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교수님에게
손호철 교수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장대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입니다. 비가 오는 소리를 좋아하지만 너무 버거운 폭우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멍들게 하고 마는 것만 같습니다.
진작 답장을 드렸어야 하는데 본의 아니게 결례를 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알아서 제 방향을 잡고 굴러 갈것 같고, 그러다보면 남들이 보기에는 진보진영 내부의 설전처럼 보일 일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까 했던 탓입니다.
손호철 교수님이나 김세균 교수님 모두 인간적으로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이라 서로의 견해 차이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일 같은 것은 없으리라 여겼고, 또 생긴다 해도 별반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두 분 모두 진보대통합의 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계신 마당에 설혹 뜻이 맞지 않는 대목이 있다고 해도 그걸 논쟁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진보 대통합의 길이 가급적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고 순탄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진보 대통합과 관련해서 중요한 정치적 움직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진보교연과 진보신당이 국민 참여당의 진보 대통합 합류에 명확한 반대를 표명하고 나선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 있어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다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 글 ("좀 더 통 큰 진보정치는 없는가?" 6월 24일)은 그런 점에서 두 분 선생님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의 자세 변화를 촉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과정상 비판적 대치가 피할 수없는 대목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저의 중요관심사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김세균 선생님에 대한 실명 거론도 하지 않았고, 단지 손호철 교수님의 글에 대한 생각만 정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진보양당의 정치적 긴장에 대한 우려
사실상 제가 문제를 삼으려 했던 것은 진보신당의 조승수 대표의 발언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진보 양당 사이의 긴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아 학자들의 토론으로 그치려 했던 것에 그 글의 취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손호철 교수님의 글을 인용해서 토론의 대상으로 올렸던 것입니다.
손 교수님은 제게 보내신 답변에서 손 교수님이 쓰셨던 칼럼의 집필 동기를 밝히셨습니다.
그 동기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진보신당이 이 문제(*합의서 논란)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이에 대한 진보신당의 주요 결정이 있기 바로 전날,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합의문을 왜곡하면서까지 이 합의문의 의의를 당내 설명하고 있는 조승수 대표를 공격하는가 하면, 연석회의에서 합의한 바 없는 국민 참여당과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두 가지 문제가 제기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합의서 왜곡 논란의 내용과 주체 그리고 둘째는 국민 참여당의 진보대통합 합류의 조건에 대한 논쟁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손 교수님과 논쟁을 벌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그에 기초해서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하고 생각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조승수 대표의 발언에 대해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에 대한 이정희 민주 노동당 대표의 발언은 그 보다 앞서 6월 8일 불교방송에서의 공개발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발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쟁점 사안은 패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리고 대선에서의 정치 방침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대북한 문제를 어떻게 할 건가, 이렇게 쟁점이 됐는데요.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3대 세습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진보정당은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되는지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내린 결론은 새로운 진보정당은 북한을 6.15 공동 선언 정신에 입각해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드는 상대로 인정을 하지만 3대 세습 문제는 우리 국민들의 정서와 일반 민주주의 정신에 비춰볼 때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북한을 대화상대로 존중하면서도 비판할 것은 당연히 비판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인했습니다."
이걸 합의서 내용과 비교해보지요.
"진보정치 대통합으로 설립될 새로운 진보정당은 남과 북 어느 정부의 정책이든 한반도 평화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기여하는 정책 및 민주주의와 인권, 생태 등 각 분야의 진보적 가치를 신장시키는 정책은 지지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에 반하는 정책은 비판하는 정당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6.15 정신에 따라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북의 권력 승계문제는 국민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견해를 존중한다."
조승수 대표는 "......비판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합의서 어디에도 그런 확인에 대한 합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진보 양당에게 매우 중요한 논란거리라는 점에서 섬세한 전달이 필요한 대목인데, 조승수 대표의 발언에서는 "견해의 존중"이 "확인"으로 바뀌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손 교수님,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합의서 해석논쟁은 끊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합의서 원문과 다른 주장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정희 대표의 발언을 손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합의서를 왜곡하면서까지 조승수 대표를 공격"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저로서는 이정희 대표가 가만히 있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이 문제를 너무 과도하게 거론해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점도 고려했어야 했지요.
