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거의 긴 여정이 지난 15일에 종결됨으로써 새로운 당을 이끌어 갈 지도부 구성이 일단락됐다. 민주통합당의 탄생과 지도부 경선은 몇 가지 측면에서 기존 민주당 전통의 변화를 의미한다. 첫째, 진보화다. 창당 과정에는 기존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가치와 노선을 추구하는 인물과 세력들이 동참했고, 당 강령과 정책방향에서도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노동연대, 시민주권 등 새로운 강조점이 등장했다. 개혁적 국민정당이 진보적 의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됐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이 힘 있게 '진보적'인 자유주의 노선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현재 일시적으로 확장된 당 지지층의 상당 부분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둘째, 개방화다. 당 조직과 선출제도, 의사결정 구조에서 개방화가 두드러진다. 구(舊)민주당 당개혁특위에서 계속 논의된 바탕 위에서, '서포터'라 부를 수 있는 비당원 일반시민의 참여를 대폭 넓혔다. 또한 소통과 동원 기반이 폐쇄적 조직에서 개방적 네트워크로 중심 이동을 했다. 셋째, 전국화다. 당 지도부와 지지층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서울·수도권과 영호남을 포괄하는 전국정당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일각에선 '친노', '영남 진보'의 약진으로 읽기도 하지만, 민주통합당의 지역적 특성은 지도부 인사의 출신지역이 아니라 지지층의 지역 분포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민주통합당은 서울·수도권을 중심으로, 전통적 호남 기반과 미개척지인 영남을 포괄한다고 봐야 한다. 만약 당 내에서 호남 지역주의가 발흥하거나 영호남 갈등 양상으로 가면 가장 핵심인 서울·수도권 지지가 빠져나갈 것이다.
이상의 변화는 구(舊)민주당의 낡은 관성과 새로운 시대적 현실 간의 불일치를 해소한, 일종의 '확장을 통한 조정'으로 읽힌다. 기존 민주당의 당원 기반은 호남 출신 혹은 거주자, 50대 이상, 자영업자가 다수를 이뤘지만, 지난 몇 년 간의 여러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지층은 이미 서울·수도권, 20~40대, 학생·화이트칼라·블루칼라 직장인들로 중심 이동했다. 이 사회세력에겐 민주냐 진보냐, 당원이냐 비당원이냐, 호남이냐 영남이냐를 놓고 갈라지고 싸우는 게 무의미하다. 민주통합당은 {(민주당+친노)+시민참여}라는 새로운 틀로 21세기 정치 환경을 명시적, 공식적으로 반영했다.
2.
이번 당대표 및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는 위와 같은 변화를 입증하는 몇 가지 가시적 현상이 관찰된다. 이번 경선은 모바일 투표와 투표소 투표를 결합하는 방법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비당원인 일반 시민들에게 투표권을 완전 개방했다. 그러한 개방과 혁신의 결과, 경선 선거인단은 무려 79만 명에 이르렀다. 물론 79만이 민심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2007년 이명박 후보가 얻은 1,148만 표,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얻은 1,201만 표에 비하면 79만은 지극히 적은 숫자다. 또한 이 선거인단은 전체 민심의 분포를 대표하는 '평범한' 투표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특별한' 투표자들이라는 게 오히려 중요한 포인트다. 이들은 일상적 관계망과 온라인, SNS 공론장의 여론을 주도하는 '1당 100'의 확장성을 갖기 때문이다. 옛날 표현으로 하면 '장교, 간부'(그람시), 요새 표현으로 하면 '커넥터'(글래드웰), '허브'(바바라시)다. 일찍이 그람시는 정치에서 장군, 지도자보다 중요한 게 장교와 간부라고 했다. 이 '특별한 일반시민'들의 선호와 욕구는 민주통합당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충성스럽지만 소극적인 지지자는 1인 1표로 끝난다. 비판적이지만 적극적인 지지자는 1인 100표다.
▲ ⓒ프레시안(최형락) |
3.
민주통합당이 어떤 위험과 과제를 갖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시야 속에 그것을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40년에 가까운 권위주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엔 큰 두 정당적 흐름이 이어져왔는데, 그 하나가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흐름이라면, 다른 하나는 민주당-평화민주당-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민주당으로 이어져 온 개혁적 자유주의 흐름이다.
이처럼 '정치사적으로는' 대체로 연속성을 갖는 큰 줄기의 흐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사적으로는' 수많은 정당들이 생겼다 없어지는 단절과 격변의 역사가 보인다. 이런 잦은 당명 변경과 이합집산은 한국정치의 '변형주의적'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람시는 정치개혁운동의 외양을 띠고 대중을 동원하지만 실제로는 기득권 세력의 기존 정치구조를 강화하는 정치를 '변형주의'라고 명명했는데, 일찍이 최장집은 이를 한국정치의 한 특징으로 통찰한 바 있다. 당명도, 인물도 바뀌고, 혁신의 수사가 넘쳐나지만, 정작 정치는 변하지 않고 이제까지 소외됐던 사회계층들은 여전히 소외된 채로 남는다.
