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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수명(山紫水明)! 남한강이 빚어낸 천하 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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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산자수명(山紫水明)! 남한강이 빚어낸 천하 명승

2018년 2월 고을학교는 <단양고을>

2018년 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52강은 삼국시대 남한강변의 요충지로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가 잦았고 도락산 자락 선암계곡에 암각문이 즐비하게 새겨져 있는 단양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운무 속 도담삼봉. 정도전의 일화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단양군

고을학교 제52강은 2018년 2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2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단양휴게소-단양적성-단양IC-단성면(사인암/사기장/상선암/중선암/하선암)-적성면(단양향교/탁오대암각자/신라적성비)-단양읍(도담삼봉/석문)-점심식사 겸 뒤풀이-영춘면(화전민촌/영춘향교/북벽)-소백산자락길-단양IC-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단양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2강 답사지인 <단양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예부터 절경으로 손꼽혀온 고을

단양(丹陽)은 한반도의 중심지역인 충북의 최북단에 위치합니다.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 동쪽으로는 경북 풍기, 남쪽으로는 경북 예천과 문경, 서쪽으로 제천과 경계하고 있으며, 단양을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는 남한강이 어우러져 빚어낸 산자수명한 자연경관으로 예로부터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고을입니다.

산줄기는 동쪽으로 1000m가 넘는 형제봉(1177m), 국망봉(1421m), 소백산(1439m), 제1연화봉(1394m), 제2연화봉(1357m), 도솔봉(1314m), 묘적봉(1148m)이 백두대간을 이루고 제2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의 안부에 죽령이 있으며 남쪽에는 황정산(959m), 도락산(964m)이 선암계곡을 빚어내고 서쪽에는 금수산(1016m), 제비봉(721m) 그리고 옥순봉과 구담봉이 남한강을 굽어보며 절경을 뽐내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령천, 단양천, 금곡천 등과 합류하여 남한강을 이루고 23.7㎞의 길이로 단양을 관통하여 충주호로 유입됩니다.

죽령(竹嶺)은 158년(신라 아달왕 5)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신라 장군 죽죽(竹竹)이 개통하였다고 하는데 예로부터 서울과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이 일대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죽령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영남에서 서울로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였고 영남좌도 고을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주로 넘던 고개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466년(세조 12) 세조가 오대산 월정사 위에 있는 상원사를 확장하고 임금의 원당사찰로 만들면서 원래는 사찰의 범종이었으나 억불정책으로 절이 쇠퇴하자 안동도호부 남문루에 걸어두고 시간을 알리던 3천 3백 근의 동종을 옮겨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종은 경주의 에밀레종보다 100여년 앞서 주조된 것이며 금, 은, 동, 주석을 녹여 만든 것으로 높이 1.4m, 직경 1.2m로 용신을 틀로 하여 사방을 구분할 수 있는 비천선녀무늬가 있고 사방에 각각 가로 세로 3개씩 배열된 젖꼭지 36개가 돌출하여 종의 청아한 울림을 떨리게 잡도록 함으로서 은은하고 끊어질듯하면서도 백리까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동종을 나무수레에 싣고 500여 명의 호송원과 100여 필의 말이 끌며 상원사로 옮기던 중 죽령고개를 10여m 남겨두고 수레가 꼼짝하지 않자 죽령고개를 넘느라 힘이 빠져서 그렇겠지 하였으나 5일이 지나도록 움직일 기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운종도감(運鐘都監)은 100살도 못사는 사람도 고향 떠나기를 아쉬워하는데 하물며 800살이 넘은 범종이 죽령만 넘으면 다시는 못 볼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여 종에 달린 36개의 젖꼭지 중 한 개를 잘라서 고향으로 보내 안동 남문루 밑에 묻고 정성껏 제를 올린 다음 죽령에 돌아와서 “이제는 길을 떠나시죠”하며 종을 당기니 마침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암각문이 즐비한 사인암Ⓒ단양군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했던 영토확장 경쟁

단양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로 오랜 기간 대치하며 싸웠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때 쌓은 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온달산성(溫達山城)은 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의 무용담과 함께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산성은 길이 97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북, 동, 남 세 곳에 문터가 있으며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내밀어 쌓은 치(稚)는 북문 근처에 한 곳, 남서쪽에 두 곳, 모두 세 곳에 있습니다.