그러나 굳이 사실관계를 따져보자면 합의서 왜곡 논란과 주체 그리고 이로써 생긴 파장은 그 책임 소재가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조승수 대표에 대해 새삼 비판적인 문제 제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잘 해나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유시민 대표,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 않은가?
두 번째, 국민 참여당의 진보 대통합 합류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저는 진보연이나 진보신당이 국민 참여당을 과도하게 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유시민 대표나 국민 참여당의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시민 대표는 이미 여러 경로와 자리를 통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자세도 그 정도면 진지하다고 보입니다. 그것이 혹여 만족스럽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변화들이 하나하나 쌓여가면서 새로운 정치 환경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보지는 않으십니까?
유시민 대표가 마음에 들건 아니건 그는 개혁적 정치변화를 원하는 이들에게 대선 주자급 지지를 받고 있고, 이들을 진보진영 밖으로 내몰아 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봅니다. 이는 정치 공학적 판단이 아니라, 그 지지 세력의 정치적 열망을 진보진영이 담아낼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계속 옹호하면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세력은 당연히 새로운 진보정당에 합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시민 대표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유지하겠다, 과거에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자꾸 이러냐?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객관적으로 확증될 수도 없는 그 의도의 속셈까지 거론해서 비판하려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태도는 자칫 독선적인 독심술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김대중 정부시절이나 노무현 정부 시절 모두, 신자유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치열한 비판을 나름대로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아무리 심했다 해도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결과적으로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체제에 대한 애매한 자세는 저 자신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진보연 또는 손호철 교수님 같은 분의 맹렬한 비판이 국민 참여당의 자세 변화를 일정하게 이끌어낸 측면도 있다고 여겨지진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요?
참여당의 진보대통합 합류
연석회의는 국민 참여당이 진보대통합에 합류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면 연석회의에서 논의한다고 합의한 바 있습니다. 또한 그러기 전에 국민 참여당과 정치적 스킨쉽은 금지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정희 민노당 대표와 유시민 참여당 대표의 어울림은 서로 차이가 나는 정당간의 사전 조율과 정치적 스킨쉽 차원에서 도리어 바람직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서 연석회의의 결론도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꼭 한 마디 참지 못하고 짚고 넘어가자면, 이에 대한 일부의 성폭력에 준하는 여러 거칠고 민망한 논평은 진보진영에 대한 사회적 존경도 훼손했다는 점에서 필히 반성해야 할 대목이라고 봅니다.
참여당은 진보대통합 합류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 다음 수순은 연석회의에서의 논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공론의 장을 마다하고 미리 일방적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연석회의의 합의정신과도 어긋나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유시민 참여당 대표에 대한 정치적 변호나 지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 마다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 가능성은 있다고 보입니다.
참여당과 관련해서 무 자르듯 잘라서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 그걸 통해서 진보세력의 강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깊고 차분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유시민 대표나 참여당에 대한 비판은 제 스스로 이미 한 바가 있고, 손교수님의 비판을 포함해서 이런 것들이 모두 한데 녹아나면서 서로 새롭게 만나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가요?
버린 돌도 머릿 돌이 될 수 있습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면서 서로 함께 일어나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갈 수도 있습니다. 때로 내리는 비가 땅을 풍요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폭우는 우리의 근심을 깊게 합니다.
정말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보 대통합이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들에게 현실의 희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손호철 교수님, 우리 조만간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면서 허심탄회하게 마음 나누지요. 역사를 향한 뜻이야 우리 모두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백기완 선생님과 함께 노나메기 운동을 하고 계신 김세균 교수님도 함께 모시고 훈훈한 자리 만들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들의 후배이기도 한 "유시민 군"을 부르면 괜히 분위기 이상해질까요? 그래도 불러 질타할 것은 따끔하게 질타하고 격려할 것은 따뜻하게 격려한다면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네요.
우리가 정작 미워하고 분노할 대상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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