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 선생을 독립유공자 선정 심사에서 탈락시킨 국가보훈처가 "1941년 12월에 국방헌금 150원을 기부한 사실이 그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이 됐다"고 밝혔다. 일제 말 조 선생의 행적이 모호해서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 정관회 공훈심사과장은 11일 저녁 CBS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해 "이런 사실들을 좀 더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이번 광복절 포상에서 보류가 되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 과정은 국가보안법으로 사형당했다가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조 선생에 대해 "그 전에는 실정법에 위반이 되어 있는 그런 사항이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기 전에는 그 사안으로 인해서 계속 보류가 되고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다"면서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 금년도에 포상심사를 다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간첩죄, 광복 이전에 (좌익) 활동했던 그런 사항은 (독립유공자 선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면서 "그분들도 그때 당시에도 그것도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 이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경우에도 해방 후 북한과 관련된 행적이 없음을 전제해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있다.
정 과장은 '조 선생의 전체 행적에서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150원 국방헌금 그거 하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150원이 요즘 돈으로 얼마 정도냐'는 질문에는 "그 때 교사 봉급이 한 50원 정도 했다"고 답했다. 그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지 않냐'는 질문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액수로 봐야 된다"고 답했다.
정 과장은 "물론 (조 선생의)그 공적은 인정이 된다"면서도 "다른 이유로 번복할 수 있는 그런 자료가 나온다든지 이렇게 될 때까지는 보류를 시켜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어떻게 소명을 할 수 있냐'는 물음에 "저희도 난감한 부분"이라고 답하면서 '조 선생이 공산당 활동을 하던 시기였고, 아마도 이름만 빌려줬을 것이라고 유족들이 주장을 하면 되냐'는 질문에는 "소명…그런 주장을 가지고서는…"이라며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소명할) 무슨 자료가 하나도 안 남아있으면?'이라는 사회자의 연이은 질문에 정 과장은 "계속 보류가 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 되겠다. 자료가 안 나오면 논의도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정 과장은 "(독립유공자 선정) 심사를 세 번 하는데 거기에서 의결된 사항이다"면서 "포상의 보류는 1심, 2심, 합동심 까지 가서 의결을 하는데 (심사위원) 명단을 밝힐 순 없다"고 답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복역한 뒤부터 광복 때까지 사회주의 조직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6년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공산당과 결별한 뒤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을 거쳐 2·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평화통일론'을 내걸고 진보당을 이끌며 이승만 대통령과 경쟁해온 조 선생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처형됐다.
꾸준한 명예회복 운동이 진행된 끝에 지난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 선생과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을 국가에 권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1월 52년 만의 재심을 통해 조 선생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최근 보훈처는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 대해선 복권됐다는 이유로 일부 민간심사위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서면심사를 통해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해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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