옛 기록에 우물이 하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고 근처 주민들 이야기로는 우물을 메웠다고 하는데 그 터인지는 몰라도 성안 가운데쯤에 물이 솟는 곳이 있습니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단양적성(丹陽赤城)은 성산(城山, 323.7m) 정상부에 소백산 지맥의 북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은 신라시대 산성입니다. 동쪽은 죽령천(竹嶺川), 서쪽은 단양천(丹陽川)이 북쪽으로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여 3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자연 해자(垓字)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쪽으로 4.5㎞ 떨어진 곳에는 공문성(貢文城)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가 바라다 보입니다.

1978년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이 산성이 법흥왕, 진흥왕 때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의 상류지역으로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팽창시키는 요충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성 안에서는 신라 토기와 기와 조각이 주로 확인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 토기 조각과 고려시대의 토기, 청자 조각도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산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으로, 말안장 모습을 한 테뫼식 석축산성이며 북서쪽은 경사가 급하고, 남동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는 923m이고,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북동쪽 끝에 높이 3m 가량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 등 세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적성을 점령했을 때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운 것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강줄기를 자연해자로 삼은 신라시대 산성인 단양적성Ⓒ단양군

‘인류문화의 발상지’ 같은 고을

단양은 선사시대부터 풍요한 삶의 터전을 제공한 지역으로 ‘금굴’은 70만 년 전부터 3천 년 전까지의 고른 유물층을 가지고 있어 선사문화연구의 표준유적이 되고 있으며 ‘수양개 지역’은 석기제작소가 50군데나 발견된 세계적인 규모의 선사유적이고 ‘구낭굴 유적’과 ‘상시 바위그늘 유적’에서도 인류문화 태동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니 단양은 그야말로 인류문화의 발상지라 할 만한 고을입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후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는데 진흥왕은 적성(단양)을 차지하고 이를 기념하여 신라적성비를 세웠으며 고구려의 장수 온달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출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단성(온달산성) 아래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충렬왕 때 현민이 합단(哈丹)의 침입에 맞서 싸운 공로로 감무가 설치되었고, 충숙왕 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단양 장씨, 단양 우씨 등을 중심으로 고려 후기 융성했던 문화유적이 적성 현곡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우탁은 역학에 정통하여 역동 선생으로 불리며 유림의 근본이 되었고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명종 때 황준량은 상소를 올려 세금을 감면시킴으로써 도탄에서 백성을 구한 목민관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또한 김홍도, 정선, 최북, 이방운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조선의 화가들이 단양의 명승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으며, 이황, 이이, 정약용, 권섭, 김병연, 김정희 등 당대의 명현들이 시문과 기행문을 남겨 단양의 경승을 칭송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학 초창기 전국이 16개의 접이었을 때 그 중에 단양지역이 포함되었으며 민사엽이 접주였습니다. 또한 해월 최시형은 남면 샘골 여규덕(몽양 여운형의 큰할아버지)의 집에서 1881년 <용담유사>를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불의에 대한 의분을 누르지 못하고 한말 의병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지역 또한 단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영춘 남천 출신의 의병장 김상태가 있습니다.

단양의 읍치구역은 단양과 영춘면에 있었습니다.

단양향교는 조선 태종 15년에 창건된 후 명종 때 퇴계 이황이 지금의 자리인 단성면 상방리로 이전하여 명륜당을 건립한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30명의 교생들이 공부를 하던 곳인데 갑오개혁 이후 봄, 가을 석전대제만을 지내고 있습니다.

