이란 표현을 꼭 숫자로 따져 50년으로 보는 것은 좀 단순한 논리이다. '50년 전'은 '오래 전, 반백년(半百年) 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관용어(慣用語)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좀 더 해석을 넓혀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김구 선생의 주석(註釋)에는 몇 개의 햇수 또는 나이가 제시된다. 하나는 '한국독립운동 40여 년의 혁명영수(革命領袖)', 그리고 '50년 전 한국애국지사' 그리고 '10년 전 새로 만든 곡조'와 '안익태의 나이는 42세' 등이다. 나는 바로 이 숫자들이 김구 선생의 의중(意中)과 심정(心情)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한국독립운동 40여 년'은 김구 선생의 파란만장한 독립 투쟁을 가감 없이 내세운 숫자이다. 거기에 '50년 전 한국애국지사'는 김구 선생보다도 앞서 벌써 반백년 전에 애국 활동을 시작하여 한평생을 일관한 어떤 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10년 전 새로 만든 곡조', 이 설명에서는 비록 새로 만든 곡조이지만 연혁이 짧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 읽힌다. 그리고 거기 덧붙인 '나이는 42세',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될 안익태의 나이를 표기한 것은 김구 선생이 애국 독립 투쟁을 시작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한국 청년'이 지금 이렇게 성장하여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뿌듯함이 담겨있다.(나로서는 다시 한번 참담해지는 바, 안익태의 변절을 김구 선생이 만약 알았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이제 정리해보자. 김구 선생은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실명(失名)이란 단어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김구 선생이 일명(佚名)이란 단어를 쓴 것은 '작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어떤 피치 못할 연유가 있어서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 마치 다산 정약용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 가 있는 형 정약전을 차마 검을 흑(黑)자가 들어가 있는 흑산(黑山)으로 부를 수 없어 검을 현(玄)자가 두 개 들어가 있는 현산(玆山, 이를 '자산'으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임)으로 칭한 것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피치 못할 연유'는 대체 무엇일까? 김구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이다. 우선 연배가 비슷한 서북 출신의 민족지도자로 평생을 일관되게 살아왔다는 점에서 그러하지만, 젊은 시절 한때 두 사람은 처남·매부 지간이 될 뻔한 사이이다. 그리고 임시정부 초기에 김구가 경무국장에 천거된 것은 당시 내무총장이자 국무총리 대행이었던 안창호에 의해서였다. 경무국장이란 직책이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자리임에 유의하자. 김구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이지만 애국가가 국가를 대행함에 안창호가 계파 간의 분열과 반대를 염려하여 자기가 작사했음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을 되찾은 조국으로 귀환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김구 선생은 향후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임이 밝혀지면 그러한 이념적 분열과 반대가 더 확대되어 일어날 수 있음을 염려하고 그 비밀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으리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점검해보자. 만약 김구 선생이 말한 '50년 전 애국지사'가 윤치호라면 굳이 <한국애국가> 악보집에 작사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 귀국하여 독립정부를 세우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라고 공언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친일민족반역자의 대표 격인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추어준다?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이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김구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알고 있었다면 그 열혈 성격에 가만있었을까? 벌써 진즉에 애국가를 교체하지 않았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구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추호(秋毫)도 없다.
김구 선생이 남긴 기록, "애국가가 창작된 것은 50년 전 어느 한국애국지사 한 분의 손에 의해 쓰인 것이나, 그 이름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다짐은 애통히 돌아가신 애국독립지사에 대한 애틋한 헌사(獻辭)이지 멀쩡히 살아있는 친일민족반역자를 아쉬워하는 변명사(辨明詞)가 아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거사의 배후로 지목받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 거듭되는 옥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다. 윤봉길 의거를 기획 실행한 김구 선생은 안창호 선생에 대한 지극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애국가> 악보집의 주석(註釋)은 만고의 애국지사 안창호 님에 대한 통한의 헌사(獻辭)였다.
2. 이광수 저(著) <도산 안창호> 에 담긴 진실
해방 이후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글로 기록한 이는 작가 이광수이다. 1947년 5월 이광수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도산 안창호'라는 전기(傳記)를 저술한 바, 그 책의 제6장 '상해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정청(政廳, 상해 임시정부 청사)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해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 끝 절에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하는 것을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지금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作)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國歌)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否認)도 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수는 일제 말기에 친일로 변절함으로써 반민족행위자로 욕된 말년을 보냈지만, 젊은 시절 기미년에 2.8독립선언서를 써낸 최고의 문필가로,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편집장)을 맡아 안창호 내무총장(겸 국무총리 대행)을 가까이서 보필한 인물이다. 이광수가 언급한 애국가 작사 관련 내용 중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도산이 '동해물과 애국가'를 매일 앞장서 힘을 다해 불렀다는 것.
