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한나라당의 총선 참패는 가시권 안으로 들어 올 것이며 대선 역시 '박근혜 대세론'에 안주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집권 여당보다 야권 전체에 가해질 충격이 훨씬 클 것이며 야권의 중심에 서 있는 민주당은 그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안철수에서 박원순으로 이어지는 바람의 1차적 원인은 물론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이다. 그러나 이 국민적 분노와 저항의 선봉에서 제대로 싸워 주지 못하고 있는 제1야당에 대한 실망과 질책 역시 이 바람의 중요한 원인이다. 민주당이 좌절당한 민심에 새 희망을 불어 넣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서민경제를 파탄 낸 재벌비호 정권,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마저 유린한 경찰∙공안∙정보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격화일로를 걸어 왔지만 민주당은 이처럼 이반된 민심을 흡수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특히 손학규 대표 취임 이후 한나라당 지지율은 지속적 하락세를 보였지만 민주당 지지율은 정체상태에 머물렀다. 이처럼 이반된 민심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안철수-박원순 쓰나미'를 만든 것이다.
▲ '안철수-박원순 쓰나미'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프레시안(최형락) |
민주당의 리더십과 정체성 역시 심각한 위기상태에 빠져 있다. 당이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와 철학의 체계적 정립을 소홀히 해 온 결과 공통된 신념으로 무장한 단합력을 평당원, 원내의원, 당 지도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정치를 지배해 온 지역주의의 퇴조는 완연하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불만은 TK지역에서조차 비등하고 한나라당에 대한 PK지역 민심은 극도로 이반해 있다. 민주당에 대한 호남인들의 불만 역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민주당은 이러한 변화에 부응한 당의 혁신과 체질개선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민주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위한 전략과 추진력, 리더십 등이 민주당으로부터 나와 주지 못하고 있다. 내년 총선과 대선 최대 전략지역으로 부상한 PK지역에 웅거하고 있는 문재인을 정점으로 한 친노 세력, 진보신당을 탈당한 채 방황하고 있는 심상정과 노회찬, 명분 있는 정치권 진입을 모색하고 있는 시민운동 출신의 걸출한 인재들을 결집해서 범 민주세력을 하나로 결합시킬 구심력을 민주당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급작스럽게 조성된 서울시장 선거 국면은 민주당의 이러한 위상을 사실상 벌거벗겨 놓았다. 박원순과 안철수가 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겠다는 마음을 먹었을까. 필승을 장담할 수 있는 시장 후보를 민주당이 확실히 보유하고 있다면 정치권 진입에 대한 거듭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던 박원순과 정치 문외한 안철수가 시장 출마를 검토나 했겠는가.
'안철수-박원순 바람'이 정치시장을 강타한 순간 범 민주세력 내 민주당의 구심력은 완전히 소멸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민주당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박원순과의 단일화 경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참패라도 한다면 그 결과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총선과 대선을 코앞에 두고 치르는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조차 내지 못할 경우 몰아닥칠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박원순이 끝내 무소속 후보 출마를 강행한다면 민주당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아마 민주당은 이런 고심 끝에 단일화 경선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할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인다. 박원순에게 대단히 불리한 경선규칙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가 민주당 후보에게 극도로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민주당은 국민참여 경선 방식의 폭넓은 도입을 주장했고 그 비중 40퍼센트를 관철시켰다.
정당 후보자와 무소속 후보자 간의 국민참여 경선은 전례가 없다. 국민참여 경선 방식이 원래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무소속 후보의 국민참여 경선 방식에 관한 규정은 선거법에 전혀 없다. 이 경선 전 과정에 걸쳐 무소속 후보 박원순이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수많은 지뢰밭이 널려 있다.
그 결과 국민참여 경선 진행 방식과 절차는 선관위의 절대적인 유권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선관위의 유권해석은 정당 소속 후보보다 무소속 후보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내려졌다. 국민참여 경선을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무소속 후보에게는 봉쇄된다. 반면 정당 후보자가 당원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길은 합법적으로 열려 있다. 경선 당일 경선장에 와서 투표를 할 경선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현장에서의 연설조차 사전선거운동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경선 참여자는 투표장에 와서 투표만 하고 갈 뿐이다.
이쯤 되면 왜 민주당이 국민참여 경선 비중 확대를 고집했는지 알 만 하다. 정당 후보와 무소속 후보와의 국민참여 경선은 사실상 정당 후보의 압도적 조직력과 선거법의 지원에 기반한 일방적 동원선거로 귀결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무소속 박원순이 경선에 승리하더라도 한나라당에 의한 선거법 위반 고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이처럼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경선 규칙을 일개 무소속 후보에게 강요해야 할 정도로 대한민국 제1야당의 처지가 절박하고 곤궁하다. 공정성을 현저히 결여한 경선에서 민주당이 모든 조직역량을 동원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소속 후보와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국민들은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이런 싸움 끝에 민주당 후보가 이길 경우 국민들은 그 승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줄 것이며 한나라당 후보와의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켜 줄 것인가. 불공정한 경선 규칙을 적극 활용해서 승리한 민주당 후보가 만약 본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한다면 민주당은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민주당은 이처럼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 있는 심경일 것이다. 민주당은 이럴수록 당당하게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민주당은 박원순과 정정당당하게 대결해야 한다. 박원순의 정책 구상과 그 실천 역량을 세심하게 점검하고 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해서 여론의 지지를 끌어 올리려 노력하라. 박원순의 도덕성을 날카롭게 검증하라. 그러나 현 정권과 이에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만들어낼 풍문과 비방에 가세해서 부당한 흠집을 내려 할 경우 엄청난 여론의 역풍에 직면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될 경우 시정을 어떻게 꾸려 나가겠다는 건지 치밀하게 추궁함으로써 경선 토론이 야권 통합의 올바른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생산적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민주당은 노력하라. 불리한 경선 규칙을 과감하게 수용한 박원순 후보와 정당하고 공정하고 또 생산적인 경쟁을 벌여 그 결과 선출된 후보자의 본선 경쟁력을 대폭 끌어 올려 줄 수 있는 멋진 경선이 될 수 있도록 민주당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이 현재의 난국을 극복해서 민주 세력 통합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길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정정당당하고 멋진 경쟁을 통한 아름다운 패배 역시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민주당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구한말 고능선 선생이 백범 김구에게 말했듯 '벼랑에서 손을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 즉 '사즉생(死卽生)'의 결단과 당당함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민주당에게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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