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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참선비 김준엽 선생님의 영전(靈前)에서…

[추도사]생애에 인간과 스승과 학자의 도리를 다한 선생님.

시대의 사표(師表)라는 헌사가 무색치 않은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8시에 열린다. 9시 발인 후 김 전 총장은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일제 학병 신분에서 6000리 장정을 감행해 광복군에 투신하고, 해방 후에는 중국학과 사회주의 연구의 장을 열었고, 군부 독재 시기에는 정권에 맞서면서 학생들을 보호하는 교육자로, 총리 자리도 마다했던 김 전 총장의 90여 년 성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있다.

'가족장을 치르라'는 유지를 따라 조촐하게 진행된 장례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울림은 더 크다.

김 전 총장의 영결식을 앞두고 민주당 김영춘 최고위원이 추도문을 보내왔다. 김 전 총장과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김 최고위원의 연은 깊다. 1984년 부활한 민주적 학생회의 첫 총학생회장이었던 김 최고위원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력을 김 전 총장이 거부했던 것. 이는 이듬해 전무후무한 총장 퇴진 반대 시위로 까지 이어졌다.

김 전 총장과 인연을 회고하면서 존경을 표한 김 최고위원은 추도문에서 "선생님께서 병문안 온 이 정부의 고관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전했다. < 편집자 주>


▲ 세 사람의 광복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나남출판

"나는 자네들이 애국자라고 믿는다. 정부의 압력에 대해서는 총장과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 막을 테니 여러분도 학교의 명예를 지켜 달라"

이 말씀은 1984년 9월 고려대학교 총장실에서 김준엽 총장님이 당시 불법으로(?) 직선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이었던 전두환정부는 학도호국단을 임의로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부활시킨 고려대학교에 갖은 압력을 가했고, 그 첫번째 요구는 저를 제적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총장님은 무려 3개월 동안이나 이 압력을 거부했고, 오히려 학생들이 직선으로 뽑은 총학생회를 인정하는 것이 순리이며 교육적인 처사라고 정부 요로에 건의했습니다.

이같은 갈등의 결과 정부는 석달 후 제가 구속 기소되고 나서 겨울방학을 틈타 총장 퇴진을 강요했습니다. 1982년 총장 취임 직후에 대학 본관에 정보기관의 사찰 사무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장 철거를 지시하셨던 분인지라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미운 털이 박힐 대로 박힌 김 총장님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가 봅니다. 방학 중에도, 그리고 신학기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은 연일 대대적인 총장 퇴진 반대시위를 벌였지만 군사정권의 '손봐주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김준엽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고, 나중에 "그것은 전두환 정권이 나에게 준 훈장이었다"라고 술회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용기와 강단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일찍이 청년시절부터 길러진 정의감과 애국적 결단성의 발로였습니다. 선생님은 일제 말기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 중에 학병으로 강제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파병되었지만 한 달 만에 강소성 서주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투신하셨습니다. 당시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탈주병들의 목숨을 건 6천리 장정은 선생님이 총장 퇴진 후에 쓰신 회고록 <장정>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과연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으로 선생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8.15 광복 이후에는 투사가 아니라 철저히 학자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귀국한 후에도 홀로 중국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셨고, 194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적을 둔 이후로는 오직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일로 매진하셨습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창설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일찍이 1970년대에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의 설립에도 앞장섰습니다. 비전과 통찰력, 그리고 추진력이라는 면에서 당신은 학문공동체의 탁월한 경영자이셨습니다. 고려대 총장이 되신 것도 그러한 능력과 인품을 동시에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학문 외길의 자세는 총장 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당선자가 선생님을 자기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모시고자 3시간 가까이 설득을 하였으나 당신은 끝내 고사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정권들도 선생님을 총리로 모시고자 애썼으나 결과는 항상 실패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이유로 "얼굴마담이나 하는 대독총리가 뭐라고 학자의 명예를 더럽혀야 하느냐?", "우리 사회에 나 한 사람쯤이라도 벼슬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고 후학의 존경을 받는 원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국의 상황에서는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아가 싸웠고, 나라를 되찾은 후에는 학문입국의 일념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정진하셨던 분, 저는 김준엽 선생님이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인간과 스승과 학자의 도리를 실천한 '참 선비'셨다고 추억합니다.

몇년 전부터는 연초 3일간 세배객들에게 명륜동 자택을 개방하던 오랜 전통을 닫으셨습니다. 그렇게도 강철같던 선생님의 건강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빠지신 탓이었지요. 그래도 담배만큼은 "난 깊이 삼키지 않으니까 괜찮아" 하시면서 끝까지 인생의 동무삼아 즐기시던 선생님의 직접 사인이 폐암이셨다니 황망할 따름입니다. 만 91세셨으니 장수하셨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좀더 오래 사셔서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후학들과 우리 사회의 큰 언덕으로 버텨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련남아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 병문안온 이 정부의 고관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이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몰아 말씀하시면서도 그분은 나라 걱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 분이 가셨으니 우리는 이 황막한 시대에 어디서 참선비, 참스승의 사표를 찾아야할 지 실로 막막할 따름입니다. 결국 저처럼 남은 후학들이 해야할 일은 턱없이 모자라는 역량과 인격이지만 선생님의 모범을 따라 애국과 후생(厚生)의 사업에 전력하는 길 뿐이리라 믿습니다.

김준엽 선생님, 이 나라의 현대사 그대로 파란많았던 한 생애 동안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제 천상에서 편안히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면서 우리 겨레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뵈올 그날까지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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