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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봄나들이에 딱! 합천호 백리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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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도 봄나들이에 딱! 합천호 백리벚꽃길

2018년 4월 고을학교는 <합천고을>

2018년 4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54강은 경남 <합천고을>입니다. 가야시대의 다라국 유물과 고분군, 신라와 백제가 혈투를 벌렸던 대야성, 황강변의 아름다운 정자들, 남명 조식의 유적지, 그리고 더하여 합천호 백리벚꽃길을 둘러 볼 예정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4월, 남도 봄나들이에 딱인 합천호 벚꽃백리길Ⓒ합천군

고을학교 제54강은 2018년 4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 엄수합니다. 행락철 교통체증으로 일정차질이 염려되는데다 중간정류장 탑승자들의 어려움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오니 양지하시고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4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고령IC-초계읍치구역(옥전고분군/옥전서원/초계향교/합천박물관)-합천읍치구역(호연정/함벽루/신라죽죽비/강양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삼가읍치구역(삼가기양루/삼가향교/남명조식생가지)-합천호지역(합천댐물박물관/서의정/송씨고가/옥계서원/현산정/묘산묵와고가)-해인사IC-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합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4강 답사지인 <합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가야산과 낙동강이 품은 고을

합천은 경남의 서북부 산간내륙 지역으로, 동남쪽으로는 창녕군·의령군, 서쪽으로는 거창군·산청군, 북쪽으로는 경북 고령군·성주군과 접하며,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가야산 줄기를 본맥으로 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연이어져 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북부의 비교적 높은 가야산 부근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낮아진 산간분지가 북부 및 중앙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동부 및 남부는 지대가 비교적 낮은 편으로 황강 연안과 삼가지방에는 곡저평야가 펼쳐 있어, 비교적 넓은 분지가 발달하였습니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이 삼도봉을 지나 덕유산에 닿기 전에 거창의 초점산(1250m)에서 남쪽으로 수도산(1317m), 가야산(1,430m)을 잇는 지맥이 뻗쳐오면서 거창과 합천 지역에 험준한 고봉준령들을 일으키는데, 대표적인 산으로는 남산(1,113m), 두무산(1,038m), 오도산(1,134m), 비계산(1,126m), 숙성산(899m), 미숭산(757m), 황매산(1,108m), 대암산(591m) 등이 있습니다.

물줄기는 거창군 주상면 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한 황강(黃江)이 가야산에서 발원한 가야천(伽倻川)과 만나 남쪽으로 흘러 합천댐에 이르고, 다시 합천읍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낙동강에 합류하고 남강(南江)의 지류인 양천강(梁川江), 단계천(丹溪川), 사정천(射亭川), 묘산천(妙山川)도 합천군내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합니다.

▲함벽루(涵碧樓)는 고려 충숙왕 대 합주지주사(陜州知州事) 김영돈(金永暾)이 창건하였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합천군

삼국시대 격전지 대야성

대야성(大耶城)은 신라가 565년(진흥왕 25)에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매봉산( 90m) 정상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였습니다.

642년(진덕여왕 11)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한 곳이며 920년(경명왕 4)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으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악견산성(嶽堅山城)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산꼭대기 부분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석성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1439년(세종 21)에 쌓았다고 하며 둘레가 약 660m이며 임진왜란 때인 1594년(선조 27)에 곽재우(郭再祐)가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의 지시로 다시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성벽은 일부 허물어진 곳도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고, 성벽의 높이는 2.7m 정도이며 산꼭대기의 평탄한 지역에 건물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미숭산성(美崇山城)은 미숭산의 정상부를 둘러쌓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조선시대까지 계속하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거의 훼손되어 옛 모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1,643척, 성 안에 6개의 우물과 1개의 연못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덤들이 모여 있어 가야 때에는 이 고장이 중심지였다고 여겨지며, 신라 때 야로현이라 하기 이전에 적화(赤火)라 불리던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말에 미숭 장군이 조선왕조의 개국에 불만을 품고 항전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가야와 신라의 관계에서 생겨난 전설을 후대에 역사적 사건에 끌어다 붙인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 몽고와 왜구의 침입 때 주변 백성들이 이곳에 들어와 몸을 피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올리던 봉수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 같습니다.

백마산성(白馬山城)은 삼국시대에 토석(土石) 혼축으로 축조되어 계속 보수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공적인 파괴가 거의 없이 자연 붕괴된 부분을 제외하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내에서 수습되는 토기나 기와 등의 유물로 보아 초축이 삼국시대라는 점과 정상부에 전(塼)을 깐 대규모의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초팔성(傳草八城)은 대암산(591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돌로 쌓은 산성으로 이곳은 동쪽으로는 초계면, 북서로는 율곡면, 남서로는 대양면의 3개 행정구역이 접하는 곳으로, 주변의 많은 산 가운데에서 가장 높아 주위가 잘 바라보이며 초계분지 전역은 물론 멀리 의령군 부림면의 미타산성, 합천읍내와 황강 등이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입니다.

