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송송골
10여 년 만에 돌아온 송송골. '송송골'은 옛날부터 내려온 우리 마을 이름입니다. 이름답게 우리 마을에는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도 '송송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멋진 소나무들이 산등성이에 울창합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송송골은 거의 옛날 집들로만 이루어진, 나지막한 돌담들이 눈에 띄는 소박하고 정겨운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전통가옥보다는 양옥이 더 흔한 마을이 되었지요. 제가 이웃 마을에 나가 사는 동안에도 양옥이 서너 채 더 들어섰고, 마을회관 옆 논에도 네모난 이층짜리 대형 시멘트 건물이 턱 하니 들어섰습니다. 명배 씨네 집 곁에 있던 예쁜 다랑논도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려 밋밋한 시금치 밭으로 바뀌었고요. 다행히 마을을 감싸 흐르는 두 개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잘 흐릅니다. 저를 반기는 낯익은 얼굴들도 여전들 하십니다. 청소 잘한다고 꽤나 예뻐해 주시던 어르신들 여러분이 차례차례 세상을 뜨셨지만요.
'한음골'로 바뀐 송송골
우리 마을은 '오성과 한음'으로 이름난 한음 이덕형 선생께서 홀로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말년을 보낸 곳이라고 해요. 그래서 최근에는 도로명도 '한음길'(경기도 남영주시 조안면)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한음 선생 집안네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 이씨 집성촌이기도 합니다.
제가 세 들어 사는 집도 광주 이씨네 집입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 모양으로 마주 보는 오래된 한옥이지요. 돌아가신 집주인 할아버지가 젊으실 때 마을에 텔레비전이랑 전화기를 가장 먼저 들여올 만큼 우리 마을에서는 첫손에 꼽는 부잣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여러 해 전에 돌아가시고, 지금 집주인인 큰아들 내외는 바로 옆에 아담하게 양옥을 지어 그리 옮겨가서 삽니다. 낡은 옛집에는 나그네들만 살지요. 저도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이 집에 사는 동안은 제집이라 여기고 삽니다. 예전에는 구들방이 있던 사랑채에 살아 '사랑채 새댁'이었는데, 지금은 안채를 차지해 어엿한 '안방마님'이 되었습니다.
군데군데 헤아려보니, 우리 마을도 우리 집 같은 전통가옥은 겨우 일곱 채가 남았더라고요. 돌담도 여섯 군데밖에 안 남았고요. 아직 집들 사이사이 텃밭이 남아 그나마 송송골을 '송송골답게' 해줍니다. 저희 집도 두어 군데 시멘트 블록으로 담을 쌓았지만, 그런대로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니, 이 집은 6.25 난리 전후쯤 해서 새로 지은 듯합니다. 담장도 자연석이랑 누런 진흙을 켜켜이 얹어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담장 맨 위에 엉성하게나마 검정 기와도 얹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담장이 서너 군데 무너져 내려 돌들이 수북이 산을 이뤘는데 그냥 내버려 두었더라고요. 휑하니 무너진 담을 볼 때마다 '저걸 어떻게 다시 쌓을까? 허리를 다쳤으니, 직접 돌을 주워 나를 수도 없고 대체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하고 고민했습니다.
일꾼을 찾아서
서너 해 전 경북 안동에 일이 있어 드나들다가 거기서 옛날 담장만 전문으로 쌓는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 늘 무거운 돌을 나르느라 그런지 유난스레 어깨가 건장하고 두 팔이 침팬지처럼 굵고 기다란 분이셨어요. 안동에는 지금도 옛날 집들이 많고 담장도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한 집들이 참 많습니다. 안동 곳곳에 그 아저씨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하루 품값을 여쭈어보니, 어휴! 자그마치 40만 원.
셋방살이 주제에 언감생심, 그 비싼 품값을 들여서 담장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이 일을 어쩌나 싶더라고요.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요? 지난여름, 가을 내내 남의 집 꽃 마당을 손질해주고 받은 품값을 푼푼이 모아 집 손질을 시작했습니다. 남의 집에다 웬 돈을 그렇게 들이느냐고 말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낡은 집에서 겨울을 나자니 망설일 수도 없었습니다. 마당 수돗가에 함석으로 챙을 달고, 안채 지붕 빗물받이를 새 걸로 갈고, 기둥에 무수하게 박아놓은 못들도 말끔히 빼내고, 소나무 기둥도 그라인더로 보얗게 갈았지요. 벽에는 흰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있던 비닐집도 확 걷어치웠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심야전기보일러도 기술자를 불러다 깨끗이 손질했습니다. 돈이 좋기는 좋더군요. 덕분에 집이 환해지고 방바닥도 절절 끓습니다. 겨울 준비는 어지간히 한 셈이지요.
달라진 집을 보러 마을 분들이 기웃기웃 구경들을 오십니다. 다들 입이 딱 벌어집니다.
