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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몰랐던 스승 김성근, 인내로 화답한 제자 조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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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몰랐던 스승 김성근, 인내로 화답한 제자 조범현

[프레시안 스포츠] 2009년 '師弟 시리즈'가 남긴 것

치열했던 한국시리즈 7차전이 나지완의 홈런으로 끝났을 때, 기아의 조범현 감독은 SK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조 감독은 스승 김성근 감독에게 인사를 했고, 평소 그라운드에선 표정이 없던 김 감독은 살며시 미소를 보내며 승장이 된 제자를 격려했다. 경기장에서의 날카로운 신경전, 7차전까지 가는 혈전으로 점철됐던 시리즈는 이렇게 훈훈하게 막을 내렸다.

▲ 24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기아 타이거즈가 SK 와이번즈에 9회 말 기아 나지완 선수의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한 후 기아의 조범현 감독이 스승이기도 한 김성근 SK 감독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김성근의 '포기하지 않는 야구'

올 시즌 SK 야구는 김성근 감독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김 감독은 SK 전력에 절반을 차지한다던 명품 포수 박경완을 부상으로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이스 투수 김광현과 불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좌완 전병두도 포스트시즌에 참가할 수 없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힘겹게 제압한 SK는 투수진, 특히 불펜의 과부하가 최대 문제였다. 하지만 SK사전에는 포기가 없었다. 한국시리즈 직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성근 감독은 "스승이 쉽게 지면 가치가 없다"고 의미 있는 말을 던졌다. 1·2차전을 내줬던 SK는 홈에서 펼쳐진 3·4차전을 잡고 기어코 시리즈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김성근 감독은 5차전 판정시비로 그라운드의 선수들을 불러들여 포스트시즌 사상 초유의 감독 퇴장을 당했다. 그는 "5차전으로 시리즈는 이미 끝난 게 아닌가"라는 말까지 했다. 그만큼 병살타를 막으려 했던 김상현의 2루 슬라이딩이 수비방해 판정을 받지 못한 게 아쉬웠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는 7차전까지 간다 해도 지칠 대로 지친 SK 벌떼 마운드로 기아를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때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실수로는 절대 상대에 승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그의 '지지 않는 야구' 철학도 투수진의 체력저하에는 약이 없기 때문이다. 실투를 할 확률이 높아져서다.

하지만 SK는 6차전에서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어떤 팀보다 혹독한 훈련을 하고 야구에 대한 열정과 근성을 강조하는 김성근 감독의 분신 같은 SK는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선보였다. 그는 7차전 막판에 결국 고개를 숙였지만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이 살아난다는 것을 SK가 보여줬다"고 선수들을 칭찬했다.

조범현의 '인내의 야구'

기아는 2007는 최하위, 2008년 6위를 기록한 팀이다. 해태 타이거즈 황금기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조범현이 올 시즌 구상한 6선발 체제는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데 기대 이하의 투구를 하는 투수가 선발로 왜 나가야 하는지 팬들은 조 감독을 이해하지 못했다. 계약기간이 올해로 끝나는 조 감독의 이런 결정은 사실 쉽지 않았던 것. 하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이 결정에는 선발 투수를 아껴야 한다는 철칙이 숨어 있었다.

혹서기에 가면 갈수록 선발 투수의 체력이 결국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포석이었다. 5월부터 조금씩 상승세를 타던 기아는 여름에 대폭발했다. 그 원동력에는 최희섭·김상현의 이른바 'CK포'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중심은 역시 선발진이었다. 결국 선발투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두 외국인 투수 로페즈와 구톰슨이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는 이유가 됐다.

한국시리즈에 들어서도 조 감독은 선발에 모든 걸 맡겼다. 상대적으로 불펜의 힘에서 SK에 뒤진 것도 한 이유지만 포스트 시즌 경험이 떨어지는 선수들의 집중력 유지를 위해 선발 투수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정규시즌부터 체력을 비축한 로페즈-윤석민-구톰슨-양현종으로 이어지는 기아 선발진은 때로 실패도 맛봤지만 적어도 선발로서의 자신의 몫은 충실히 해냈다.