영춘향교는 1399년(정종 1)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이후 1614년(광해군 6)에 남천리로 옮겼고 한 차례 화재로 1791년(정조 15)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단양의 옛 읍치구역을 보여주는 겸재 정선의 <봉서정도>. 2층 누각의 봉서정 옆에 이요루가 있고 뒤편에 객사 관아 향교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앞쪽에 우화교가 보인다.Ⓒ단양군

겸재 정선의 화첩

정선(鄭敾)은 36세 때부터 74세 사이에 총 12권의 화첩을 제작했으나 그중 9권만 현존하고 3권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가 지난 2003년 정선의 13권째 화첩으로 <구학첩(邱壑帖)>으로 불리는 새로운 화첩이 발견되었습니다.

화첩에는 단양 읍내의 정자를 그린 봉서정(鳳樓亭), 도담삼봉을 그린 삼도담(三嶋潭),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하선암(下仙岩)이 소재로 등장하며, 친구이자 서인 노론계 문인이었던 김광수(金光遂)의 부탁을 받고 그렸는데 화첩에서 ‘구학(丘壑)’이란 언덕과 골짜기란 뜻으로 산과 물[山水]을 의미합니다.

봉서정(鳳棲亭)은 1602년(선조35년) 단양군수 이준이 지은 것으로 겸재의 <봉서정도(鳳棲亭圖)>를 들여다보면 봉서정은 관청 앞에 지은 정문이고 그 뒤로 몇 개의 건물이 보이는데 동헌과 객사, 그리고 향교 건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봉서정 옆에 2층으로 된 건물이 이요루이며 이요루와 봉서정 옆으로 난 길은 동헌으로 통하게 되어있고 그 길로 이어진 다리가 우화교입니다.

이요루(二樂樓)는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 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편액은 안평대군의 글씨입니다.

어질다[仁] 함은 바른 생각을 굳게 지키며 한뜻으로 세상을 견딜 수 있어야 하니 산(山)처럼 우뚝 솟아 풍상을 견뎌야 할 것이고, 지혜롭다[知] 함은 세상의 흐름과 사물의 이치를 살필 수 있어야 하니 물(水)처럼 낮은 데로 흐르면서 막힌 곳을 만나면 피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화교(羽化橋)는 단양 읍내를 연결하는 다리로, 죽령고개를 넘어온 경상도 사람들이 충주 쪽으로 가는 대로(大路)에 있는 큰 다리입니다. 양쪽에 난간은 전혀 없고 나무로 놓았으니까 발이 빠지기도 하고 술을 먹고 헛디뎌서 떨어져 다치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다리의 이름은 날개가 돋아나 신선이 되는 것을 비유한 우화등선(羽化登仙)에서 나온 말로, 1753년(영조 29)에 단양군수 이기중이 섶다리를 돌다리로 새롭게 정비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화교신사비(新事碑)를 세웠는데 큰 홍수로 다리는 유실되고 현재는 비만 남아 있습니다.

바위마다 새겨진 암각자들

탁오대(濯吾臺) 암각자는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정사에 시달린 심신을 풀고자 매일 이곳에 와서 손발을 씻으면 마음까지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탁오대라 명명하고 친필로 각자하였다고 합니다.

그 어원은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흘러가는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흘러가는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 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 濯吾足)”에서 따 왔다고 하나 한편으로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일 수도 있는데 김일손은 바로 퇴계가 근무하던 이요루에 와서 여행기를 남기고 갔습니다.

복도별업(復道別業) 암각자는 명종 때 단양군수를 재임했던 퇴계 이황이 암석에 해서체로 친필 각자한 것으로 이곳의 복도소(復道沼)는 퇴계가 단양군수 재임 시 관개(灌漑)를 목적으로 만든 보(湺)로써 물이 맑고 깨끗하여 목욕을 하면 몸과 마음까지 깨끗해질 만큼 훌륭하여 퇴계가 이곳에 별업을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복도(復道)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뜻하며 인(仁)의 실천방안으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자아를 의지로 극복하는 것이 극기이고, 그리하여 지극한 예법을 갖춘 군자의 완성적 인격에 도달하는 것이 복례라 할 수 있습니다.

