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를 띈 타조, 공작, 오리, 청설모, 다람쥐, 토끼 등 섬 곳곳 ‘살아있는 동물원’
흔들림 없이 삶이 지속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분명 신세를 지고 있다는 뜻이다. 식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꽃 사진을 찍어 보냈다. 김선미 「나무, 섬으로 가다」
새로운 만남을 고대하며 섬으로 가는 길은 연애를 시작할 때처럼 설렌다. 무작정 찾아간 남이섬 초입의 나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신록(新綠)을 자랑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남이섬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선 관광안내소를 비롯해 섬 곳곳에 친절한 안내서와 지도를 집어들고, 가능한 한 발길 닿는 대로 걷는게 좋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지도나 식물도감은 가장 나중에 펼펴보는게 좋다.
어렵게 알아갈수록 나무와 꽃들이 더 각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바로바로 물어볼 수 있지만 애써 꾹꾹 참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그럴때마다 이렇게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즐기려고 여행을 시작했다는 생각에 혼자 뿌듯한 마음이 든다. 게으름은 바쁜 일상에 지쳐있는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처음 보는 꽃을 만나면 우선 꽃과 잎, 줄기 등의 특징적인 부분을 사진에 담아두고 느긋하게 나무 주위를 서성거린다.
잎이나 꽃 모양이 특이할수록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하지만 그저 곁에 머물며 느껴볼 수밖에 없다. 간간이 땅에 떨어진 꽃이나 묵은 열매라도 줍게 되면 보물을 얻은 기분이다.
그 많은 꽃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어떻게 할까.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꽃은 없었다. 다만 우연히 만난 꽃과 달리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며 기다린 꽃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나무 아래를 지나다 잎사귀를 갉아먹는 벌레가 땅위로 떨어져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이섬에서는 최소한의 방제만을 하기때문에 자연스레 곤충들이 함께 공존한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는 시기는 기껏해야 한달 남짓. 나무에게 큰 피해를 주는 해충도 있겠지만, 결국 나무에 벌레가 사는것도 남이섬의 생태계의 일부다. 나무 그늘을 조심스레 빠져나오면서 새소리를 떠올리기로 했다.
벌레가 없으면 새도 살 수 없으니까. 나무들을 보라. 눈을 질끈 감고 제 잎사귀를 내어주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고 나무가 속삭인다.
결국 나무 하나를 온전히 아는 일이란 잎사귀와 꽃 그리고 열매를 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곤충과 새들 그리고 땅속 균류까지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나무 한 그루는 작은 우주와도 같다.
이른 봄부터 서둘러 꽃을 피운 나무들에서는 이미 열매가 커가고 있었다. 벚나무에는 버찌가 뽕나무에에는 오디가 영글고, 단풍나무가 복자기는 날개 달린 초록의 열매 안에 씨앗을 키우는 중이었다.
새들에게 미래를 맡기고 싶은 나무는 열매를 향기롭고 달콤하게 만드는 데 정성을 쏟고, 바람에 의지하는 나무는 열매가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꽃이 죽은 자리는 그렇게 나무의 미래가 시작되는 곳이다. 해마다 꽃가기에서 찬란하나 죽음과 치열한 삶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무와 꽃이 계절따라 성장하듯 남이섬에 사는 동물들도 활기를 띄고 있다. 섬 초입부에 있는 타조(남이섬에서는 사고뭉치라 붙여진 별칭 ‘깡패타조’, 일명 ‘깡타’라고 부른다)와 공예원 인근에서 자주 목격되는 공작은 산란기를 맞아 알을 낳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섬 곳곳에 터를 잡고 사는 다람쥐와 청설모, 해뜨는마을에 주로 사는 토끼의 새끼들은 살금살금 먹이를 찾아 다니며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는 오리와 거위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미를 따라 가는 새끼 오리들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5월의 바람은 선선한 강물 위에 노란 송홧가루를 풀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부모님을 따라 섬에 놀러온 아이들처럼 세상의 모든 초록들이 가장 분주해지는 시간. 당신들 덕분에 게으른 내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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