"아이고, 이걸 어째! 새집이 되어버렸네 그려. 잘했어. 그나저나 남의 집에다 돈을 잔뜩 처들여서 어쩌누? 오래오래 살아. 딴 데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주구장창(주야장천) 살아."
"아이고, 환하네! 이제 사람 사는 집 같네. 꽃도 요렇게 예쁘게 심어 놓구. 집주인 입이 찢어지겠다야. 하하하!"
흠, 이것저것 잘했지만 제 마음을 가장 흐뭇하게 하는 건 무엇보다 여기저기 무너진 돌담을 말끔하게 손질한 일입니다. 품값이 꽤 들어갔지만 예쁘게 손질한 담장만 보면 저도 모르게 입이 헤 벌어집니다.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다니 아주 꿈같은 일입니다. 자,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일꾼들을 구해 묵은 소원을 풀었는지 궁금하시지요? 그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도대체 돌담은 누가 쌓을까?
돌담이나 이런저런 담장을 쌓는 일은 조경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함께 일하던 조경 기사에게서 돌담 전문가가 아닌 일용직 아저씨 세 분을 소개 받았어요. 아저씨들은 미장일이며, 목수일, 페인트칠이며 도배,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시더라고요. 혼자 힘으로 집 한 채는 거뜬히 짓는다고들 하세요.
"일하면서 틈틈이 지었더니 1년 꼬박 걸렸어요."
농사짓고, 날품 팔면서 자신이 사는 40평짜리 집을 1년 걸려 지으셨대요. 아저씨들은 북한강 건너 양평군 서종면에서 오셨어요. 서종면 정배리, 명달리는 6.25 난리통에도 난리가 일어났는지도 모를 만큼 꽤 깊은 산골짜기랍니다. 세 분을 모시고 집 손질을 하면서 '돌담 쌓는 법'도 덤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막돌 쌓기'. 그야말로 실기와 이론이 한꺼번에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강의였지요. 어느 박사님이 이렇게 쉬운 말로 요점만 콕콕 짚어 강의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저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집 둘레에 꼭 돌담을 두르고 싶은 분들은 이제부터 귀를 쫑긋 세워 보세요. 아저씨들이 주고받는 토박이 말씨 속에 진짜 알맹이들이 고스란히 들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냥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돌담 쌓기 정보 그 자체입니다.
드디어 돌담 쌓기 시작
우리 집 담장을 쌓은 아저씨는 몸집도 별로 크지 않고 조금 야윈 분입니다. 나이도 50대 중후반쯤 되었어요. 나머지 두 아저씨들은 돌을 날라주거나 담배를 입에 물고 훈수만 두셨어요. 저는 아저씨한테 시멘트나 진흙을 전혀 섞지 않고 있는 돌로만 담을 쌓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걸 두고 '막돌 쌓기'라고 한대요. 부탁해놓고도 은근히 걱정되더라고요.
"저걸 무너지지 않게 쌓으려면 경험이 많아야 할 것 같아요."
아저씨가 쪼그려 앉아 돌을 쌓으면서 이러시더라고요.
"돌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이가 딱 맞는 곳이 있어요."
"아…."
"이만 딱딱 맞춰놓으면, 누가 일부러 무너뜨리기 전엔 안 쓰러져요."
돌마다 모양이 저리 제각각인데 이가 들어맞는 곳이 있다니, 참 신기하지요? 저렇게 이를 맞추느라 한참 돌을 굴려야 하니 품도 시간도 마냥 잡아먹을 수밖에는 없겠더라고요. 남의 손에 맡기고 날짜 생각하고 품값 생각하면 마음 조급한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요.
돌이랑 진흙을 켜켜이 섞어 올린 우리 집 담장을 가리키면서 아저씨 한 분이 일러주셨어요.
"돌담은 돌로만 쌓아야 오래가요. 진흙을 섞어 쌓으면 낭중에 빗물이 스며들어서 저렇게 배가 불뚝하니 기울어져요."
아, 그렇구나. 저도 어디서 돌 틈바구니로 바람도 좀 드나들고 숨도 쉬어야 담이 무너지지 않고 거뜬하게 오래간다는 말은 들었거든요.
"요즘은 돌담 새에 쇠파이프를 꽂고 시멘트를 바르잖아요."
"빗물 빠지라고 꽂는 거죠?"
"그렇죠. 그렇게 시멘트로 단단히 한다고 해도 막돌로 쌓는 것만 못해요. 돌로만 쌓으면 알아서 물이 빠지니까 걱정 없어요. 지가 알아서 물을 머금었다 내뱉었다 하면서 숨을 쉬니까요."
에구, 그렇구나. 저렇게 좋은 걸 이 집 저 집 죄 허물어버렸으니….
"그때는 그게 신식이구 좋은 건 줄만 알고 그랬지요."
어쨌거나 눈앞에서 신기할 만큼 우리 집 돌담이 모양을 잡아갑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보면 볼수록 아저씨 솜씨가 여간 야물지 않아요.
"아저씨, 이쪽에 특별히 취미가 있으셨나 봐요. 아저씨 나이에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분이 몇 분 되지 않을 텐데요."
