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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한일 과거사 갈등의 배후"

<시론> '노병'의 '정의롭지 못한 역사관' 알아야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정치적 판단의 문제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말한 대로 대미 관계를 고려해 그냥 두자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외교적 사안 이전에 국내 문제다. 이 땅의 보수-진보 간 상징싸움의 하나다. 외국인 장군의 동상이라는 상징적 보루를 놓고 벌이는 진지전인 셈이다. 결국 양측간 힘겨루기에 의해 결판이 날 공산이 크다.

어찌되든, 이 참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 자유공원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이 아니라 맥아더란 사람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맥아더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이 제기된 것은 주로 한국전쟁 때 그가 한 일 때문인 듯하다. 이 부분은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어느 측면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전시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논란은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 없이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맥아더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이 있다. 아직까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 있다. 그것은 맥아더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한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맥아더는 한일간 과거사 갈등의 토대를 만든 장본인이다.

사과와 반성, 배상을 요구하는 이웃 나라들의 외침에 아랑곳 없이 망언과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일본. 그러면서도 소위 '아시아의 리더국가'로서 UN 상임이사국이 돼야 한다는 일본. 전후 일본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게 맥아더다. 그는 일본 우익의 대부이기도 하다. 일본의 정치구도와 지배층이 패전 후 청산 절차 없이 우익 중심으로 판이 짜이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맥아더란 얘기다.

***맥아더는 일본 우익의 '대부'**

맥아더는 1945년 미주리함에서 일본왕(소위 천황)의 항복문서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1951년 퇴역할 때까지 6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도쿄에 주둔한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식민지 총독 이상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무관의 황제(Uncrowned Emperor)'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의 전기 제목도 'American Caesar'다.

미 태평양사령부 및 연합군사령부의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주요 임무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전범재판 등 전후처리, 둘째 전후 재건 등 일본 통치, 셋째, 대소련 방어태세 구축 등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수행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긴밀히 연결된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명운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안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맥아더는 대단히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만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우선 패전국 일본의 전후처리를 관장하면서 맥아더는 제대로 된 '청산'을 회피하고 오히려 전전(戰前) 질서를 온존시켰다. 전후처리의 핵심은 전범재판이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해 아우슈비츠 못지 않은 만행을 저지른 책임을 엄중히 묻고 책임자를 처단했어야 했다. 최고 전범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일본왕이다. '천황'의 어명으로 전쟁이 수행되었고 '천황 만세'를 외치며 앳된 병사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왕을 철저히 보호했다. 전범으로 기소하기는커녕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것조차 막았다. 소련 중국 등 다른 승전국들은 아예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거부했다. 내건 이유라곤 오로지 "일본을 잘 다스리려면 왕실을 지켜줘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국식 공리주의인가. 역사는 어디 가고, 편리함만 찾는가. 대단히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다른 전범들에 대한 재판 및 처리도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A급 전범 중 7명에게만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나머지 18명은 모두 석방됐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 등 관련자 전원은 아예 기소 면제해주었다. 실험 자료를 미군측에 넘겨주는 댓가였다.

면죄부를 받은 전범들은 그 뒤 정계 등으로 들어가 일본 보수우익 세력의 중추로 활약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기시 노부스케다.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차관 겸 국무대신으로 군수물자 조달을 담당해 A급 전범으로 기소됐던 그는 맥아더에 의해 석방된 뒤 정계에 진출해 나중에 수상(자민당)이 되었다. 미 CIA는 그에게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지원해준 것으로 밝혀졌다.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이 독일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6년간 일본을 통치하면서 맥아더가 가장 힘쓴 것 중 하나는 진보 세력을 억누르고 보수우익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전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선 전전 질서 청산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욕구가 컸다. 전후 처음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한 것도 그런 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사회 정책은 그런 일본 국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초기에는 노동3권 보장, 농지개혁, 복지제도 도입 등 당시로선 꽤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노동탄압 등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보수체제가 더욱 공고화된다. 제국주의 일본의 주류세력이 전후에도 그대로 존속되면서, 자민당과 정통관료 세력, 그리고 전쟁으로 치부한 대기업의 3각동맹 구도가 일본사회의 지배체제로 견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틀은 그 이후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의 권력구조가 이렇듯 전후 청산 절차 없이 보수우익 일색으로 이어지다보니, 과거사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서도 독일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게 됐다. 독일은 2차대전 후 나찌 관련 세력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지배구조를 형성했다. 과거사 문제로부터 자유로우니 사죄와 반성, 배상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지배층의 교체 없이 그대로 이어졌으니 사죄와 반성을 제대로 할 턱이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 혹은 자신들의 직속 선배, 선조들이 한 일이므로 자랑스러워 하면 했지(망언, 역사왜곡, 신사참배 등),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사죄, 배상 등에 대한 거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독일과 일본이 차이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그 원인구조를 만든 이가 바로 맥아더이고….

***맥아더의 극우성향, 미 대외정책의 부도덕함과 맞아떨어져**

맥아더가 이렇듯 일본 우익의 사실상 대부가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그의 정치적 성향이 원래 극보수였다. 퇴역후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에도 가장 보수적인 진영의 주자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미국 정부의 동아시아전략이다.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전통적으로 일본 중심이다. 이 점은 20세기 초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때(가쓰라-태프트 밀약)부터 21세기초 현 부시정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된다. 특히 2차대전 직후 소련의 영향력이 급팽창하자 미국은 일본을 대소련 반공(反共)의 아시아 전략기지로 삼고 적극 후원하게 된다. 일본의 경제부흥을 지원하는 한편 정치사회적으로는 좌익을 억누르고 우익을 음양으로 후원했다.

맥아더의 정치성향은 기본적으로 워싱턴의 아시아전략과 코드가 통했던 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부도덕함도 그의 부도덕함과 맞아떨어졌고. 어쨌든 그 결과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아시아의 중심국가를 자처하며 UN 안보리 상임이사국까지 넘보게 되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일인가. 많은 나라를 침략해 고통을 안겨준 일본을 단지 미국의 전략적 필요 때문에 특별 지원해 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만든다는 게…. 그로 인해 동아시아의 질서는 엉망이 돼버렸고 전후 60년이 넘도록 과거사 문제로 갈등이 들끓게 된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현해탄 너머에…**

맥아더는 미 웨스트포인트(육사) 역사상 기록에 남는 수재로 유명하다. 반면, 수재들이 흔히 안고 있는 치명적 약점을 드러낸 전형적 표본이기도 하다. 요컨대 '재승박덕'이다. 여기서 '덕'이라 함은 정의와 인간애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뜻한다. 올바른 역사의식 혹은 세계관은 정의의 핵심 요소이자 준거틀이다.

맥아더는 대단히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식을 가진 군인이었다. 그 결과, 그가 만든 현대 일본의 지배구조가 정의롭지 못하게 됐고, 아시아의 질서가 정의롭지 못하게 됐으며, 그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 우리 민족, 그리고 아시아의 민중들은 오늘도 분노와 한숨을 삼켜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병은 아직도 죽지 않고 인천에, 그리고 현해탄 너머에 살아 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없애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둬야 하는가. 그건 우리의 문제의식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선택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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