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3여 년에 걸친 만남, 그 속에서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는 "나는 민중의 반걸음만 앞서 간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최근 발간된 강상중 교수의 책 <반걸음만 앞서가라>(오근영 옮김, 사계절 펴냄)에는 '리더십'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있다.
▲ <반걸음만 앞서가라>(강상중 지음, 오근영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
그렇다면 왜 '한걸음'이 아니라 '반걸음'일까? 책에는 정치인이 대중과 호흡하는 방식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고민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정치가는 눈앞의 상황을 잘 살피면서 국민과 소통을 해야겠지요. 그래서 지금 정치가로서, 리더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보다 '반걸음 앞'에서 가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걸음, 세 걸음 앞으로 나서면 국민과 마주 잡고 있는 손이 떨어질 것이고 그들은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앞서가면 안 되는 겁니다. 내 생각에 우수한 혁명가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무 앞질러 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민과 나란히 가서도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리더라면 역사와 승부하라"
책에는 올해 4월 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에서 열린 대담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반걸음 리더십' 외에도 '역사와 승부하라',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는 세 번 생각하라'는 지침을 자신의 50년 정치 인생의 철학으로 삼아왔음을 밝혔다.
"'역사와 승부한다'는 것이 내가 뭔가 결단을 할 때 하나의 기준이 되어 온 측면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결단을 내릴 때 역사와 승부하지 않고 현재에 승부를 겁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의 이익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나는 막다른 상황에서 결단을 강요당했을 때에도 현실의 이익보다 훗날 내가 역사에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점을 더 생각했습니다."
"정치가의 화제를 들어보면 대개 '오늘 일'만이 화제입니다. 정치가는 '망원경'처럼 사물을 멀리 넓게 봐야 하고 동시에 '현미경'처럼 세밀하고 깊이 보기도 해야 합니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학자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이 두 가지를 겸비하지 않으면 진정한 정치가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자는 김 전 대통령이 '현재'와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승부했기에, 독재 정권 시절 야당 지도자로서 온갖 수모를 당했어도 집권 이후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김 전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에 '적'은 없다. 다만 '라이벌'이 있을 뿐"이라며 자신과 과거 정권들과의 관계에 대한 소회를 털어 놓았다.
대담에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뿐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도 과거에 나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지만, 그들에게도 나는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정치 보복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피로 얻어냈기 때문"이라며 "민중의 고통을 대신해 지금의 한국이 있다. '보복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묻는 강 교수의 질문에 "올바른 언론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키기고 존중하지만, 옳지 않은 언론에 대해서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며 운을 뗐다.
그는 대통령 재임 당시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급하면서 "미디어의 힘은 강력하므로 보복이 예상됐고, 이 때만은 나도 주눅이 좀 들었다"면서도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고, 지금 내가 여기서 타협하면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지금 필요한 것은 'CEO형' 리더가 아니라 '반걸음 앞선' 리더"
저자 강상중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의 대담을 토대로, "'카리스마형 리더'나 'CEO형 리더'가 아니라 유연한 역사의 지혜를 갖추고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책의 다른 장에는 일본의 현실 정치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도 담겨있다. 이 책의 3장에서 그는 일본의 정치 현실을 언급하며 왜 55년 동안 자민당 정권의 일당 지배가 가능했는지, 그리고 왜 오랜 집권 끝에 자민당 정권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분석한다.
분석의 중심에는 정치인들의 리더십이 있다. 저자는 알맹이 없는 구호와 제스처로 국민의 인기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변화하는 현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점을 '반걸음 리더십'을 통해 강조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정치에 필요한 리더십을 얘기하지만, 막상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를 비롯한 '쇼맨십 리더십'에 대한 비판을 읽다보면 현재 한국의 현실과도 여러 점이 겹쳐진다. '반걸음' 앞서가든 혹은 여러 걸음 퇴보하든, 어쨌든 한국에서도 리더십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행해져야 할 시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강상중 교수 인터뷰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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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교수의 '청춘 독서 노트' : <청춘을 읽는다> <반걸음만 앞서가라>와 나란히 출간된 <청춘을 읽는다>(이목 옮김, 돌베개 발행)는 강상중 교수의 성장사와 시대에 대한 성찰을 담아 낸 그의 '청춘 독서 노트'다. 재일한국인 2세인 저자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방황하던 젊은 시절, 그를 지탱하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산시로>는 대학 진학을 위해 도쿄로 갔던 강 교수의 젊은 시절과 겹쳐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전쟁의 승리에 들뜬 근대 일본의 불안한 미래를 예감했듯, 저자는 그의 책을 읽고 거품 호황에 흥청거리는 도쿄를 불길하게 바라봤다. 군사 독재 시절 한국의 민주화 운동 소식을 15년에 걸쳐 연재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두고 저자는 "나를 단련시킨 기록"이라고 고백한다. 지명관 전 한림대 교수가 이 글을 연재하고 있을 당시인 1972년 저자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한국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저자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통해 삶의 의미와 방법론을 고민하게 됐고, <일본의 사상>을 접하면서 세상을 대하는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됐다고 회고한다. 독일 유학 시절 접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저자에게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게 한 책이다. 모두 '청년 강상중'이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게 한 책들인 셈이다.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을 젊은 시절 끊임없는 독서 습관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강상중의 청춘 독서 노트'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나 한편으론 충분히 사회적인 물음과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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