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パチンコ)는 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도박 게임이다.
지난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 전역에 1만 7000여개 업소에서 연간 매출액 약 29조 500억 엔 (약 400조 원), 종업원 수 44만 명에 달하는 거대 산업이다.
파친코를 즐기는 일본인은 적게는 1700만에서 많게는 35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매년 11월 14일을 파친코의 날로 정해 축하할 정도로 파친코는 ‘국민 오락’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파친코 매거진, 필승 파친코 팬, 파친코 필승 가이드 등 파친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단행본과 잡지만도 수십 종이다. 인터넷에는 각종 동호회와 연구회가 넘쳐나고, 파친코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도 있을 정도다.
특히 일본의 파칭코 점포 경영자 중에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으로 한창우씨가 운영하는 '마루한'이라는 파친코 회사다.
연매출 20조 원을 올리는 마루한은 파친코 업계의 1인자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맨주먹으로 성공하기 위해 16세의 어린 나이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진출한 그는 마침내 일본 재계 7위로 갑부로 등극하며 가장 성공한 재일교포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장재국(가명·81)은 일본에서 태어나 조센징의 설움을 딛고 파친코 사업으로 수천억 원대의 갑부로 성공한 사람이다.
1964년 도쿄 하계올림픽을 2년 앞둔 1962년, 그는 24세의 나이에 도쿄에서 파친코 사업으로 성공한 삼촌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하면서 파친코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에게 삼촌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에 파친코 영업구역을 맡겼다.
승부사 기질이 뛰어난 그는 싸움이든 경쟁이든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홋카이도의 중심도시 삿포로에서 영업사원 생활 2년여 만에 파친코 영업 1인자로 자리를 잡았다.
도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도시 삿포로는 그에게 새로운 터전이 되었고 그는 발군의 파친코 영업실적을 바탕 삼아 마침내 삿포로에 정착하기로 하였다.
그의 회고.
“삼촌의 파친코 회사 영업사원으로 홋카이도 지역을 맡았다. 도쿄에서 가장 먼 곳이었지만 불만이나 불평 없이 열심히 영업을 해나갔다. 선배들이 나보다 파친코 기계를 1대라도 많이 팔면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주간과 월간 단위로 목표를 세워 어떤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하는 오기를 다졌다.
싸움을 해도 아무리 덩치가 큰 사람에게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스타일이었다. 장사도 마찬가지였다. 오기를 가지고 영업을 한 결과 파친코 영업사원 2년여 만에 회사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사원이 되었다.”
삿포로에서 파친코 영업사원 4년이 지나자 자신이 파친코 영업장을 차려 직접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삿포로에서 인맥을 다진 그는 시내 중심지에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땅을 산 뒤 은행융자를 받아 100대 규모의 파친코를 갖춘 파친코사업을 본격 적으로 시작하였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는 1년 만에 새로운 파친코 가게를 새로 내는 사업수완을 보였다.
삿포로에서 파친코 사업을 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삿포로는 세계적인 겨울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시규모도 덩달아 커졌고 그의 파친코 사업도 승승장구했다.
파친코 사업 10년 만에 수백억 의 재산을 모은 그는 다시 삿포로 중심지의 5층 상가건물을 인수한 뒤 리모델링을 통해 5층 건물 전체를 파친코 영업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5층 건물 전체를 파친코 영업장으로 만드는 일은 삿포로는 물론 일본 최대 도시 도쿄에서도 전혀 시도하지 않은 최초의 일이었다.
그의 회고담.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는 홋카이도의 삿포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파친코에 열광했다. 남편을 출근시킨 가정주부는 물론 젊은 청소년과 직장인들도 파친코 게임을 즐겼다. 도박을 금지한 섬나라 일본에서도 삿포로 지역의 사람들은 파친코를 더 좋아하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삿포로에서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 파친코 사업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파친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삿포로에서 파친코 사업 10년 만에 수백억 원을 벌어들였다. 욕심이 생긴 나는 5층 상가건물을 구입해 건물 전체를 파친코 영업장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당시 빌딩 전체를 파친코장으로 만든 것은 도쿄에서도 시도한 일이 없는 일이었다. 당시 5층 건물 전체에 파친코 기계 750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파친코 사업으로 연간 수백억 원을 벌어들였다.
사업을 하면서 그는 골프를 시작했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탓에 억대에 달하는 스포츠카와 벤츠를 구입하고 300평의 부지에 고급 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잘 나가는 재일교포로 성공하였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대한민국은 1979년 10.26사태와 12.12로 신군부가 집권을 장악하던 시기인 1980년 6월 일본 국세청이 그의 파친코 영업장과 사무실,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기 때문이다.
장씨의 회고담.
“당시 파친코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매월 수십억 원의 순이익을 볼 정도였다. 300평이 넘는 대저택에 고급 외제승용차를 3대나 굴리고 골프여행을 즐기면서도 세금은 쥐꼬리만큼 납부했다. 당시 나의 골프실력은 싱글 수준에 달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국세청에서 탈세를 의심하고 무려 50명이 넘는 세무공무원들이 파친코 영업장과 사무실, 자택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그러나 매출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에 일정 액수의 세금을 추가로 납부하면서 국세청의 세무사찰은 무사히 넘어갔다.”
국세청의 세무사찰이 마무리된 뒤 재일교포 사업가이면서 골프 친구였던 한 사업가가 대한민국 전두환 정권에서 골프대회가 열린다며 함께 참석할 것을 권했다.
당시 일본의 유명 골프대회에 출전해 챔피언에 오를 정도로 발군의 골프 실력을 갖춘 그는 머리도 식힐 겸 대통령배 골프대회에 참가했다.
1980년 9월 23일부터 24일까지 1박2일간 당시 국내 최고의 골프장으로 알려진 안양컨트리클럽에서 열렸지만 정치적인 골프대회였다.
그러나 그는 안양골프대회 참석 때문에 카지노에 중독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는 오랜만에 한국에 나온 김에 추석명절을 고향에서 지내고, 일본으로 귀국하려고 생각하였는데 함께 간 친구가 워커힐호텔에 함께 동행을 제안했다.
“장사장! 워커힐에 가서 며칠간 쉬다가 일본에 들어가자고. 워커힐은 재미난 놀이도 있고 우리가 즐길거리가 많은 곳이야.”
생전처음 워커힐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찾아간 곳은 호텔지하에 위치한 카지노장이었다.
화려하고 현란한 분위기에 친절한 서비스, 게임테이블에서 베팅을 하면서 카드를 받는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불과 2시간 만에 블랙잭으로 100만 원을 땄다.
그런데 함께 간 재일교포 친구는 200만 원을 잃었다며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운이 좋게 100만 원을 딴 그는 친구가 잃은 돈 200만 원을 자신이 따주겠다며 호기를 부리며 블랙잭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했다. 하룻밤을 지내면서 돈을 따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가져온 돈 5000만 원까지 몽땅 카지노에 헌납하고 말았다.
열이 받은 그는 당시 서울 신탁은행 본점에 예치했던 1억 원을 몽땅 찾아와 베팅했지만 1억 원을 탕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일을 넘지 못했다.
승부사 기질이 누구보다 강한 그는 뚜껑이 열렸고 홋카이도 본사에 연락해 1억, 3억, 5억, 10억 원씩 송금을 받은 결과 1주일 만에 50억 원을 모두 날리고 말았다.
50억 원이라는 거금을 날린 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이런 상태로는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지노 도박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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