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관람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영화 <국제시장>(윤제균 감독, 2014). 그 영화에 은근슬쩍 한진그룹 이야기기가 나온다. 영화 속에서 베트남 전쟁에 민간인 기술자로 '참전'한 덕수(황정민 분)는 '대한상사'라는 회사의 조끼를 걸치고 있다. 대한상사가 베트남전에서 맹활약한 '한진상사'를 뜻한다는 데 별다른 이견은 없어 보인다. 한진상사는 요즘 총수 일가 패악질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대한항공을 주력사로 거느린 한진그룹의 전신이다.
지난 21일과 22일 양일간 서울에서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려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양민 학살 사건을 재조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주도로 한국군은 사실상 미국의 용병이 되어 머나먼 남쪽 나라 베트남에서 베트남의 민족 해방을 좌절시키기 위해 싸웠다. 참전 명분이 없었고, 그랬기에 국제사회에서 '양키 용병'으로 비난을 산 저간의 과정은 생략하고,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한 한국 군인들에게 전투 행위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비(非)전투원인 민간인(양민)에게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진상 규명과 함께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베트남전은 비록 '더러운' 전쟁이지만, 다른 나라 전쟁에 목숨을 바친 당시 청춘들에게까지 그 '더러운'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 역시 5000명 이상이 죽고 1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고엽제 피해 등 전쟁 후유증을 앓은 사람의 숫자는 훨씬 더 많다. 더 중요한 사실은 베트남전에서 숨지거나 다친 사람 대부분이 민초(民草)였다는 점이다.
베트남전은 한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사실상의 국가 범죄이며, 희생자는 한국인이든 베트남인이든 대부분 민중계급에서 나왔다. '국가 범죄'를 주도한 인물은 당연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지만, 이런 범죄 행위에 영합하거나 또는 이런 피의 역사를 기회로 이익을 챙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나 짐작하듯 대표적 인물이 한진그룹 창업자 고(故) 조중훈이다.
"1945년 11월 트럭 한 대로 창업한" 조중훈은 베트남전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박정희 눈에 든 그는 '밀어줄 테니 맡아보라'는 권유에 1969년 국영이었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지금의 대한항공을 만들었다. 전쟁통에 현 한진그룹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한국 재벌 대부분이 정경 유착과 모리배(謀利輩) 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한진그룹은 '피의 역사'가 더해져 음울한 태생을 지니게 된다. 한국인과 베트남인의 피를 돈으로 바꾼 사악함과 비천함은 어쩌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경영을 통해 속죄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진그룹은 태생의 사악함과 비천함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심화했다. 조중훈 선대회장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막대한 돈을 번 한진은 파월기술자들의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결국 1971년 9월 '칼(KAL)빌딩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떼어먹을 돈이 따로 있지, 사선을 넘으며 벌어들인 푼돈을 재벌이 떼어먹느냐'는 민초의 분노가 방화로 이어진 것이다.
최근 문제가 된 한진 총수 일가의 갑질은 과거와 비교해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땅콩 회항' 조현아에, '물컵 갑질' 조현민까지 조씨 일가의 가족 경영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으며 한진그룹이 난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특히 대한항공 직원들까지 나서 총수 일가의 비리와 갑질을 고발하는 것을 볼 때 한진은 경영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미래를 이야기해보자. 대한항공을 비롯한 한진그룹은 한국 청년들이 전쟁통에 '피 흘려가며' 일군, 내용상으로는 '국민'기업이기에 안타깝게도 한진이 망하기를 바랄 수만은 없다. 오히려 사악하고 비천한 태생을 떨쳐버리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기업으로 재탄생할 수 있게 국민적 힘을 모아야 한다.
먼저, 총수 일가의 비리와 갑질을 낱낱이 밝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총수 일가가 그룹의 주주로 남았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기업을 지배하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들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동안 누린 특권을 포함한 위법 사안에 대해서는 옥고(獄苦)를 치를 각오도 해야 한다. 한진 갑질 사태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국사회는 한 걸음 진보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적인 힘으로 한진그룹의 지배 구조를 바꾸는 방법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차제에 대한항공을 국유화하면 좋겠지만, 혁명적 상황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실현할 방법이 없다.(국유화는 국가와 정부의 수준에 따라 자칫 해악이 될 수도 있기에 잘 따져봐야 할 해법이다. 다만, 이론상으로 검토할 수는 있는 부분이다.)
현실적 대안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현재 대한항공 최대 주주 및 특수 관계인의 지분은 한진칼(29.96%)을 포함, 33.34%(보통주)이다. 한진칼의 최대 주주 및 특수 관계인의 지분은 조양호(17.84%)를 포함, 28.96%이다. 특수 관계인에는 조현아, 조원태, 조현민 등 3남매의 이름을 올렸다. 말 그대로, 조양호 회장과 그 자녀들이 한진을 지배하고 있다.
최대 주주와 특수 관계인의 지분을 감안할 때 흩어진 나머지 지분으로 조씨 일가의 경영 참여를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 결국 실패한 경영자를 끌어내려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자본시장 내 움직임을 조직하고, 재벌의 사회적 영향력과 관련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을 결집하는 '투 트랙'으로 조씨 일가를 경영에서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진그룹 직원과 소액 주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대주주의 무능과 부패를 폭로하고 기관투자자들에게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지분에 대해서는 더 강력하게 '국민적 의사표시'를 할 것을 요청해야 한다. 동시에 소액 주주끼리 단결해 투자 가치를 지키면서 주주로서 책임을 다하는 소액 주주 운동을 활성화해야 함은 물론이다.
사회적으로는 불매운동을 포함해 부패 대주주의 경영 참여를 차단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칼호텔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칼호텔의 기업 및 단체 고객에게 칼호텔 이용 시 항의 전화나 서한을 보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또한 '한진그룹 대주주 조씨 일가의 경영 배제 운동본부'를 구성해 조씨 일가가 경영에서 물러날 때까지 싸워보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현민 사태' 후 열흘 동안 침묵하던 조양호 회장은 지난 22일 국민과 대한항공 직원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두 딸의 퇴진 방침을 밝혔다. 조 회장은 또 대한항공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겠다면서 부회장직을 신설하고,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를 전문경영인 부회장으로 보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장남 조원태 사장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총수가 임명한 부회장이 전문경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여론이 나빠지고 범법 행위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하자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궁여지책으로 나온 꼼수라는 걸 삼척동자도 안다.
조 회장의 사과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앞서 제안한 '투 트랙' 정상화 해법만이 한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비정상 한진의 정상화'를 계기로, 시민사회가 단합된 힘을 보여준다면 정부 주도의 재벌개혁도 가속화할 수 있다. 재벌개혁의 본질은 바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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