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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못 믿는 북한과 미국, 합의 이행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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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못 믿는 북한과 미국, 합의 이행하려면

[기고] 북미, 구조화된 불신의 벽 넘어야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미 사이 비핵화와 관계개선의 진도가 기대만큼 빠르진 않은 모습이다. 정상회담에 따른 후속 회담이 계속 이어지고, 비핵화가 진전을 보이면서, 미국이 북한의 체제 안전을 보장해주고 경제제재도 완화하는 과정이 진행되어야 할 텐데, 속도감 있게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비핵화 협상은 동결-불능화-폐기의 단계를 얼마나 빠르게 할 건지, 그에 따라 미국은 어떤 조치를 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협상의 시작은 빨라야 한다. 그런데도 북미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북미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외교 관계가 없는 국가들의 관계개선은 '특사·밀사 교환 → 정상회담'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온 것이 국제정치의 역사이다. 잘 알려진 사례가 미중관계 개선 과정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1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만나 미중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는 이듬해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열고 관계개선에 합의했다. 이후 세계정치는 본격 데탕트의 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미국의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중대한의 합의까지 담고 있어서 양국관계 개선을 위한 단단한 초석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핵화와 그에 따른 미국의 조치를 합의하는 과정에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북한은 사활을 걸고 개발한 핵을 십분 활용해 체제 안전 보장, 북미 관계 정상화, 경제지원 등을 모두 얻으려 한다. 반면 미국은 되도록 적게 주고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어내려 한다.

그러니 북미 사이 지속적인 밀고 당기기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속엔 많은 장애와 변화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될 북미의 협상에 많은 장애와 어려움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북미 사이 오래된 불신, 구조화된 불신이다.

70년간 불신 구조화

지난 70년의 북미 관계 역사는 서로 간의 불신을 누적하는 과정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면서 북미의 적대감과 불신은 시작됐다.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북한전역에 가한 무차별 융단폭격은 북한 사람들의 뇌리 속에 '미국 공포'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이 북한에 퍼부은 폭탄은 63만 5000톤이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 50만 3000톤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의 동북3성과 북한에 핵무기 26기 투하하는 작전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3차대전에 대한 우려, 영국의 적극적 반대 등으로 핵무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적대감과 불신은 심화되었다.

전쟁 후 북한은 많은 상징조작을 통해 미국을 악마화·원수화(怨讐化)하면서 대미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미국을 침략의 주범, 민간인 학살의 장본인, 남북 사이 이간 세력 등으로 선전하면서 주민들에게 미국을 '철천지 원수'로 각인시켜 나간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은 위부의 위협을 증폭시켜 체제 내부를 결속시키는 효과를 얻어왔다.

실제로 북한이 오랫동안 식량난·외화난·에너지난의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적대감이 김일성에 대한 숭배와 함께 북한체제를 받치는 두 개의 기둥으로 기능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북미 사이 불신과 적대감을 더욱 심화시키는 작용도 동시에 했다.

1970~1980년대에는 평화협정회담을 서로 제안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 불신게임을 지속했다. 북한은 1962년부터 '남북 간 평화협정'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는 '북미 간 평화협정'으로 입장을 바꿨다.

실제 1973년 초에는 당시 조선노동당 비서 김영주(김일성의 동생)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면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를 만나 협상하려 했다. 북미 직접협상을 통해 북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철수를 얻어내려 했다.

1974년에는 미국 의회에 서한을 보내 북미 평화협정을 직접 촉구했고, 이듬해에는 외교부장 허담-키신저 회동 주선을 중국 측에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면서 북한의 제의를 매번 거절했다.

1976년에는 미국이 남북미 3자회담을 제안했다.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보려는 의도였다. 1979년에도 미국은 3자회담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북미 직접협상과 북미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3자회담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1984년엔 북한이 3자회담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을 포함한 남북미중 4자회담을 역제의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회담 제의와 거부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진정성을 의심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불신과 반감은 더욱 깊어졌다.

