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 제66강은 2018년 6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정문 앞에서 모입니다. 시내버스는 사육신공원 정류장, 지하철은 1호선 노량진 역 1번출구, 9호선 노들역 1번출구를 이용해주세요(사육신공원 02-813-2130).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육신묘-노량진터(배수지공원)-효사정-용양봉저정-상도터널 위-고구동산-중앙대 후문-점심식사 겸 뒤풀이–달마사-서달산 정상-현충원 상도출입문-호국지장사-국립현충원 일부(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임정묘역/애국지사묘역)-현충원 사당출입문-남관왕묘-이수역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한강변의 정자와 서달산 충효유적지>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달마(達磨)가 서쪽으로부터 왔다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이 관악산에 이르러 한 줄기는 동쪽으로 우면산과 매봉산을 지나 봉은사를 품은 수도산에서 봉긋 솟았다가 한강으로 몸을 숨기고,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뻗어 남현동과 봉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까치고개를 지나 숭실대에서 총신대로 넘어가는 사당이고개를 거쳐 서달산에서 힘껏 솟구칩니다.
서달산(西達山)에서 잠시 숨을 고른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반포천 끝자락에 닿아 있는 갯말산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북쪽으로는 비개고개를 지나 십용사기념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서쪽으로는 상도터널 위를 지나 본동사무소 뒷산인 안산에서 도로를 건너 사육신공원이 자리한 봉우리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서달산은 ‘달마(達磨)가 서쪽으로부터 왔다’는 불교의 화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화장산, 공작봉이라고 달리 불리기도 하는데, 화장산은 국립현충원 안에 있는 호국지장사의 옛 이름이 화장사(華藏寺)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공작봉은 국립현충원을 감싸고 있는 산봉우리 정상에서 뻗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공작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은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의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육신의 내력
사육신은 형식적으로는 선양(禪讓)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맞서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의 여섯 분을 꼽고 있으나, 사육신 이외에도 희생된 사람은 권자신, 김문기 등과 유배지인 순흥(順興)에서 2차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한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李甫欽), 그리고 그때 희생된 순흥의 양민(良民)들을 합치면 그 수는 수백에 이릅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있었음에도 특히 사육신만 꼽히는 것은 당시 절의파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쓴 <사육신전(死六臣傳)>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3년 만인 1455년(단종 3)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자 이에 분노한 충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세조 일파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 첫 번째 거사계획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사육신의 한 분인 유응부에 의해 모의되었습니다.
1456년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도총관 성승과 훈련도감 유응부가 검을 빼들어 임금의 뒤에서 왕을 보호하는 직책인 운검(雲劒)을 맡게 되어 세조와 세자를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거사 당일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한 것 같은 예감에 한명회가 임금의 뜻이라며 운검을 두지 말자고 주장하여 거사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함께 모의에 참여했던 성균관 사예 김질이 미리 겁을 먹고 그의 장인 정창손을 찾아가 의논한 뒤 세조에게 고변하여 거사는 실패하고 연루자들은 모두 붙잡혔습니다.
성삼문은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리’라고 불렀으며 다른 이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하겠다는 말을 거부하고 참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었고 하위지는 참살 당했고 류성원은 잡히기 전에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김문기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로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사육신의 가족들은 남자는 모두 죽였고 여자는 노비로 끌려갔습니다.