성의 길이는 대략 400m이고 폭은 150여m이고 동, 서, 북쪽은 경사가 매우 가파른데 비해 남쪽은 능선을 따라 길게 돌출한 말각방형(抹角方形)을 이루고 있으며 성의 상부가 훼손되었으나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금성산(錦城山) 봉수대는 금성산 정상부에 축조된 것으로, 자연 암반 주위에 돌을 쌓아 불구덩이[煙臺]와 건물을 조성하였고 주위에 건물을 지었던 터가 남아 있으며 그 안에는 봉수대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봉수대는 1778년(정조 2)에 설치되었으며 남쪽의 입암산(笠岩山)으로부터 봉화를 받아 북쪽의 소현(所峴) 봉수대에 연결하는 통로였다고 합니다.

▲옥전고분군은 낙동강 지류인 황강변, 1,000여 기의 가야고분군으로 합천 지역에 유력했던 다라국(多羅國)의 존재를 알려준다.Ⓒ합천군

옥전고분군, 가야 다라국(多羅國) 존재 알려줘

합천 지역의 다라(多羅) 또는 대량(大良), 초계 지역의 초팔(草八), 신번(新繁) 지역의 신이(辛爾) 등의 이름은 문헌에 일찍부터 등장하는 나라 이름인데, 고령 지방의 대가야(大加耶)나 창녕 지방의 빛벌가야[比自火加耶] 세력권에 속했던 가야연맹의 일원으로서 그 중에서도 합천 지역에는 상당히 유력한 다라국(多羅國)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1000여 기의 옥전고분군(玉田古墳群)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변의 구릉에 있는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가야고분군입니다.

발굴조사로 덧널무덤(목곽묘),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구덩계 앞트임식 돌방무덤(수혈계 횡구식 석실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확인되었으며 무덤 안에서는 토기류, 철제무기류, 갑옷마구류, 장신구류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옥전고분군은 최고 수장급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거의 망라되어 있는 가야 지배자의 무덤으로, 용봉환두대도나 철제갑옷, 금동장투구, 철제말투구 등은 가야문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분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신라는 555년(진흥왕 16) 창녕의 비사벌(比斯伐)을 병합하고 이곳에 하주(下州)를 둔데 이어, 562년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면서 합천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며 이어서 565년에는 창녕의 하주를 합천으로 옮겨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에 대비하는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의자왕의 명을 받은 윤충(允忠)이 대야성을 함락하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부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했는데, 이때 대야성(大耶城) 성주로서 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도독 김품석(金品釋)과 아내 고타소랑은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와 딸이었습니다.

순응, 이정 대사의 해인사 창건

676년(문무왕 16) 대야주는 강양군(江陽郡)으로 강등되어 삼기현, 팔계현, 의상현의 3개 현을 영현으로 거느렸으며 802년(애장왕 3) 순응, 이정 두 대사가 해인사를 창건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1018년(현종 9) 현종이 대량원군 시절 합천 옥산의 잠저에서 살았으며,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효숙왕태후)와 할머니 신성왕후의 고향이 합천이어서 강양군을 합주(陜州)로 승격시키고, 12속현을 두어 지군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1334년(충숙왕 3) 이 고을 사람인 정기수(鄭琪守), 변우성(卞遇成)이 왕실에 공을 세움으로써 초계현이 초계군으로 승격되고 지군사를 두었고 1373년(공민왕 22) 삼기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별칭 마장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398년(태조 7)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겼고 1413년(태종 13) 합주를 합천군으로 개칭, 강등하고, 삼기현과 가수현을 삼가현(三嘉縣)으로 통합하면서 현을 지금의 삼가지방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규합하여 고령, 성주 등지에서 왜군을 무찔렀고, 승군을 통솔하여 전공을 세우고 전후의 대일외교에도 크게 공헌한 유정(惟政)은 1610년(광해군 2)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서 입적하여 부도와 탑비가 홍제암에 남아 있으며 1644년(인조 22) 황강 변에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를 건립하였습니다.

▲초계향교(草溪鄕校)는 1628년(인조 6)에 세웠고 1800년대 초반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합천군

합천, 삼가, 초계에 읍치구역

합천에는 합천, 삼가, 초계 등 세 곳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합천향교(陜川鄕校)는 1411년(태종 11)에 창건된 후 1881년(고종 18) 홍수로 인해 합천군청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은 전학후묘의 배치이며 정문인 영귀루, 강학공간인 명륜당,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 서무가 남아 있고 경내에는 이 고장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향교를 지킨 정씨 부인의 사당이 있습니다.