둘째는 '임군을 섬기며' 가사를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했다는 것.
셋째는 애국가의 지금 부르는 가사는 원래 도산의 작(作)이라는 것.
넷째는 애국가가 자기의 작이냐고 물으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는 것.
도산이 언급한 이 네 가지 내용 중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가장 직접적인 증언은 셋째 번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임시정부 정청에서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가까이서 도산선생을 모셨던 이광수는 분명히 이렇게 언급했다. "애국가의 지금 부르는 가사는 원래 도산의 작"이라고. 그런데 이 진술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진술은 어떠한가?
첫째 진술, "도산이 '동해물과 애국가'를 매일 앞장서 힘을 다해 불렀다." 이는 굳이 거짓말로 지어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둘째 진술, "도산이 '임군을 섬기며' 가사를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했다." 이 내용은 연구자들에 의해 후에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다.
그럼 넷째 진술, "도산이 애국가가 자기의 작이냐고 물으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이 말 역시 거짓말로 꾸며낼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첫째, 둘째. 넷째가 다 사실이라면 셋째 진술은? "애국가의 지금 부르는 가사는 원래 도산의 작(作)"이라는 진술 역시 사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넷째 진술은 셋째 진술이 사실임을 전제로 해야만 진행될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그 책에서 "애국가는 도산의 작이지만, 자기의 작이냐고 물으면 무슨 이유인지 시인도 부인도 하지 낳았다"고 진술한 것이지, "자기의 작이냐고 물으면 시인도 부인도 안 한 것으로 보아 도산의 작인지 의문시된다"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안창호 작사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광수의 셋째 진술은 빼놓고 넷째 진술만 인용하여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나는 그것은 논리 부족이거나 거짓 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광수의 증언에서 셋째 진술을 빼버리면 넷 번째 진술은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광수의 이 증언은 도산이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사실의 그 어떤 물증보다도 더 유효한 증거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이것이 확실한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도산이 애국가 가사가 자기 작(作)임에도 불구하고 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는지 그 연유(緣由)를 찾아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도산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것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의 관건(關鍵)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3. 박은용의 '애국가고'에 대한 고구(考究)
해방 후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최초로 논란이 된 것은 1948년 10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박은용의 글 '애국가攷'로부터 비롯된다. 음악평론가인 박은용은 '주로 그 작사자(作詞者)에 대하여'라는 소제목을 달고 3회에 걸쳐 이 글을 연재한 바, 그가 이 글을 발표하게 된 것은 이 시기 문인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 책을 내고 거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도산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최초로 윤치호 작사설을 제기했는데, 그가 내세운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첫 번째, 피아니스트 윤기선 씨(윤치호의 아들) 집에 전해오는 윤치호 씨의 필적 중에 '1907년 윤치호 作이라는 서명(署名)이 붙은 애국가사(愛國歌詞)의 글발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는 윤치호의 다른 필적과 대조해보아 추호도 틀림없는 그의 친필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박은용은 그 붓글씨 가사지에 적혀있는 애국가 가사가 작사된 연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윤치호 씨 필적에는 '1907년 작'이라고 쓰여있으나 자기 생각으로는 그것은 작사한 연대가 아니라 그 가사를 필서(筆書)한 연대일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그러면서 박은용은 그렇게 추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얼마 전 <기자협회보>에 실린 시인 서정주 씨의 글을 보면, 애국가 작사는 독립협회 당시에 윤치호 씨의 손으로 제작되었다고 나와 있는 바, 이 사실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구수(口受)받아 기록한 내용인즉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서 박은용은 이렇게 더 추정하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 등과 같이 조직한 독립추진과 개화운동의 단체로서, 그 회장까지 맡았던 윤치호 씨니만큼 당시에 애국가를 작사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것이 그 뒤 많은 개화청년들의 입을 통해 구전해 오던 것을 1907년(융희 원년) 좌옹(윤치호의 호)은 느낀 바 있어 우연히 이것을 필사(筆寫)하고 여기에 필사한 연대를 기록했던 것임은 눈으로 본 듯 확연하다."