지금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이 모셔져 있는데 그 경위를 살펴보면 어느 스님(매월당 김시습이라는 설이 유력함)이 성승,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는데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는 찾을 수 없었고 네 분의 묘만 남았는데도 사육신묘라고 불리다가 사육신공원 성역화사업이 시작되면서 나머지 세 분인 하위지의 묘는 선산(善山)에서 이장하였고, 류성원의 묘도 새로 꾸몄고, 김문기의 가묘(假墓)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691년(숙종17)에 사육신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민절서원(愍節書院)은 자취를 감추고 주춧돌만이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육신묘역 주위에는 두 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를 가던 중에 노량진에서 죽은 박태보를 배향한 노강서원(鷺江書院)으로, 반남 박씨들의 유택과 종택이 함께 있는 수락산 밑자락 의정부 장암동으로 옮겨 다시 세웠습니다. 박태보는 소론의 대가인 서계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서 장암동은 서계 선생이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여 서계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경종이 즉위하자 후사가 없던 경종의 후계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다투는 과정에서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자로 세운 노론의 네 대신인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를 역모로 몰아 죽였는데,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네 명의 대신을 복권시키고 네 명의 충성스런 신하라는 뜻으로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배향하였으나 하남시 상산곡동에 옮겨 다시 세웠습니다.
한강의 5대 나루 노량진
조선시대 한양도성에서 삼남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는 반드시 한강을 건너야 했고 한강에는 강을 건너는 배가 닿을 수 있도록 도로가 지나는 곳에 나루가 생겼습니다. 나루는 강폭의 넓고 좁음과 사람과 물자의 유통량에 따라 그 중요성을 달리 하지만 대체로 도(渡)와 진(津)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으며 이러한 진도제도(津渡制度)로 생겨난 나루터는 백성들의 이동에 대한 감시가 용이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그곳에 별감(別監)을 파견하였습니다.
한강변의 주요 나루터를 상류에서부터 살펴보면 광나루[廣津], 송파나루[松波津],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한강나루[漢江津], 노들나루[鷺梁津], 용산나루[龍山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華津], 공암나루[孔巖津] 등인데 이중에서 광진, 송파진,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은 한강의 5대 나루로 꼽혔습니다.
노량진(노들나루)은 5대 나루 중의 하나이면서 상류의 한강진과 하류의 양화진과 더불어 한양도성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어서 이곳에는 진(鎭)이 설치되어 군대가 주둔하였습니다. 특히 이곳에 수양버들이 울창해서 노들나루라고도 불렀으며 도선장(渡船場)의 역할을 하는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라는 여관이 있어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했습니다.
노량진은 한강 북쪽의 용산진과 서로 왕래하며 도성과 시흥, 수원 방면의 간선도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용산나루 주변은 넓은 모래밭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강변북로로 변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왕을 호위하는 왕의 친위부대인 용호영(龍虎營)과 도성을 나누어 지키던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문(三軍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노량진은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로서 1899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로부터 양도받은 일본이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33.2km의 경인선을 개통했으며 그 기념비가 노량진역 구내에 세워져 있습니다.
임금이 도성을 떠나 능행차를 하게 되면 한강을 꼭 건너야만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임금도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넜지만 조선 중기로 가면서 임금의 능행차가 빈번해지자 강을 건너는 안전한 방법이 강구되었는데 그것이 배다리[舟橋]입니다.
배를 일렬로 정렬하여 강 위에 띄워놓고 그 위에 상판을 얹어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배다리 설치장소는 지형과 물살을 잘 살펴서 정해야 되는데 선정릉, 현융원(지금의 융건릉)과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는 노량진에 설치하였고 헌릉, 영릉에 행차할 때는 광진(廣津)에 설치하도록 하였습니다.
노량진의 배다리는 세종과 세조가 온양온천으로 휴양갈 때와 숙종이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특히 정조는 지금의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융원(顯隆園)이라 하고 자주 거둥하여 참배하였으므로 한강을 건너는 불편을 덜기 위해 배다리를 설치하는 주교사(舟橋司)라는 전담기구까지 만들었습니다.