초계향교(草溪鄕校)는 1628년(인조 6)에 세워졌고 1800년대 초반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건물은 전학후묘의 배치로 정문인 풍화루,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 등이 남아 있습니다.

삼가향교(三嘉鄕校)는 세종 때 세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지었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이며 건물은 풍화루,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만이 남아 있고 동쪽 담장에는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관리사, 사당, 재실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강양향교는 합천군 소재지에 처음 지었던 합천향교가 1881년(고종 18) 수해 때 합천군청을 야로면으로 옮기면서 함께 옮겼는데 1965년 유림들이 힘을 모아 지금 있는 자리에 세운 향교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향교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지은 향교입니다.

옥계서원의 율곡, 용암서원의 남명

옥계서원(玉溪書院)은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과 <해동연원록> 등을 소장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725년(영조 3) 지금 있는 자리에서 4㎞ 정도 떨어진 향옥동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867년(고종 6)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고 지금은 강당, 소원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등이 남아 있습니다.

용암서원(龍巖書院)은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제향되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에 노흠(盧欽), 송희창 등이 의논하여 삼가현의 회현(晦峴) 아래에 세운 회산서원(晦山書院)이 그 전신으로, 1601년(선조 34)에 서원을 재창건하면서 회산서원지가 협소하므로 황강 앞으로 옮겨 건립하였습니다.

1605년(선조 38)에 조식의 위판(位板)이 봉안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용암(龍巖)’이라 사액되었으며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1871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서원지에 1812년에 건립된 용암서원묘정비가 남아 있습니다.

묘정비는 1812년(순조 12)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삼가현감 오철상이 해서체로 썼는데 서원이 훼철되고 비만 남아 있다가 합천댐 공사로 그 터가 수몰되자 198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습니다.

송호서원(松湖書院)은 충숙공 문극겸(文克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777년(정조 1) 대병면 역평리에 세웠다가 1871년(고종 7)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것을 1957년에 사우 등을 복원하였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합천댐 건설로 1985년에 옮겨 복원한 것입니다.

문극겸은 고려시대 무신들이 집권한 시기의 문신으로,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군을 겸하고 무신들의 자문에 응하는 등 문무를 겸비한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연서원(伊淵書院)은 1587년(선조 20)에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고 1660년(현종 1) ‘이연(伊淵)’이라 사액되었으며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는데 지금은 강당만 남아 있습니다.

덕원서원(德源書院)은 1692년(숙종 18)에 이시애의 난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강열공 차운력, 문절공 차원부, 문목공 차포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원래는 호남승평에 세워 오천서원이라 했으나 1806년(순조 6) 청덕면 성태리로 옮겨 지어 덕원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옥전서원(玉田書院)은 초계 정씨의 시조이며 고려 전기의 학자인 정배걸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61년(철종 12)과 1981년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묘산 묵와고가(妙山 默窩古家)는 선조 때 선전관을 역임하였던 윤사성이 지었다고 전하는 옛집이다.Ⓒ합천군

최치원이 지은 농산정(籠山亭)

합천에는 가남정, 광암정, 사의정, 함벽루, 현산정, 농산정, 호연정, 삼가기양루 등 정자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농산정(籠山亭)은 신라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정자로,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에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며 휴식처로 삼았던 곳입니다.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22년 해체해서 원래대로 다시 지은 것을 1936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 당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렸으며 귀국 후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떠나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삼가기양루(三嘉岐陽樓)는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도계문루’라고도 불렸다고 하며, 동쪽에 동헌 터가 남아있는 점으로 보아 삼가현 관아의 문루였던 것으로 보이며 합천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누각 건물입니다.

함벽루(涵碧樓)는 고려 충숙왕 대 1321년 당시 합주지주사(陜州知州事) 김영돈(金永暾)이 처음 창건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대야성(大耶城)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黃江) 정양호(正陽湖)를 바라볼 수 있게 지어져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습니다.

이황(李滉), 조식(曺植), 송시열(宋時烈) 등과 같은 조선시대 최고 명유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에 걸려 있으며, 뒤 암벽에는 함벽루라 새긴 송시열의 글씨가 남아 있으며 특히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도록 지어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가남정(伽南亭)은 조선 명종 때 생존했던 문암 정인기, 금월헌 정인함, 우천 정인철, 낙제 정인지 4형제를 위하여 문중에서 1911년 4월에 지은 정자로, 정자 앞에는 금월헌신도비(琴月軒神道碑)와 수령 420년, 몸통 둘레 약 6m에 이르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호연정(浩然亭)은 선조 때 예안현감을 지냈던 이요당 주이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이 정자를 짓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후손들이 그의 덕을 추모해 다시 지었습니다. 정자 주변은 주이가 직접 심었다는 여러 그루의 대나무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광암정(廣巖亭)은 1884년(고종 21) 매와거사(梅窩居士) 권정기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아버지 권병덕을 위해 지은 정자로, 아버지의 호를 따서 광암정이라 하였습니다. 원래는 경관이 수려한 황강변의 자연암반 위에 있었으나 1985년 합천댐 건설로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지었습니다.