언제 그런 변형주의 정치가 고조되는가? 기존 권력구조와 정치질서가 위기에 처했을 때다. 많은 제도적 구조가 그러하듯 정치제도 역시 역사적 관성을 갖는다. 그 관성이 도전받는 순간을 학자들은 '위기', '전환점', '결정적 전기(轉機)', '불확실성의 시간' 등으로 부르는데, 변형주의 정치는 그런 전환점에서 관성을 지속시키는 정치기술의 하나다. 현재 한국 제도정치 전반의 정당성 위기 상황에선 그와 같은 변형주의 정치가 진보, 보수 진영 모두에서 재현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민주통합당은 한국정치에 고질적인 기만적 변형주의 정치를 다시 한 번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낡은 인적, 조직적, 정책적 관성을 깨뜨리고 넘어설 것인가? 이것이 민주통합당의 미래를 주시하며 던지게 되는 중요한 질문이다.
4.
민주통합당이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이 되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인적 쇄신을 위한 합리적 교육·검증·선별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몇몇 지도부 인사의 얼굴을 바꾸는 것으로 '당'의 혁신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당은 현대사회의 가장 거대한 정치조직이다. 유능하고 진정성 있는 신진 정치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하향공천과 인기투표를 넘어서는 종합적 평가·선출 시스템을 고안해야 한다.
둘째, 민주당의 자유주의적 전통과 새로운 사민주의적 가치를 결합하는 실체적 정책노선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국 정당의 당개혁 논의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가 당원·공천제도라면, 가장 공허한 게 바로 가치·강령·정책 문제다. 전자는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데 반해, 후자는 멋진 말과 아이디어를 끌어다 예쁘게 화장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체 없는 수사(修辭)가 아니라, 탄탄한 통치구상을 국민들에 제시하고 승부를 걸어야 한다.
셋째, 시민들과의 정치적 소통을 활성화시키는 온·오프라인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정당과 시민의 소통은 지도부 선출권을 부여하는 정도에 그쳐선 안 된다. 보다 원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시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충분히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통합당이 그런 숙의정치를 위한 플랫폼을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만큼, 시민들은 이 당의 미래에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관심과 참여를 보여줄 것이다.
이런 여러 실질적 개혁이 없다면, 민주통합당의 진보화, 개방화, 전국화 외양은 결국 변형주의 정치의 또 하나의 버전, 국민기만극으로 판정될 것이다. MB정부 심판론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의 실체를 보여주길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5.
한국 정당정치가 변형주의적 꼼수를 넘는 혁신을 이루려면 정당들의 노력 못잖게 시민사회 세력이 제 자리를 찾는 게 또한 매우 중요하다. 민주통합당의 창당과 지도부 구성 과정에서 시민사회 세력의 단계적 이탈과 탈락이 일어났다. 이것의 의미를 잘 읽어야 한다. '혁신과 통합', '시민통합당', '민주통합당'의 건설 과정에서 '백만민란', '내가꿈꾸는나라' 등 소위 시민정치운동 조직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밖에도 다수의 시민사회 리더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최종적으로 지도부 입성에 성공한 사람은 처음부터 정치운동에서 출발한 문성근씨 뿐이다.
시민사회 세력은 몇 단계에 걸쳐 정치적으로 주변화됐다. 1단계로 '혁신과 통합' 창립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독립성을 중요시하는 다수의 시민사회 리더와 활동가들이 이탈했다. 2단계로 '내가꿈꾸는나라'의 공동대표인 김기식 씨가 예비경선에서 탈락했고, 3단계로 YMCA 사무총장 출신의 이학영 씨가 본선에서 탈락했다. 시민사회에선 프로지만 정계에선 터가 없는 탓이다. 이런 여러 문제와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많은 에너지를 정당 정치일정으로 몰고 들어간 잘못된 실험들에 대해 냉철한 평가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 다시 힘내서 총선에선 잘 해보자는 식으로 덮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시민사회 세력의 직접적 정계 진출은 예외적인 몇몇 인물들에 한해서만 승산이 있으며, 시민정치는 정당적, 정파적 이해관계를 가로질러 사회적 이슈를 정치 의제로 폭발시킬 수 있을 때 본연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시민사회 세력이 정당운동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시민사회 리더들이 승산 없는 선거에 대거 출마하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정계 진출이 곧 '시민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개념에 대한 '매우 한국적인' 오해이자 왜곡이다.
시민정치의 본연의 의미는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고 광대한 네트워크로 연대하여 정당·정부·정책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시민운동 출신의 몇몇 인물이 시장, 국회의원, 당 최고위원에 당선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할 사람은 정치하는 것, 아무 문제없다. 문제는 시민사회의 인적, 조직적, 재정적 자원을 잠식하고 선거운동 조직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이 시민정치에 힘입어 당선될 수는 있지만, 그의 당선 자체가 시민정치는 아니다. 시민정치에 열려 있는 정당정치는 있을 수 있지만, 정당과 정치인이 주도하거나 이를 지향하는 시민정치라는 건 모순이다.
현재 한국에선 한편으론 시민들의 자생적 정치에너지가 정당정치를 뒤흔들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시민사회단체의 인적, 조직적 자원들이 정당정치의 소용돌이로 흡입되어 들어가고 있다. 한명 한명 시민들이 모두 정치인이 되지 않고서도 정치의 주인으로 우뚝 서고 있는 지금, 왜 시민운동가들은 너도나도 정치인이 되려고 난리들인가? 시민사회의 정치에너지가 제도정당들과 건설적이고 역동적인 긴장관계를 가질 수 있을 때, 정당정치의 발전 역시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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