한강변 정자가 한때는 80여 개나...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 장소로 꼽혔던 한강변의 전망이 좋은 바위언덕이나 봉우리에는 왕족과 사대부들이 정자를 많이 지어 한때는 80여 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문헌상으로만 남아 있으며 그나마 위치가 확인돼 복원됐거나 표석이 세워진 곳은 14곳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재 원형이 남아있는 한강변 정자는 용양봉저정(한강대교)이 유일하며 복원된 정자는 효사정(한강대교), 소악루(가양대교), 망원정(양화대교), 낙천정(잠실대교)의 네 곳이고 표석이 세워진 정자 터는 화양정(영동대교), 압구정(성수대교), 삼호정(원효대교), 천일정(한남대교), 제천정(한남대교), 심원정(서강대교), 담담정(양화대교), 창회정(마포대교), 쌍호정(동호대교)의 9곳이며, 서달산에 기대고 있는 정자는 용양봉저정과 효사정입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배다리로 한강을 건넌 정조가 어가(御駕)에서 내려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은 곳으로, 머물며 주식(晝食)을 했다고 해서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고 임금이 머문 곳이라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으로 용양봉저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 정자는 선조 때의 중신 이양원의 집터였는데 정조 때에 주정소로 이용되다가 고종 때 유길준에게 하사되었고 다시 1930년대에 일본사람 이께다(池田)에게 넘어가 오락장으로 변질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국유화되었으나 다른 건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정자 한 채만이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
효사정(孝思亭)은 민제의 사위로 태종 이방원과 동서지간이며 16세에 음서로 출사하여 경기도관찰사, 한성부윤, 대사헌, 우의정을 지낸 노한(盧閈)의 별서입니다. 노한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가끔씩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하고 개성에 있는 부친의 묘를 생각하며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효사정은 없어지고 그 터마저 찾을 수 없어 가까운 한강변 낮은 언덕에 새로 신축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그곳은 일제강점기 때 한강신사(漢江神祠)라는 일본신사가 있었습니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인 이조판서 강석덕이 지었고 그의 아들 강희맹은 <효사정기(孝思亭記)>를 남겼고 정인지, 서거정, 신숙주, 김수온 등 당대의 문신 학자들이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詩文)을 남겼습니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현의 주산인 궁산에 세워진 정자입니다. 한강의 경치와 강 건너 덕양산과 멀리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 좋은 곳으로, 겸제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있을 때 이곳에 올라 한강변의 좋은 풍광을 그린 그림이 화첩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망원정(望遠亭)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별장을 지어 강상(江上)의 풍경을 즐기던 곳으로, 세종이 어느 날 농사를 시찰하러 이 정자에 나왔을 때는 날이 가물던 중에 비가 흡족하게 쏟아졌다고 해서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부릅니다.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륙 양군의 훈련장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1484년(성종 15)에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고 이름도 망원정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낙천정(樂天亭)은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 편히 쉬던 곳으로, 정자가 세워진 곳은 주위보다 약간 높은 지대여서 대산(臺山, 42.8m)이라 불렸는데 대산 서북쪽 모퉁이에는 이궁(離宮)도 지었습니다. 태종은 이곳에서 세종과 정사도 논의했다고 하는데 좌의정 박은이 <주역>에 나오는 ‘천명을 알아 즐기노니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故不憂)’라는 글귀를 따 정자 이름을 낙천정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화양정(華陽亭)은 태조 때부터 말을 먹이는 뚝섬의 말들이 떼 지어 노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세종 때 지은 정자로, 동지중추원사 유사눌이 <주서(周書)>에 나오는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고 하였습니다.
압구정(鴨鷗亭)은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의 별장입니다.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倪謙)이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으로 ‘압구정’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곳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한명회가 관직을 사퇴하고 이곳에 여생을 지내려 하자 임금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여 그 시가 수백 편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삼호정(三湖亭)은 조선 후기 여류시인들이 시회를 열었던 곳으로, 헌종 때 의주부윤을 지낸 김덕희의 별장입니다. 그는 시문을 잘 짓는 기생 출신의 김금원을 소실로 두었는데 그녀는 1847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기녀, 서녀 출신 소실들로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만들어 삼호정에 모여 시회를 열었습니다.
