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여성은 없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 이후 6.13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 번의 지방선거가 있었지만 여성 광역단체장 당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역대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113명은 모두 남성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인 2017년 2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우리와 경제수준이 비슷한 OECD 여러 나라들과 비교하면 여성의 지위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거의 모든 면에서 꼴찌 수준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번 지방선거 공천 과정을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포스트에 여성 후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중년 남성의 것이다. 미투(#MeToo)운동과 성평등 정책 등 여성 이슈가 정치판을 흔들었지만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17곳 광역단체장은 물론, 재보궐 선거 지역구 12곳 모두 남성 후보가 당선됐다.
선거에 여성이 호명될 때도 있다. 중년 남성의 선거를 돕는 딸 혹은 아내로 말이다. 최문순 민주당 강원도지사는 선거 유세 중에 "강원 안구복지 타임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둘째 딸의 얼굴 및 전신사진을 게재했다. 중년 남성 후보의 선거유세에 여성이 활용되는 경우는 이 외에도 숱하다.
광역의회와 기초의회에 여성 진입비율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년 여성 후보나 청년 여성 후보는 선거 운동을 도와주러 온 후보의 딸이나 아내로 오해받기 일쑤다.
'아재 정치'를 끝내기 위해 페미니스트 정치인들이 모였다. 21일 서울 스페이스노아 커넥트홀에서 '아재 원팀 정치를 끝낼 페미니스트 정치 모색 6.13 지방선거 결과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는 신지예 전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홍미영 전 민주당 인천시장 예비후보, 권향엽 민주당 여성국 국장 등이 참석했다.
"여성들에게 하향 점수를 줘서 탈락시키는" '아재 정치'의 공고한 카르텔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배출한 민주당도 '아재 정치판'이다. 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의 17곳 광역단체장 후보를 확정한 뒤 중년 남성 후보들의 얼굴이 전국을 가득 메우고 있는 공천지도 포스터를 공개했다. 이 지도는 SNS에서 '더불어남자당', '더불어아재당'이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뜨거운 화제가 됐다.
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압승했지만, 그 자리에 여성은 부재했다. 권향엽 민주당 여성국 국장은 "저희 당에서 여성 후보에게 기회를 줬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더불어아재당'이란 비난을 면치 못한 것은 송구스럽고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는 미투운동과 성평등 개헌에 대한 외침이 있던 2018년의 시대정신으로 볼 때 실망스럽고 미흡한 성적표"라고 평가했다.
권 국장은 공천과정에서 여성에게 불리하도록 구도를 만드는 남성 카르텔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 후보들이 남성 후보들보다 의정활동 평가가 좋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의 일대일 구도로 하면 여성이 이긴다"며 "여성이 이기는 구도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역 실사, 현지평가, 면접평가 등을 할 때 여성들에게 하향 점수를 줘서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경향성이 보였다"고 말했다.
다만, 권 국장은 여성 정치가 좀 더 세력화 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 국장은 "지역위원장이 공천권을 행사하는데 226개 지역위원회 중 여성 지역위원장의 수는 현저히 적다"며 "여성들은 출마를 위한 정치뿐 아니라 여성정치세력화를 위해서 전략적으로 지역 활동 등으로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여성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지만 기존의 남성 정치와 다른 롤모델을 개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유력한 여성 광역단체장 후보로 꼽혔던 홍미영 전 인천 부평구청장도 인천시장 예비 후보 경선 과정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홍 전 구청장은 "나도 차라리 남자 정치에 편승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지역위원장한테 충성을 바치면 됐을까 하는 잘못된 생각이 든다"며 "조선희 씨가 쓴 <세 여자>를 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여성 혁명가들이 부딪힌 유리 천장의 두께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하다"고 꼬집었다.
홍 전 구청장은 인천광역시장 경선에 지역 시민들과 여성계 그리고 여성 정치인들이 여성전략공천을 촉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직적인 비난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50대 남성뿐 아니라 '젊은 아재'들이 '여성계 지지받는 후보를 뽑으면 거세를 당하기 때문에 탈당하겠다'고 SNS에 댓글을 달았다"며 "SNS댓글을 통해 '페미질 하지 말아라'. '여성계 지지받았으니 메갈후보'라며 조직적으로 비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홍 전 구청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여성 할당과 전략공천이 늘어나야 한다"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는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대통령 말처럼 등골이 서늘해지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희 정의당 인천시당 비례대표 당선자는 "기존 정당이 여성을 공천하지 않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래도 되니까'라는 간단한 이유"라며 "정치판의 남성연대는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공고하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동안 인천 여성회에서 활동하다 여성 정치 세력화를 위해 출마했는데 전쟁터에 있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여성이 과반인 국회를 보고 싶다"
'아재'들의 정치판에서 "시건방진" 표정을 짓던 여성 후보가 있었다. 한 유명 변호사는 이 후보의 선거 벽보를 두고 "시건방지고 오시한 눈빛",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로 서울 27개 지역에서 이 후보의 벽보가 사라지거나 눈 부분이 파이는 등 훼손됐다. 이 후보는 바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꿈꾸는 녹색당의 서울시장 후보였던 신지예 씨다.
그는 "매일 아침 선거 벽보가 훼손됐다는 제보를 받았고 '쇠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싶다', '칼로 가슴을 도려내고 싶다'는 등 폭력적인 메시지도 받았다"며 "저의 그런 상황들로 인해 오히려 왜 한국 사회에 성평등이 필요하고 페미니즘 정치인이 필요한지 알려드리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신 씨는 여성공천 관련 공천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공천제도 하에서 과연 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며 "공천은 소수 후보를 인터뷰해서 발탁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주로 남성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맡는 제도의 가부장적인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동네 구의원 후보가 있는데 그분은 구청장 후보의 골프 강사였다"며 "구청장의 인맥을 타고 온 기성 정치의 카르텔이 이어지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신 씨는 페미니스트 후보로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꿈꾼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에서 여성이 과반인 모습을 정말 보고 싶다"며 "'구의원 후보부터 시작하지 그랬냐'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무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멀리 돌아가겠지만, 훨씬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녹색당 서울시당 운영위원장으로서 시당을 꾸려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페미니스트 정치를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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