다음 두 번째, 박은용은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빙하고자 하였다. 박은용의 말인즉슨, 좌옹이 융희 2년(1908년) 15장(章)으로 된 찬미가집을 그의 이름으로서 발행했는데, 그 14장에 현행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박은용은 자기가 그 책자를 갖고 있으니 언제든지 원하는 이에게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어 박은용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이상에서 나는 애국가가 윤치호의 것이라는 걸 밝혔다고 생각하거니와 실로 근거없고 허망한 것은 안창호 씨 작사설이다. 도산은 1878년생이니까 이 가사가 제작된 독립협회 발족시엔 불과 17~8세의 소년이었으며, 더구나 그는 협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다. 있다면 그도 당시 많은 청년들과 같이 습송(習誦)했다가 후에 임시정부 시절에 교시(敎示)한데 불과하리라."
그리고 세 번째, 그런데 박은용은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는 논지를 넘어 이런 주장까지 한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삭탈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作)을 만들 필요는 없다. 국민이 개창하는 엄숙한 애국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것이다. 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 당국은 이 사실을 구명(究明)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며, 애국가에 대한 태도도 이제는 분명해야 될 때가 왔다. 즉 이 애국가는 과거의 그때 그 형세에 적당한 내용이며 관념이지 20세기의 새 나라를 창건하려고 하는 그것에는 도무지 적합지 않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박은용의 주장을 읽고 나서 독자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궁금하다. 희귀한 증거자료들을 확보하여 용감하게 선구적으로 자기 주장을 개진하였다고 느낄 독자도 꽤 있을 것 같다.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박은용은 음악평론가라는데, 왜 애국가의 음악적 측면이 아니라 작사자에 대해 관심을 더 갖고 있지? 윤치호 씨 아들 집에 '1907년 윤치호 作' 붓글씨 가사지가 있다는 걸 어떻게 이 사람이 알아냈지? 이 사람은 왜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가 아니라 윤치호라는 것을 이렇게 밝히려 하지?
이런 의문을 풀려고 인터넷에 들어가 열심히 뒤져보니, 박은용은 이화여고 교사였다가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월북한 음악인으로 이름이 나와 있다. 아, 좌파 음악인이었구나. 자, 박은용이 월북한 좌파 음악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독자 여러분의 느낌이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하다. 나는 박은용의 '애국가攷' 집필 목적이 "애국가가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 안창호와는 관계없는 친일파 윤치호의 작사이며 그 내용 또한 20세기 새 나라의 창건에 도무지 적합지 않은즉 바꿔야 한다"는 취지라고 본다. 박은용은 애국가 교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여론 선전의 일환으로 작사자가 친일파 윤치호임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박은용이 '애국가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면서 근거로 내놓은 두 가지 물증 즉 윤치호 유족이 갖고 있다는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와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은 오늘날까지도 '윤치호 작사설'을 신봉하는 측에서 가장 강력한 물적증거로 내세우는 자료다. 과연 그 두 가지 자료가 증거법적으로 효력이 있는지는 추후 다시 상론할 터이지만, 내가 박은용의 글에서 가장 주목한 대목은 그가 의문을 표명한 '붓글씨 가사지' 작성 연대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단 점검을 해두고 가고자 한다.
박은용은 윤치호 씨 필적에는 1907년작이라고 쓰여있으나 자기 생각으로는 그것이 작사한 연대가 아니라 그 가사를 필서(筆書)한 연대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사실은 박은용이 이렇게 추정한 것은 결정적으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추정을 하게 된 근거가 서정주의 글이고, 서정주의 글은 이승만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것인데, 이승만이 말한 독립협회 시절은 애국가가 만들어진 시기보다 10년이나 앞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후에 확인된 바,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절의 '무궁화가'와 10년 후에 탄생한 '애국가(무궁화가2)'를 혼동한 것이었으므로, 박은용의 연대 추정은 뿌리부터 흔들리는 오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따져봐야 할 중요한 단서가 있다. 당시 동아일보에 이 가사지가 기사와 함께 사진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박은용이든 동아일보든 윤치호 씨 아들로부터 이 가사지를 건네받은 사실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때 이 붓글씨 가사지에 1907년작이라고 쓰여있었으므로 박은용은 당연히 그 가사지가 쓰인 연대도 1907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바꿔말해 윤치호 씨 아들(가족)이 박은용이나 동아일보에 이 붓글씨 가사지를 건넬 때 "이 가사지는 아버지께서 1907년에 작사할 때 써서 그때부터 갖고 계셨던 유물이요"라고 말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은용이 "1907년은 작사한 연대가 아니라 필서(筆書)한 연대일 것"이라고 추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윤치호 씨 아들(가족)이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 "이 가사지는 아버지가 1907년에 작사할 때 써서 그때부터 갖고 계셨던 유물"이라고 말했다는 사실, 이 단서를 일단 머릿속에 저장해 놓기 바란다.
이 단서는 다음 회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활동의 전말(顚末)'에 대단히 중요한 역증거(逆證據)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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