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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기자의 양심은 단심제인가?"

[참여사회연구소 시민정치시평]<21>판사의 양심, 기자의 양심

'최은배 판사 이럴 줄 알았다'
'정치 편향' 최은배 판사의 판결 신뢰할 수 없다'
"맘대로 말할 거면 법복 벗어라"

앞의 두 개는 12월 10일자 <조선>·<동아일보>의 사설, 나머지 하나는 12월 14일자 <중앙일보> 기사 제목이다. 12월 8일 인천지방법원 제1행정부는 민주노동당에 후원금을 냈다는 이유로 7명의 교사들을 해임 또는 정직 처분한 것은 위법하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조선>·<동아일보>가 사설에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위와 같은 판결을 한 재판장은 최은배 부장판사다. <중앙일보> 기사는 12월 13일 인천지방법원 앞 사거리에서 열린 '정치판사 규탄집회'에 참가한 인천지역 시민단체 대표가 했다는 말을 따옴표로 인용하여 기사 제목으로 삼고, 최은배 판사와 김하늘 판사의 사진을 나란히 올렸다.

우린 너희들을 보고 있다 - "A판사 너 딱 걸렸어"

▲ 최은배 판사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
올해 이 말로 유명해진 사람은 두 명이다. 한 사람은 '친미'라고 평가받은 분의 형님인 이상득 의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최은배 판사. 공교롭게도 이 말이 등장한 공간마저 하나는 인터넷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Wikileaks), 또 하나는 페이스북(Facebook)으로 모두 '온라인' 공간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 말의 원본 "이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 친일(President Lee was pro-U.S. and pro-Japan to the core)"이라는 말을 '형님'으로부터 들은 사람은 주한 미국대사인 알렉산더 버시바우, 그 복제품인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관료"라는 글을 본 사람은 330명의 페이스북 '친구들'이라는 사실.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최은배 판사가 위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아무리 빨라도 11월 22일 오후 또는 저녁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가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최루탄 속에서 통과시킨 것은 11월 22일 오후 4시를 넘긴 시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조선일보>는 바로 다음날인 11월 23일 최판사가 올린 글에 대해 취재를 했다고 한다. 취재 결과는 11월 25일 <조선일보> 1면에 실렸다. '단독'이었다. 취재 기자가 최판사 페이스북의 '친구'였나?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최판사의 페이스북에 그런 글이 올라간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법원 판결문은 기자들에게 배포되기 때문에 담당 판사를 즉시 취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그게 아니지 않는가?

해당 기사는 최판사의 실명을 거론하는 대신 "우리법연구회 간부인 A부장판사"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최판사의 글에 '좋아요'라고 공감을 표시한 "다른 우리법연구회 회원인 B부장판사"의 나이와 연수원 기수를 언급하고, 마무리 부분에 가서도 '우리법연구회'와 관련된 사실을 적고 있다. 한 마디로 "A판사"는 <조선일보> 취재 기자에게 "딱 걸린 것"인데, 중고등학교 선도부도 아니고 도대체 기자가 판사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어찌 그리 빨리 포착했을까? 답은 둘 중에 하나다. 취재기자가 '귀신'이거나, 아니면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나'

판사 길들이기? - "A판사 너 그럴 줄 알았어"

2011년, 올해 최고의 유행어를 꼽는다면? 단연 "나꼼수"다. 때론 치밀한 '이론'보다 '무학(無學)의 통찰'이 더 빛날 때가 있으니, 자칭 대한민국 '대표 꼼수'의 무학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 '좌·우의 원형질'을 파악하려면 원시의 사바나(savanna) 시절로 돌아가야 한단다. 원시 사바나의 공간은 공포의 정글 지대였다. "저 정글에서 튀어나올게 뭔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右)는 그 공포에 압도되어 자기만이라도 살려고 반응하는 것"이라면, "좌(左)는 그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공포의 몫을 줄여서 해결하려 했다"는 것. 한마디로 우의 원형질이 '본능적 반응'이라면, 좌의 원형질은 '논리적 대처'였다는 말씀.(김어준. 『닥치고 정치』, 44쪽)

앞에 인용한 <조선>·<동아>의 사설, <중앙>의 기사를 읽고 있노라면, 일종의 '본능적 반응'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능적 반응이 동원하려는 대상은 '두려움' 혹은 '불안'이다.

「징계를 받은 교사들은 초등교사 6명, 중학교 교사 1명이다. 이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민노당식의 왜곡된 정치 성향을 주입하면 학생들의 머릿속이 무엇으로 가득하겠는가. (중략) 최 판사 같은 판사가 법원에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면 국민은 불안하다.」(조선일보 2011. 12. 10. 사설)

'두려움의 동원'은 본능적 '물어뜯기'를 낳는다. 물어뜯기가 '본능'인 이상 풀숲에서 튀어나온 대상이 사자인지 토끼인지를 가리지 않는다. 2008년 촛불집회 관련 판결 이후 결국 법복을 벗어야 했던 박재영 판사, PD수첩 무죄 판결, 강기갑 의원 무죄 판결, 민주노동당 국회농성 당직자 공소기각 판결 이후 있었던 담당 판사들에 대한 언론의 집요한 공격, 여기에 어디 '논리'가 개입할 틈이 있었는가?