신인 2루수 안치홍과 수비가 불안했던 3루수 김상현도 조범현 감독의 인내가 없었다면 제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안치홍은 한국시리즈에서 안정된 수비를 선보였고 7차전에서는 홈런까지 기록했다. 올 시즌 타이거즈 열풍을 주도한 김상현은 변화구 대처능력을 보태 타점기계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기다림의 야구는 7차전 결승포의 주인공 나지완에서 완결됐다. 조 감독은 올 시즌 초 "나지완을 홈런 20개 이상을 칠 수 있는 타자로 키우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지완은 정규시즌에서 홈런 23개를 쳤다. 감독의 전폭적인 믿음 속에서 나지완은 한국시리즈 중심타자로 기용됐다. 외야 수비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방망이 하나만큼은 시원하게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지완은 침묵했다. 6차전까지 16타수 3안타에 그쳤다. 조 감독은 기죽지 않고 경기를 즐기는 나지완을 계속 중용했다.

나지완은 7차전 6회에 2점포를 쏘아 올리며 손맛을 느꼈다. 운명의 9회말 나지완은 신일고 선배인 SK 채병용 투수에 볼카운트 2-2까지 몰렸다. 하지만 4차전 선발 출장에 이어 6차전 마무리로 등판해 무리했던 채병용은 결정적 순간 몸쪽 높은 공을 던지는 실투를 했고, 나지완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액땜과 길몽이 앞길 연 김성근, 조범현

김성근 감독이 충암고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부인으로부터 10만 원을 받아들고 지방으로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 떠났다. 김성근 감독은 당시 야구부 해체를 목전에 뒀던 대구 대건고 선수 18명 전원을 데려왔다. 그 중에 한 명이 조범현 감독이다.

김 감독의 충암고는 1977년 황금사자기 대회 8강에 올랐다. 상대는 한동화 감독이 이끌던 라이벌 신일고. 충암의 에이스 기세봉 투수는 9회 1사까지 노히트 노런 경기를 펼쳤다. 2-0으로 앞섰던 충암의 4강 진출은 기정사실화 되는 듯했다. 하지만 9회말 양승호(고려대 감독)와 박종훈(LG 감독)의 연속안타에 이어 김남수에게 끝내기 3점 홈런을 맞아 무릎을 꿇었다. 김 감독도 "처음 보고 처음 겪는 경우"라며 이 순간을 아쉽게 여겼다.

김성근 감독의 자서전 <꼴찌를 일등으로>에 따르면 역전패의 충격에 충암 선수들도 경기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김 감독도 이를 말릴 수 없었다. 이겼으면 4강 진출로 대학 진학이 보장되는 거였으니 땅을 칠 만했다. 야구 때려치우겠다고 한 선수들을 달래서 학교로 데려왔다. 맛있는 것을 먹이면서 기운도 북돋아 줬다. 이홍식 충암 재단이사장은 새 유니폼까지 맞춰 격려했다.

<한국일보>는 봉황대기 대회 직전 팀 소개 코너에서 "(충암고는) 이번 봉황대기에서 과거를 잊는 회색 유니폼으로 바꿔 입고 불운을 행운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눈을 빛내고 있다"고 썼다.

충암고의 바뀐 유니폼 색깔이 길조가 됐을까? 충암은 봉황대기에서 신일에 설욕했다. 8강전에서 충암은 10회 말 연장 끝내기 안타로 신일을 3-2로 눌렀다. 결승타의 주인공은 조범현. 그는 "언제나 (신일고) 김정수의 빠른 볼에 타이밍을 못 맞춰 고민했습니다. 지금껏 신일에 지기만 했는데 오늘 드디어 설욕했습니다"라며 기뻐했다.

대망의 봉황대기 결승전에서도 조범현은 4회말 선취 2점을 올리는 2루타를 뽑아내며 대회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 김성근 감독은 우승 뒤 "집념의 승리"라며 기뻐했다. 그는 한일 고교야구 친선경기의 한국 대표팀 감독의 영예까지 잡았다.

하지만 그의 웃는 얼굴 사이로 부러진 윗니가 보였다. 김 감독은 한 달 전 연습도중 제자의 방망이에 안면을 맞아 입술을 24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이 때 앞니 3개가 부러졌다. 그는 이를 우승을 위한 액땜이라고 생각했다.

조범현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 때까지 숨겨왔던 길몽을 소개했다. 그는 "설 전날 돈다발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꿈을 꿨다. 또 설 당일에는 금화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꿈을 꿨다"고 웃었다. 김성근 감독의 첫 우승이 '액땜'이었다면 조범현 감독의 프로무대 첫 우승은 '길몽'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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