양국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이 구조화되는 것은 1990~2000년대 핵 문제 떄문이었다. 오랜 협상 끝에 1994년 10월 타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핵폐기와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경제적 지원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중간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패배했고, 상·하원 권력은 공화당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에 약속한 연간 50만 톤의 중유공급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산승인의 권한을 쥐고 있는 하원에서 공화당이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 제재 완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은 다시 미국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가운데에서도 클린턴 행정부 동안에는 제네바 합의가 유지되어 나갔다. 하지만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부시(George W. Bush)와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북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1990년대 말부터 북한이 핵관련 물질을 수입해왔고 이를 통해 몰래 핵 개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2002년 10월엔 제임스 켈리(James Kelly)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HEU(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인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대해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우리는 고농축우라늄보다 더한 것도 가질 권한이 있다'고 맞섰다. 미국 정부의 강경파는 '강석주의 발언은 북한이 HEU를 시인한 것'이라며 이를 언론에 흘려 북한의 HEU 프로그램 보유를 기정사실로 해버렸다.

이후 제네바 합의는 폐기됐고, 한반도는 다시 북핵위기를 맞게 되었다. 미국은 자국 안보 최대화를 지속 추진하면서 북한을 비롯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고, 북한은 주체적 생존전략을 견지하면서 양국의 간극은 멀어져 왔다.

▲ 12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불신 극복 방안 3가지


이렇게 구조화된 불신이 정상회담 한 번으로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불신 극복과정이 진행되어야 정상회담의 합의도 순조롭게 이행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쉽고 간결한 과정은 아니지만, 길이 있다.

첫째는 '진정한 상호인정'(Sincere Mutual Recognition)이다. 국제정치학의 주요학파 가운데 영국학파가 강조하는 국가 간 관계발전의 시작점이 진정한 상호인정이다. 그저 레토릭이 아니라 상대의 독립성과 주권, 체제, 역사, 문화 모두에 나의 것과 동등한 가치를 두는 진정한 상호인정이 먼저 전제될 때, 불신극복의 과정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신기능주의적 접근(Neo-functional Approach)이다. 스포츠, 예술, 종교, 학술 등 비정치적인 분야에서의 교류를 활성해서 점차 정치·군사적인 교류로 확대하는 방안이 기능주의이다. 기능적 분야는 갈등요소가 적고 이질적인 사회에 대한 상호 침투효과(inter-penetrative effect)가 커 동질성을 만들어 가는 데 효과적이다. 1979년 미중 간 수교를 할 때도 문화협정을 먼저 체결하고 이후 안보문제와 타이완 문제 등을 협의하면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기능주의적 접근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엘리트들이 제대로 방향을 설정하고 정책을 추진해주어야 한다. 이처럼 기능주의에다 정치엘리트의 역할을 추가로 강조하는 주장을 신기능주의라고 한다. 북미 간의 불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접근방안이 아닐 수 없다.

셋째는 상호위협축소(Mutual Threat Reduction)이다. 진정으로 상대를 인정하면서 기능적인 분야의 교류를 강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위협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우선 위협인식을 줄여야 한다. 북한은 미국을 최대의 외부위협으로 여기고, 미국은 북한을 동북아의 현상변경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불신이 해소될 여지는 없다.

이 위협인식을 줄이기 위해서는 위협축소의 조치들이 필요하다. 물론 낮은 단계의 조치들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상대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상대를 적으로 간주한 훈련을 줄이는 것도 중요한 조치이다.

그런 점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는 조치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위협축소의 조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앞으로 진척되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반하는 하나의 행위, 한 가지의 조치는 관계를 원점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첫 북미정상회담의 합의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매우 실용적인 접근을 선호하고, 핵 문제 해결이 서로 필요한 상황에서 만났기 때문에, 비핵화와 체제보장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핵 문제 해결과 관계개선의 노정에 진입하면, 신뢰의 기반 없이는 한 발 전진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 적대국이 스스로 불신극복의 과정에 선뜻 뛰어들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러시아나 스웨덴, 몽골 같은 국가들이 중요한 매개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직접, 그리고 이들 국가들을 고무해서 북미가 불신을 넘어서는 과정에 들어서게 해야 할 것이다. 북미 양국이 스포츠와 문화 등 하위정치 수준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서로 위협이 안 되도록 조치를 취해나면서, 진정한 외교의 상대로 서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독려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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