사의정(四宜亭)은 손님이 묵고 가기 위한 숙소로 1922년 은진 송씨 문중에서 지었습니다.
원래는 현재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으나 1985년 합천댐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현산정(玄山亭)은 현초(玄樵) 김시용(金時鏞)을 추모하기 위해 1926년에 건립한 ‘ㄱ’자형 2층 누각으로, 정사각형 모양의 정원과 대문이 있으며 원래는 4㎞ 떨어진 노파리에 있었으나 합천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88년 이곳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합천에는 고가, 사당, 재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구음재(龜陰齋)와 의병활동가들

구음재(龜陰齋)는 곽재우가 조직한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한 소요당 윤언례가 1575년(선조 8)에 세웠고 1810년(순조 10)에 다시 지었으며 곽재우 장군의 훌륭한 부하였던 윤탁과 세자좌빈객을 지낸 윤선이 뜻을 세워 공부하던 곳으로, 그들이 쓴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집의 구조는 ㄷ자형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이며 동쪽은 방 2칸, 누마루 1칸으로 육영재라 하고, 서쪽은 방 2칸, 부엌 1칸으로 신추당이라 하며 구음재 앞에는 창고인 고직사와 하인들이 살았던 행랑채가 있습니다.

소학당(小學堂)은 1472년(성종 3) 김굉필이 어린 시절 한훤당에서 독서와 수양에 전념한 곳으로, 한훤당 건물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1506년(중종 원년)에 김굉필,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과 소학당을 세웠습니다.

청금사(淸襟祠)는 이원경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92년(숙종 18)에 지은 사당인데 이원경은 고려지현관 직제학 금자광록 대부를 지낸 인물로 후에 벼슬을 사직하고 합천군 두상면 상상곡에서 살았습니다.

총현사(忠賢祠)는 이치, 이홍조, 이일로를 추모하기 위해 1895년(고종 32)에 지은 사당으로, 원래는 농산서원 안에 있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사라지고 충현사만 남아 있습니다.

월화당(月華堂)은 노극복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던 곳으로, 노극복은 정온, 심광세, 임진무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고 토론하였으며 그는 학식이 해박하여 인조가 등용하여 벼슬이 이조정랑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던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초계에 있는 고향집으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니 왕이 그의 집을 ‘월화당’이라 하였습니다.

주필각(駐蹕閣)은 월화당 뒤쪽에 있는데, 인조가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라고 하며 역마가 머물던 곳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산재(東山齋)는 조선후기 참봉을 지낸 윤순학(尹淳學)이 조부인 성균관 진사 윤상의(尹尙義)와 통정대부 비서감승(秘書監承)을 지낸 부친 윤영달(尹永達)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에 건립한 재실입니다.

팔심리 윤씨고가(八尋里 尹氏古家)는 1895년(고종 32)에 지은 집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채의 건물을 원형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 후기 전통 민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역평리 송씨고가는 은진 송씨 문중의 송종만이 1866년(고종 3)에 지은 가옥으로, 처음에는 유전리에 있던 것을 1986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지었습니다. 본채는 건넌방, 마루, 큰방, 부엌 순으로, 사랑채는 모방, 작은방, 큰방, 마루, 부엌 순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묘산 묵와고가(妙山 默窩古家)는 선조 때 선전관을 역임하였던 윤사성이 지었다고 전하는 옛집으로, 그 뒤 자손이 대대로 살고 있으며 처음 지을 당시에는 집터가 600평이었고 명당의 산기슭에 의지하여 높게 지었다고 하는데 한때는 가업이 융성하여 집의 규모가 백여 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산기슭에 마당보다 훨씬 높게 기단을 쌓고 'ㄱ'자형으로 지은사랑채가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 중 행랑채가 이어지고 거기에 중문이 있어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행랑채보다 한단 높은 기단위에 'ㄱ'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고 안채 왼쪽 뒤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생가지(生家址)는 남명 조식이 태어난 곳으로, 조식은 경상좌도의 대학자 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그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특히 의(義)와 경(敬)을 존중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뇌룡정(雷龍亭)은 1501년(연산군 7) 남명 조식이 지은 정자로, 1900년대 초 허위 등이 고쳐 지었는데, 뇌룡정이란 <장자>에 나오는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 즉 “주검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에서 따온 것으로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리라는 남명선생의 가르침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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