복도는 퇴계가 단양의 백성들이 굶주림과 고통으로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목도하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 기필코 그들의 삶의 길을 다시 찾아줘야겠다는 각오를 담은 것으로 물길을 되찾는 것은 살길을 되찾는 것이며, 마침내 예의도덕을 갖춘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퇴계 이황이 수령일 때 지금의 위치로 옮긴 단양향교Ⓒ단양군

도담삼봉(島潭三峯)은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 와 형성된 것이라 전해지는데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유년시절을 함께해 준 훌륭한 벗이면서 퇴계 이황의 시심(詩心)을 흔들어 놓은 명승지이기도 합니다.

도담삼봉은 당당한 풍채가 돋보이는 남편봉을 중심으로 아담한 모양새의 처봉과 첩봉이 양옆을 지키고 있는데 특히, 남편봉은 삼도정이라고 불리는 육각 정자를 멋들어지게 쓰고 있어 더욱 그윽한 운치를 자아냅니다.

정도전이 어린 시절에 도담삼봉에서 보내면서 어린 꿈을 키운 곳이라 하여 호(號)를 삼봉(三峯)이라 했고 또 단양군청 소재지의 앞산인 종지봉의 이름을 따서 자(字)를 종지(宗之)라고 했는데 종지의 뜻은 우리가 늘 쓰는 그릇 간장종지, 고추장종지라고 부르는 일종의 그릇을 의미하며 또 산 봉오리가 종지(그릇)를 엎어 놓은 형상과 같이 생겼습니다.

석문(石門)은 도담삼봉에서 상류 쪽으로 약 200m 올라가 왼쪽 남한강가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돌기둥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담에서 강을 거슬러 수백 보 올라가면 푸른 벽이 만 길이나 되고 황양목과 측백이 돌 틈에 거꾸로 났고, 바위구멍이 문과 같아서 별개의 한 동천이 있는 것 같다”라고 석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왼쪽 아랫부분에는 옛날 하늘나라에서 물을 길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할미가 살았다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비녀를 찾기 위하여 손으로 땅을 판 것이 99마지기의 논이 되었으며, 남한강에는 징검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다고 합니다.

마고할미는 이곳에서 술과 담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오랫동안 살다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석문에는 긴 담뱃대를 물고 술병을 들고 있는 형상의 마고할미 바위가 있습니다.

영춘면 하리 남한강 절벽에는 서호거사라는 호를 가진 이홍규가 ‘도원동문(桃園洞門)’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도원이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이상향’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영춘이 살기 좋은 지역이란 뜻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북벽(北壁)은 영춘면 상리 느티마을 앞을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가에 깎아지른 듯 병풍처럼 늘어 서 있는 석벽으로, 태수 이보상(李普祥)이 절벽의 벽면에 ‘북벽’이라 암각한 후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어 오고 있습니다. 북벽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청명봉(靑冥峰)이라고 하는데 마치 매가 막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응암(鷹岩)이라고도 불립니다.

운선구곡(雲仙九曲)은 유곡(酉谷) 또는 운암구곡(雲岩九曲)이라고도 하며 도솔봉 아래에서 발원하는 남조천을 따라 황정리, 직티리, 사인암리, 괴평리에 걸쳐 펼쳐지는 9곳의 경승지를 가리킵니다.

오대익(吳大益)이 교리 시절에 퇴락된 수운정을 중창하면서 운선구곡을 명명하였는데 제1곡에서 제9곡까지 차례로 대은담(大隱潭), 황정동(黃庭洞), 수운정(水雲亭), 연단굴(煉丹窟), 도광벽(道光壁), 사선대(四仙臺), 사인암(舍人岩), 선화동(仙花洞), 운선동(雲仙洞)이라 하였습니다.

