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가 어제와 오늘 연달아 보도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진보의 재앙' 주장을 전하고 칭송하고 확산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문제와 관련해 '임금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도 안 된다면 해고나 전직을 시킬 수밖에 없다'는 그의 견해, 그리고 '정리해고 철폐로 집약되는 노동권 보호를 과도하게 주장하면 후세대 노동권과 힘없는 중소기업의 노동권이 크게 훼손된다'는 그의 주장을 "경청할 만한 고언"이라고 평가한 뒤 '경청'한 사람들이 크게 '공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도 어제와 오늘 연달아 보도했다. 이제는 '따뜻한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4.0'이라며 "(그) 주체는 자본주의의 키 플레이어, 시장과 기업이 돼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곳간을 비우는 식의 정부 복지는 한계가 있으므로 시장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의 독과점 구조가 대기업에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며 공생을 촉구했고, 비정규직의 임금을 정규직의 70%까지는 올려야 하고 그들에게 4대보험만이라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를 비중있게 전했다.
▲ 3일 '조선일보'가 이틀 연속 '자본주의 4.0' 시리즈를 보도했다. ⓒ프레시안 |
'중앙일보'의 논조는 참으라는 것이다. 시장과 기업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현실이니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논조는 '맞수'다. 못 참겠다는 노동계에 정면대응하는 것이니까 '맞수'다.
'조선일보'의 논조는 참으라고 윽박지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시장논리로는 풀 수 없는 현실이고,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이 더 난무할 테니 차제에 예방책을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논조는 '선수'다. 노동계가 참을 만큼 시장과 기업이 베풀라는 것이니까 '선수'다.
어제 오늘에 와서야 드러난 차이가 아니다. 두 신문의 논조는 이미 그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7월 18일이었다. '중앙일보'는 '사설'을 통해 "정치권이 헌법 갖고 장난칠 때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이 '헌법 119조 경제민주화특위'를 만들고,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가 "우리 당의 서민정책은 헌법 119조 2항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이렇게 비판하며 선을 그었다. 헌법 119조 1항과 2항이 충돌하곤 하는데 "자유시장경제(1항)를 기본으로 하고, 경제민주화를 위한 국가의 간섭(2항)도 이런 기본적인 범위 안에서 엄격히 제한돼야 한다는 게 헌법재판소는 물론 헌법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했다.
6월 27일이었다. '조선일보'는 포퓰리즘을 둘러싼 정치권과 재계의 충돌을 전하면서 양시양비론을 폈다. "재계·정치권의 갈등은 선거를 앞두고 재계와 각 정당 간의 관계가 새롭게 재설정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일"로 규정한 뒤 "정치권은 대기업을 때릴수록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고 "재계 역시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할 만큼 다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실감하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의 사설은 '배째라'는 것이었다. 정치권이 포퓰리즘에 물들어 기업을 치는 것은 자유주의시장 원리에 반하는 것이니까 자중자애 하라는 주장이었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지갑째라'는 것이었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 추세를 희석시키기 위해 기업이 알아서 베풀라는 것이었다.
쓸 데 없다. '중앙일보'가 저런 논조를 펴는 것은 재벌과의 '특수관계' 때문이고, '조선일보'가 저런 논조를 펴는 것은 재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식의 구분법은 의미 없다. 딱히 틀린 분석은 아니지만 단면적이다. 생산성이 없다.
두 신문의 논조를 생산적으로 읽으려면 두 개의 포인트를 잡아야 한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의 결은 완전히 다르지만 지향점은 같다는 사실, 즉 정치권의 포퓰리즘 차단이라는 목적만큼은 같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복지논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필연적으로 재벌문제와 노동문제가 딸려오게 돼 있다는 사실 또한 놓쳐선 안 된다. 복지문제가 불거진 근본적인 원인이 고용 없는 성장, 나눔 없는 성장에 있고, 그 장본인이 바로 재벌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대별하면 평가척도가 마련된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가운데 어느 쪽이 좀 더 노회한 현실감각을 갖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물론 그 답은 '조선일보'다. '중앙일보' 식 '맞수'로 가면 격화시킨다. 재벌문제가 이슈화 되는 데 기름을 부어 판을 키운다.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의 '맞수'는 '하책'이다. '조선일보' 식 '선수'가 주효하면 희석시킨다. 복지논쟁에서 촉발된 재벌개혁 의제를 희석시키면서 내년 대선과 총선의 전선이 전면적인 경제사회개혁 프레임 아래서 짜이는 걸 방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선수'는 '상책'이다.
가정해 보자. '조선일보' 식 '선수'가 먹혀들면, 재벌이 일정하게 '떡고물'을 풀면 어떻게 될까? 그럼 '진보의 재앙'이 닥쳐온다. 복지 의제와 재벌개혁 의제가 분리됨으로써 경제사회개혁 이슈의 폭발력이 반감된다. 더불어 갇힌다. 진보의 복지 의제가 홀로 구석에 갇혀 난타를 당한다. 각종 예산수치를 앞세운 보수의 공세에 코너로 몰린다.
'진보의 재앙'을 막으려면 '선수'를 쳐야 한다. '조선일보'보다 더 강한 '선빵'을 날려야 한다. 재벌개혁 의제를 정치 슬로건화 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어찌된 일인지 멀뚱히 구경만 한다. 한진중공업처럼 사안이 불거질 때만 사안별로, 즉자적으로 대응한다. 재벌개혁 이란 큰 전선을 펼친 뒤에 그 하위고리에 한진중공업 문제를 놓아야 그것이 '고리'가 되는데 진보는 넓게 내다보지 못하고 머리만 들이민다.
그나마 머리만이라도 일관되게 들이밀면 나으련만 그마저도 못한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희망버스 동승 논란을 자초해 초를 치는 게 단적인 예다.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그 어느 정당보다 재벌개혁 의지에 공을 들여야 하는 그들인데 그들에게서 전해지는 소식은 주야장청 '통합' 뿐이다. 재벌개혁 의제를 펴놓고 '통합' 논의를 가져가면 그 당위성과 필요성이 좀 더 크게 부각될 텐데 진보정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밤을 새우며 통합 절차만 따지고 날을 지새며 통합 날짜만 저울질 한다.
물론 고민은 있을 것이다. 재벌이 '공공의 적'이 돼 가고 있다지만 제한적인 게 엄연한 사실이니 고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재벌개혁에 공감하면서도 노동연대엔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국민의 정서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 양가적 정서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좌고우면하는 것일 게다. 따지고 보면 손학규 대표의 희망버스 동승 논란도 국민의 양가성 위에서 줄타기를 한 것일 게다.
하지만 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진보를 둘러싼 국민의 양가성을 탓하는 것이 결국은 진보의 무능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야권이 연대를 모색하는 이유는 '반한나라당' 전선 필요성 때문이다. 야권이 연대를 실현시키는 동력은 국민의 '반한나라당' 정서다. 마찬가지다. 국민이 노동연대를 모색하려면 '반재벌' 전선의 필요성을 각인해야 하고, 국민의 노동연대를 실현시키는 동력은 국민의 '재벌개혁' 정서다.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진보의 최근 모습은 자전거를 타기도 전에 넘어질 것부터 걱정하는 '왕초보'와 너무 많이 닮아있다.
* 이 글은 '미디어토씨'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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