솔직히 말하자. 법원의 판결이라고 성역이 될 수는 없다. 판결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언론의 권리이자 의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어야 할 표적은 '판사' 개인이 아니라 판결의 '논리' 그 자체여야 한다. 판결의 '논리' 속에 그 공동체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판사 '개인'의 세계관이 들어가 있다면 바로 그 '논리' 자체를 비판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판결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그 표적을 제대로 겨누고 있는가? <조선일보>는 12. 10.자 기사(1면, 'FTA로 나라 팔아' 글 올린 최은배 판사, '민노당 불법당비 교사 징계취소' 판결문 보니)에서 '법조인'들의 말을 인용하여 "판결문이 아니라 정치선언문을 보는 것 같다", "실정법 위반이지만 징계하면 위헌이라는 식으로 판단한 것은 최 판사 스스로 헌재의 역할을 다 해버린 것"이라거나, "공무원의 정치적·표현의 자유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이미 결론을 내린 문제"라고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총 13쪽에 이르는 이번 판결문을 꼼꼼하게 읽어본 '법조인'이라면 위와 같은 비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이번 판결을 한 재판부(이번 판결은 최 판사 개인의 판결이 아니라 인천지방법원 제1행정부 3명의 판사의 판결이다.)는 징계대상이 된 교사들이 형사재판에서 일부 면소,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 처벌의 정도가 벌금 30만 원에서 50만 원 정도로 경미한 점, 공무원의 모든 위법행위에 대해 징계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법리에 따라 해임·정직의 징계처분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최 판사가 '헌재의 역할'까지 다 해버렸다는 비판은 그야말로 난센스(nonsense)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번 판결은 징계의 근거인 법률 조항을 '위헌'으로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당 규정을 '합헌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번 판결은 문제가 된 국가공무원법 제65조의 '정치운동 금지'의 범위를 문언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위헌이 될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규정을 '함부로 위헌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헌법 정신에 맞도록 조화롭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원칙을 헌법학에서는 '합헌적 법률해석'이라고 한다. 법과대학 1, 2학년 정도면 헌법교과서 맨 앞부분에 공부하게 되는 내용이다.

하나 더 볼까. 최판사의 실명을 제목으로 삼은 12월 13일자 <동아일보> 칼럼은 "최 판사처럼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일부 386세대 법관은 친구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동안 고시공부만 한 것에 대해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질풍노동의 시대에 고시 책에 머리를 파묻었다는 '빚 아닌 빚'을 갚기 위해 뒤늦게 좌파이념에 편승하거나 머리로만 배운 추상적 가치에 매달리는 판사가 있다면 국가사회를 위해 다행일까, 불행일까"를 묻고 있다. 칼럼은 헌법 제103조의 '법관의 양심에 따른 재판' 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 논리의 치밀성은 '우리법연구회'와 최판사 '개인'에 대한 비판 논리의 집요함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칼럼은 "최 판사는 법관의 독립성을 악용해 정치적으로 종북(從北)정당을 비호한다는 의심까지 살만하다"라고 하고 있다. 가소(可笑)!

판사의 양심, 기자의 양심 – 기자의 양심은 '단심제'인가?

'양심' 이야기가 나왔으니 법관의 양심에 대해 사표(師表)가 될 만한 글을 하나 소개한다.

「하나의 재판을 하려 할 때 우리는 이에 필요한 사회적 사실을 수집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검토를 한 후 이것을 다시 종합하여 결론을 얻는 것이며, 그 결론을 토대로 판결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중략) 그러나 재판의 과정은 그러한 분석, 종합이라는 토대의 발견만으로 쉽사리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발견된 결론을 토대로 판결이라는 종말을 맺는 과정에는 수많은 장애가 가로놓이는 것이다. 유혹, 협박 등등,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장애는 사회적 심리강제의 현상일 것이다. 나는 장애 배제에 노력한다. 거기에서는 용기와 결단이 이것을 결정한다.」(『유병진 법률논집, 재판관의 고민』. 4쪽)

1958년 진보당 조봉암 사건의 1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던 유병진 판사의 글이다. 1958년 7월 5일 정치깡패 이정재 등의 시위대는 유병진 판사의 판결에 항의하며 서울지방법원 청사 안까지 난입하여 "9·28 수복 이후 부역자들을 수없이 풀어준 유병진은 이제 조봉암을 간첩이 아니라고 하니 공산판사가 틀림없다. 즉시 축출하라."고 주장했다.(1958. 7. 6. 동아일보, 5면) 유병진 판사는 이 판결을 계기로 재임용에 탈락하여 법복을 벗어야 했다. 유병진 판사의 판결은 2심, 3심에서 번복된다. 2심과 3심 재판부는 '사회적 심리강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의 국가보안법위반, 간첩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유병진 판사의 '고민'과 '양심에 따른 재판'이 옳았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법부의 구성원인 판사들이 선배인 유병진 판사의 '고민', '용기와 결단'에 기초한 '양심'에 따라 재판하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우리 재판제도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심급제도를 기본으로 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최소한 심급을 달리하는 판사들로부터 3번의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법관의 양심은 3심제'이다.

나는 지금까지 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담당 판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맹비난을 퍼부었던 기자들이 그 판결의 최종 결과에 대해 정정 보도나 해명의 기사, 회고록을 쓴 사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묻는다. "대한민국 법관의 양심은 3심제이다. 기자의 양심은 단심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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