바위절벽을 구석구석 훑어가다보면 유명인의 글씨를 만나 볼 수 있으며 해서, 예서, 전서 등과 같은 다양한 서체는 물론 새긴 이의 이력, 문구에 묻어 있는 옛사람의 철학, 여행 경향 등을 한꺼번에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입니다.

특히 사인암은 단양팔경의 하나이기도 한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단양 출신인 고려 말 대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이 사인(舍人) 벼슬로 재직할 당시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사인암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우탁은 1263년(고려 원종 4) 적성면 하리 품달촌(品達村)에서 출생한 고려 문신으로 호는 역동, 본관은 단양입니다.

24살 때인 1290년(충렬왕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가록에 선임되었으며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선왕(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하고 난 뒤 관직에서 물러나 예안(지금의 안동 부근)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았습니다.

우탁은 경사에 정통하고 역학(易學)에 깊으니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자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성리학을 해득하여 정리하게 되자 중국에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역(易)이 이제는 동(東)으로 가게 되었다하여 후에 사람들이 선생을 역동(易東)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인암의 풍광은 푸르고 영롱한 옥빛 여울이 수백 척의 기암절벽을 안고 휘돌아 가고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암벽 위에 선연한 격자무늬와 마치 어깨 위 날개처럼 도드라진 노송의 어우러짐은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처럼 수려한 절경을 간직하고 있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숱한 시인묵객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합니다.

순조 때 충청도 관찰사와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소문난 온성(溫城) 정만석(鄭晩錫)이 “치솟은 절벽은 하늘을 움켜잡고, 골 곧아서 흘러 온 물은 굽이쳐 흐른다(一柱擎天 百川廻欄)”라는 글을 썼고 선조의 손자인 낭원군 이간(李侃)이 1693년(숙종 19) 겨울에 사인암을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낭원군 중유 계유동(朗原君 重遊 癸酉冬)’이란 글씨를 새겼습니다.

이윤영, 이인상, 김종수 세 사람은 1751년(영조 27) 사인암을 유람한 뒤 이를 기념하여 옛 글을 집구(集句)하여 사인암을 찬미한 글을 짓고 이를 이인상이 써서 암벽에 새겼습니다.

“먹줄 튕긴 듯 곧고 수평처럼 평평하네.
옥색의 빛을 띠고 쇠소리 어울렸네.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아지고
높고 큰 모양이 이를 데가 없네.
신미년(1751년 영조 27) 봄 윤지 이윤영, 정부 김종수, 원령 이인상이 짓다“
(繩直準平 玉色金聲 仰之彌高 魏平無名 辛未春 胤之 定夫 元靈 撰)

이윤영은 주자의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에 나오는 “규는 둥글고 구는 방정하니 승은 곧고 준은 고르다(規圓矩方 繩直準平)”에서 승직준평(繩直準平)을 첫 구절로, 명도선생(明道先生) 화상찬에서 옥색금성(玉色金聲)을 둘째 구절로 빌려 왔습니다.

김종수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안연이 공자의 도가 무변광대함에 감탄하여 이른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뚫어 보면 더욱 단단하며, 바라보니 앞에 있다가 문득 뒤에 있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에서 앙지미고(仰之彌高)를 빌려 셋째 구절을 썼습니다.

넷째 구절의 위평무연(魏平無名)은 단릉(丹陵)의 문집에 있는 것과는 첫 자가 다른데 바위에는 위(魏)로 새겼지만 문집에는 외(巍)로 되어 있으며 이 또한 <논어>의 태백(泰伯) 편에 나오는 요 임금의 높고 큰 덕을 칭송하는 대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윤지, 정부, 원령은 이윤영, 김종수, 이인상의 자(字)이며 김종수는 30년 지기인 이인상과 이윤영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의 집안이 노론의 명문가였기에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인상(李麟祥)은 1710년(숙종 36)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에서 태어났으며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지만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출(庶出)이라 고위관직에 오르기는 어려워서 예술에 심취하였는지도 모릅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북부참봉을 거쳐 음죽 현감, 지리산 사근역 찰방이 되었으나 관찰사와의 불화로 사직하고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단양의 구담(龜潭)에서 은거하였습니다.

