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컵'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어디까지 번질까.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 일감 몰아주기. 밀수혐의 등 각종 범법 의혹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자연스레 대한항공 전체의 위기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물벼락'을 내린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영장청구는 기각됐으나, 여전히 풀어야 할 범죄 의혹들이 산적해 있다. 경찰을 비롯해 관세청, 국세청 등 전방위에서 조 씨 일가의 비리를 조사하고 있다. 그만큼 그동안 곪아있던 환부가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한항공 직원들도 나섰다. 4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는 대한항공 그룹 계열사 전·현직 직원과 일반 시민 약 500명이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1차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돈에 환장한 조 씨 일가 창피합니다'
이번 집회는 조현민 전 전무의 갑질 논란 이후 만들어진 ‘대한항공 직원연대’가 주최했다. 조현민 전 전무의 갑질 이후 만들어진 익명 카톡 제보방에서 촛불집회가 제안됐다.
이날 집회의 예상인원은 약 100명이었으나 그보다 5배에 가까운 인원이 참석했다. 이날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세종문화회관 계단에는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 손에는 '조양호 OUT, 우리가 대한항공 지켜낸다, '돈에 환장한 조 씨 일가 창피합니다' 등 오너 일가를 비판하는 피켓이 들려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날 집회 참가자들 대부분은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을 착용했다는 점이다. 포크스는 가톨릭 탄압에 항의해 1605년 영국 의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려다 실패, 발각된 인물이다. 통제된 사회에서 저항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주인공이 이 인물 가면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이 가면은 저항의 상징이 됐다.
이날 집회 사회를 맡은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현 팀원급)도 다른 직원과 같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착용했다.
"조양호가 퇴진하는 그날까지 응원한다"
이날 집회는 자유발언으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시민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자신을 시흥에서 왔다고 밝힌 시민은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를 두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 좋은 기업 문화와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며 "조양호가 퇴진하는 그날까지 응원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남편이 대한항공 직원임을 밝힌 여성은 "많은 사람들이 대한항공에 다니는 직원들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있다"며 "남편은 2000년도에 그런 환경을 바꿔보겠다고 나섰다가 해고됐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이후 겨우 복직됐으나 대한항공은 변한 게 없다"며 "여기 모인 분들은 앞장서서 대한항공을 바꿔보겠다고,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고 나선 분들이다. 이들이 외롭지 않게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고 보다 많은 참여를 부탁했다.
역시 가족이 대한항공에 다닌다고 밝힌 또다른 여성은 "가족이 대한항공에 입사한 뒤, 나라를 대표하는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다"며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일하다 보니 밖에서는 알 수 없는 회사의 힘든 일이 많았다. 이제는 우리의 작은 힘을 모여 존경받는 대한항공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주인은 직원이다"
집회 후반에는 대한항공 직원들도 나섰다. 자신을 단톡방 닉네임 '무소유'로 밝힌 직원은 "이번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내년, 그리고 내후년에는 우리에게 복수하겠다는 회사 측의 말처럼 더 강한 노동착취와 갑질을 당할 수밖에 없다"며 "조 씨 일가를 물리치고 대한항공의 주인은 직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상시시켜 줘야 한다. 합심해서 함께 해 달라"고 독려했다.
또다른 직원은 "이번 사태로 또다시 대한항공의 문제를 뼈아프게 확인했다"며 그러면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대한항공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미 그에 대한 답은 자신이 알고 있었다.
'함께 하고 싶었던 우리의 꿈이다.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자 우리의 희망이다. 대한항공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그런 회사가 아니다. 우리 구성원 모두가 만들어낸 회사가 오늘의 대한항공이다. 지금도 많은 청춘들이 여기에 들어오는 꿈을 꾼다. 그런 회사를 조 씨 일가가 망치도록 둘 수 없다. 그들이 회사를 좌지우지하더니 결국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대한항공은 그들 힘으로 일군 회사가 아니다. 온갖 궃은 날씨에도 정비하는 정비사들. 승객들을 끝까지 웃으며 대하는 운송 직원들. 안전 운항을 위해 힘쓰는 기장들,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객실 승무원들. 그들이 회사를 이끌어왔다. 그런 이들이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우리가 대한항공의 주인이다. 동료와 서로 어깨를 기대서 공동체로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
"침묵 속에 살아온 나의 행동을 반성한다"
이날 자리에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자신을 과거 '어용'노조와 싸우다 패배한 패잔병이라고 표현한 한 직원은 "당시 노조와 동료에게 실망해서 다시는 나서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지난 15년 동안 침묵 속에서 살았다"면서 "그런 나의 행동을 반성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열정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며 "조 패거리들이 아웃하는 그날까지 함께 즐겁게 싸우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남성 직원은 "30년 전부터 회사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동료들을 봐왔다"며 "그들이 눈물의 퇴사를 할 때 미안하다는 소리 한 번 못하고 지난 30년을 지내왔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박창진 전 사무장 일을 접하고도 역시 함께하지 못했다"며 "그간 (쫓겨났던) 선례를 봐서, 회사 눈치를 봐서 같이 함께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나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여기에 나오지 않은 이들도 모두 함께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는 저녁 8시 30분께 마무리됐다. 대한항공 직원연대는 이번 집회가 끝이 아니라 추후 2차 촛불집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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