"하하하, 먹고살려다 보니까 하게 된 거죠, 뭐.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얘는 못 하는 게 없어요. 혼자 집도 짓는 걸 뭐."
"하하, 이 일 저 일 조금씩은 다 해요.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해도 흉내는 다 내요."
"왜, 돌 쌓는 일을 좀 더 죽 배우시지 그러셨어요? 품값도 꽤 세던데요."
"배우려고 했는데, 팔이 망가져 버리는 바람에 관뒀어요. 낭중엔 팔을 못 쓰겠더라고요."
에구구, 그러셨구나. 돌담만 쌓는다는 안동 아저씨, 길고 굵직한 두 팔이 떠오르더군요.
돌담 속에는 미운 돌, 모난 돌이 없다
"잔돌 있는 대로 전부 던져 주세요. 잔돌이 많을수록 좋아요."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아무거나 던져도 돼요. 잔돌, 굵은 돌, 모난 돌, 미운 돌, 여기서는 안 따져도 돼요. 다 써먹어요.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다 던지세요" 합니다.
"아, 정말 그래도 돼요?"
돌담 쌓을 때만큼은 미운 돌, 모난 돌이 상관없다니. 하하! 아저씨들 말대로 아무거나 거리낌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집어 던져드렸어요. 길쭉한 돌, 납작한 돌, 한쪽만 삐죽 나온 돌, 네모난 돌, 세모난 돌, 가리지 않고 손에 집히는 대로 던졌어요. 그랬더니, 속도가 막 붙으면서 돌 모으는 일이 순식간에 끝났어요. 덩치 큰 돌들이 몸을 지탱하게 하려면 틈바구니를 빈틈없이 고여 줘야 하니까 잔돌도 많아야 해요. 그런데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속에는 겉이 매끈한 자갈이 한 개도 보이지 않았어요. 자갈처럼 겉이 둥글고 매끄러우면 쉬 미끄러져 내리니까 처음부터 아예 안 쓴 것 같았어요.
제각각 저 생긴 대로 서로서로 빈틈을 고이고, 메우고, 언덕도 되고, 지붕도 되면서 한 덩어리가 되는 돌들을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어요. 어쩐지 우리 마을 사람들을 닮은 것 같아서요. 얼굴도 성격도 하나하나 다 다른데 한 군데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어딘가 닮은 것 같잖아요. 서로 으르렁대다가도 얼굴 안 보이고 목소리도 안 들리면 두리번거리다가 어디 갔냐고 서로 묻거든요. 그래서 돌담 있는 마을을 가면 어쩐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마을 같은가 봐요. 어쩐지 따사롭고 정겹고요
그 많은 돌은 어디서 구할까?
돌을 여기저기서 주워 나르다 궁금증 하나가 불쑥 올라옵니다.
"이 많은 돌을 어디서 구해다 날랐을까요? 요즘은 냇가에 있는 돌도 함부로 주워올 수 없잖아요?"
"우리 클 때는 집집이 애들이 많았잖아요. 아침마다 학교 가는 아이들더러 어른들이 그랬어요. '길 가다가 보는 대로 아무 돌이나 하나씩 주워 오너라' 하고요. 길에 여기저기 굴러 댕기는 걸 애 어른 없이 노상 주워놓았다가 날 잡아서 틈틈이 쌓았어요."
"그래서 맨손으로 덜렁덜렁 오는 놈보다 뭐 하나라도 들고 들어오는 놈을 싹수 있다고 여겼지요."
요즈음은 산을 훌렁훌렁 깎아서 집을 짓는 곳도 많고, 여기저기 도로공사 하느라 산을 깎는 곳이 많으니 돈만 있으면 자연석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겠더라고요. 하지만 품값 안 들이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냥 옛날 어른들이 하던 대로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시골이야 뭐 아직 밭둑이나 길 가장자리만 가도 발에 차이는 게 돌멩이잖아요. 돈 나가는 거 걱정 안 하고 식구들끼리 느긋하고 재미있게 마냥 쌓아보는 거지요. 세월이야 좀 가면 어때요. 누가 쫓아오나요, 뭘.
옛날이야기 슬슬 주고받으면서 일하는 사이 불쌍하게 널브러졌던 우리 집 돌담이 그새 발딱 일어섰어요. 어찌나 솜씨 좋게 단단하게 쌓았는지 보고 보아도 질리지 않아요. 하도 신기해서 아침에도 보고 저녁에도 들여다보았어요. 아침 햇살에, 노을빛에 우리 집 돌담이 더 단단하고 예뻐 보였어요. 돌담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빌었지요. "무너지지 말고 한 500년 그 자리에 서 있어라" 하고요.
중요한 요령 하나 더!
담장 바닥은 되도록 널찍하게 잡아야겠더군요. 위에서 보니 담장 폭이 50여 센티미터는 너끈히 되겠더라고요. 그래야 어지간한 힘에도 쓰러지지 않고 긴 세월을 버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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