이윤영(李胤永)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지(胤之), 호는 단릉(丹陵)이며 이색의 14대손이자 담양부사 이기중(李箕重)의 아들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평생을 보냈는데 평소에 단양의 산수를 좋아하여 즐겨 찾더니, 부친이 담양 부사로 재직하자 구담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단릉산인(丹陵散人)이라 하였습니다.

이인상과는 절친한 벗으로 노론의 문사들인 송문흠(宋文欽), 김종수, 김무택(金茂澤), 신소(申昭), 황경원(黃景源) 등과 교유하며 지은 많은 시문이 <단릉유고(丹陵遺稿)> <단릉산인유집(丹陵散人遺集)>에 실려 있으며 글씨는 특히 예서와 전서에 뛰어나 30년 지기인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畵題)를 많이 썼습니다.

김종수(金鍾秀)는 1728년(영조 4)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진사가 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17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어 정조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778년(정조 2) 왕위에 오른 정조가 그를 기용하여 승지에서부터 1년 사이에 우참찬,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1780년 이조판서가 되어 홍국영을 몰아냈고 의금부판사,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수운정(水雲亭)은 사인암 위편 계곡에 있는 정자로 유성룡은 <서애문집>에 수운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적고 있습니다.

“단양 장림역 남쪽 6-7리 떨어진 곳에 시내를 따라 들어가면 운암이란 지명이 있는데 경치가 빼어나다. 조신이란 사람이 복거하며 작은 정자를 짓고 수운정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버리고 지키지 않았다. 나는 호피 1장을 가지고 그것을 매입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하느라 돌아올 수 없어 다만 몸속에 신유할 뿐이었다. 1598년 2월, 남중으로부터 돌아올 때 길이 그 아래 나있었기 때문에 한번 노닐고 시내 바위 가에 오언율시를 써서 나의 마음을 기록했다. 함께 노닌 사람은 종사 윤경림이다.“

수운정이 어느 때 퇴락하여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다만 수운정 터 절벽에 단릉산인 이윤영의 글씨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암각자만이 옛 영화를 알리고 있습니다.

수파심불경(水波心不競) : 물결은 먼저 흐르려 다투지 아니하고
운재의구지(雲在意俱遲) : 구름 또한 유유히 흐르는구나

하선암에는 전서체로 ‘명소단조(明紹丹竈)’가 새겨져 있는데 단조(丹竈)는 '도사가 선약(仙藥)을 굽는 부엌'이라는 뜻이며 명소(明紹)는 사인암에 명소정(明紹亭)을 세우고 청유(淸遊)하던 이명(李明)과 이소(李紹) 형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선암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시를 그의 제자인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유지에 따라 유중교 제자 등이 새긴 것으로 보이는 암각문이 남아 있습니다.

주서는 동유설을 의집하였고(朱書擬輯東儒說)
역사는 북제편을 산삭하였네(靑史行刪北帝編)
오른쪽은 화서 이항로선생의 시이다(右華西李先生詩)
삼가 성재 유중교선생의 유지를 좇아서 후학 권일수, 정해찬이 삼가 새긴다(謹遵省齋柳先生 遺意後學權一洙 鄭海贊敬刻)

사기장(沙器匠)이란 백토 등을 혼합하여 그릇 형태를 만든 다음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사기그릇을 만드는 기술 또는 사람을 일컫는데 조선 후기에 정부 관리 하에 도자기를 만드는 관요(官窯)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이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져 이 지역에는 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민요(民窯)가 번창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아이젠,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 신청 안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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