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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억울하게 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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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억울하게 살 뻔했다

[2020년에 다시 읽는 보훈 ⑥]

2020년 올 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고, 6·25전쟁 70주년이자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보훈의 역사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가치와 이를 통해 시민적, 평화적 발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의미를 짚어보고자 <프레시안>은 보훈교육연구원과 함께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보훈의 역사, 사회적 의의, 평화지향성 등을 사회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 방향을 정립해 보는 기회의 장을 갖고자 합니다. 편집자.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로 공정(公正)이 회자되고 있다. 공정이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공정성이라는 것이 사회생활을 지탱하는 기본 원칙 중의 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물질, 권력, 서비스, 명예 등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 있는 재화가 제한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그 재화를 어떻게 분배하는가 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사실 때문이다. 즉, 공정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유리한 결과를 얻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해를 위해서 공정과 관련한 한 사례를 들어보자. 이는 인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로 풀기 실험을 수행한 결과이다. 실험의 목적은 낮은 카스트에 속한 학생들이 카스트를 밝혔을 때와 밝히지 않았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법적으로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관습적으로는 여전히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어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실험의 결과는 분명했다. 카스트를 밝히지 않았을 때, 낮은 카스트 학생들의 성과는 높은 카스트 학생들의 성과에 뒤처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카스트를 밝히고 실험에 참가하자 낮은 카스트 학생들의 성과가 급격히 떨어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실험자들은 카스트를 밝히게 되면 공정하게 취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학생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낮은 카스트의 학생들은 신분 때문에 공정한 보상이나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을 수시로 접해왔다. 카스트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상황이 되자 이런 경험들이 떠올랐고, 이는 의욕 저하로 이어져 성과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이를 애덤스(J. Stacy Adams)는 공정성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각 개인은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공헌에 대한 공정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한 긍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조직 내에서의 개인은 자신의 공헌을 그에 대한 보상과 비교하고, 그 둘 사이의 비율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공정한 대우를 받았는지 판단한다. 이런 판단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먼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보상 비율이 같다고 느낄 때에는 공정한 상태로 인식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공헌에 비해 보상을 더 적게 받는다고 느낄 때에는 부정적인 불공정성을 인식하고 노력의 수준을 낮출 것이다. 이를 보면 억울하게 살고 있다고 느낄 때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럴 경우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아 결국 성과를 스스로 낮추어버리기 때문이다.

일견 어이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실험 결과는 우리 사회와는 무관할까? 우리 사회에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다. 그렇지만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그냥 수저의 재료 구분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위 실험의 영향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신의 책임이 아닌 불공정한 굴레로 인해서 본래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구조라면 그 사회가 건강하고,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영향은 불공정 처우를 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될까? 아니다. 그 영향은 불공정한 처우를 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떠안게 된다.

이렇게 인도의 실험이나 공정성 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정한 대우와 보상이 이루어질 때 조직원의 성과와 헌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더 나아가 국가 단위의 조직에 적용하더라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즉, 나라를 위한 헌신이 명예롭고 존중받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될 때, 공동체 구성원들은 나라를 위해 본인이 갖고 있는 열정과 능력을 주저 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공정한 사회가 이루어질 때 국가공동체의 영속적 발전을 위한 사회적 토대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운석

우리 사회의 오늘은 국민들의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국가유공자들의 희생과 공헌 위에 이룩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헤쳐 나가고자 목숨마저 돌보지 않았던 국가유공자들이 꿈꿨던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그들이 바라던 사회는 불합리한 기준에 의해서 억울하게 사는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억울하게 살 뻔했다’고 판단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그런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불공정한 사회는 현재의 오늘을 선물한 우리 은인들을 배신하는 일이 된다. 이와 동시에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보훈의 본질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 역시 불공정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유공자들이 바란 세상은 정의로운 세상이다. 그러니 불공정은 보훈정신에 위배된다. 우리를 위한 공헌과 희생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도리이다. 그리고 이런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공정한 일이다. 이런 뜻에서 보훈은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해 국민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공정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어떤 전쟁이라도 기꺼이 수행하겠다는 마음은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이 국가로부터 받는 대접과 감사의 정도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는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Washington)의 말은 이런 의미를 보여준다. 2020년에 다시 읽는 보훈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에서 공정을 지탱하는 한 영역이 바로 보훈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필자 서운석 박사(행정학)은 보훈교육연구원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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