천일정(天一亭)은 고려시대의 절터에 세워진 개인 소유 정자로 성종 때 황희 정승의 손자사위인 김국광이 처음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이 이 정자를 소유하였다가 조선 후기에는 민영휘의 별장이 되었습니다. 현판 휘호는 청나라 사람인 옹동화(翁同龢)가 민영휘에게 써준 글씨이고,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나오는 ‘가을 물빛이 하늘빛과 함께 길다(秋水共長天一色)’라는 시구에서 따 왔습니다.
제천정(濟川亭)은 왕실 소유의 정자로 1456년(세조 2)에 세워졌으며 1563년(명종 18)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으로,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나와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구경하기 좋은 곳으로도 꼽혔습니다. 광희문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이나 정릉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고 중국 사신이 오면 언제나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심원정(心遠亭)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가 화전 교섭을 한 정자로 용산구문화원 부근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습니다.
담담정(淡淡亭)은 조선 초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입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를 베풀곤 했는데 이 정자에 거동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가 폐허가 된 터에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창회정(蒼檜亭)은 조선 초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주 놀러 다녔던 곳이며 한명회와 권람을 만나 대사를 논의하였던 곳입니다.
쌍호정(雙虎亭)은 1808년(순조 8)에 출생한 조대비의 생가 옆에 있던 정자로서 조대비가 출생할 때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정자 앞에 와 있었다 하여 쌍호정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이 일대는 자연 풍경이 빼어나 문인 명사들이 정자를 짓고 여가를 즐겼으나 1911년 경원선 철도 부설 이후 옛 정취는 거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서달산 서쪽 산록에 자리 잡은 달마사(達磨寺)는 유명한 선승 만공(滿空)스님의 제자인 유심스님이 1931년 창건한 조계종 사찰로서 일제 강점기 때는 만공스님께서 가끔 법문을 하셨던 곳으로 지금은 이웃한 국립현충원의 지세를 살려 영산전 납골봉안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동작포란형(銅雀抱卵形)의 국립현충원
서달산에 기대고 있는 국립현충원은 형국이 동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맥이 흐른는 것 같아 ‘동작포란형(銅雀抱卵形)’이라 하며 앞을 흐르는 한강수가 용트림하듯 흐르고 있어 지세를 한층 더 수려하게 뽐내게 합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사육신(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충절의 기상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1956년 제정된 ‘군묘지령(軍墓地令)’에 의해 초기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장병들과 순직한 군인, 군무원, 그리고 국무회의 의결로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까지 모시게 되었고 1965년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되었으며, 2005년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義死傷者)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국립현충원의 묘역은 국가원수 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 및 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일반 묘역, 외국인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특히 애국지사 묘역에는 조선시대 말과 일제 강점기에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펼쳤던 순국선열(133위)과 애국지사(212위)의 345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국립현충원 안에 자리 잡은 호국지장사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宮寺)로, 고려 공민왕 때 보인(寶仁)스님이 중창하고 화장암(華藏庵)이라 개명하였던 것을 조선시대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의 묘를 국립현충원 안으로 모시게 되자 화장암을 그 원찰로 삼고 화장사로 승격시켰습니다.
“관우 음덕으로 임진왜란 이길 수 있었다”
서달산 남쪽 산록에는 관우를 모신 사당인 남관왕묘(南關王廟)가 있습니다. 일반인의 사당임에도 그 격이 매우 높다는 것은 사당의 이름에도 명확히 나타납니다. 왕의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이 종묘이고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를 배향하는 사당인 대성전을 문묘(文廟)라 하며 관우를 모신 사당을 관왕묘라 부를 정도로 같은 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관왕숭배사상은 명나라 초기부터 성행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온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퍼져나간 것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관우의 음덕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전란 중에 조선의 병사들에게도 퍼져나가 민간신앙으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관왕묘가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다른 세 곳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동관묘는 특히 성균관의 문묘와 나란히 무묘(武廟)라 불릴 만큼 격이 높았는데 춘추로 치러지는 대제 때에는 임금이 손수 무복(武服)을 입고 참례를 할 정도였으며 지방에도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관왕묘가 세워졌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 바지), 스틱, 모자, 선글라스, 식수,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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