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는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를 한국이 가장 빨리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2010년 6%의 높은 경제성장률과 기업들의 좋은 실적 등이 그 근거다. 하지만 물가 폭등으로 많은 이들이 살림살이는 오히려 팍팍해졌다. 이처럼 상층과 하층의 체감 경기가 확연히 다른 배경에 '재벌'이 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가 최근 동반성장위원회 등을 통해 대·중소기업 상생을 주장하는 상황은 '재벌'이 한국경제를 얼마나 왜곡시키고 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난 4월 19일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재단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진행된 좌담 전문을 <계간 광장>과 공동 게재한다. 편집자.
이해찬 : 이번 계간광장 특집 주제는 '한국은 재벌공화국인가'입니다. 최근에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의 독점 정도가 너무 심화되는 것 같아서 이른바 재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좀 짚어보자는 취지에서 준비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친 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무역을 많이 하는 대재벌들을 위주로 하는 법인세 감세, 금산분리 완화, 출총제 폐지 등의 정책을 시행한지 3년 가까이 접어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먼저 김상조 교수님께서 말씀을 좀 해 주시죠.
ⓒ계간 <광장> |
Tricke-down Effect 신화는 이미 1차 외환위기 때 붕괴
김상조 : 저는 한국경제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허들, 즉 극복해야 할 내용은 '트리클-다운 이펙트(Trickle-down Effect, 적하효과(滴下效果))'의 신화 또는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70년대와 '80년대까지 트리클-다운은 잘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비용을 치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기업들의 선도적 성장이 중소기업의 성장을 이끌어냈고 그 성장의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확산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러 통계를 보면 트리클-다운의 효과가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는 거꾸로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의 핵심인사들과 관료들의 기본적인 경제정책 틀은 여전히 트리클-다운 이펙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2007년 대선캠페인의 공약집에도 '대기업의 선도적 성장의 과실이 중소기업과 서민에까지 확산되도록 한다'고 명시적으로 써놨습니다.
그런데 집권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명박 대통령도 트리클-다운 이펙트에만 기댄다면 자신이 성공적인 경제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정치적인 배경 등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작년 하반기 이후 서민행보라든지 동반성장론을 꺼낸 근본 배경에는 재벌의 선도적 성장으로는 국민 전체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 경제정책의 기본은 트리클-다운 이펙트, 즉 대기업의 선도적 성장에 의존하는 환상에서 탈피해서 중소기업과 서민을 보다 직접 타겟팅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을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수, 진보의 이념을 불문하고 식자층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상당부분 공감을 얻고 있는데요, 오히려 생활이 어려운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래도 재벌이 잘 되어야지, 부자들이 좀 돈을 써야지 우리 같은 사람도 먹고 살게 생기지' 하는 소박한 생각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정치적 형태로 표출되고 있기도 합니다. 진보개혁진영이 선거에서 이기고 더 나가서 성공적인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에게 '이제 트리클-다운 이펙트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다'라는 것을 제대로 전달해 드리고 그분들을 직접 타겟으로 하는 경제정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동 : 재벌중심 성장의 한계점을 정확히 몇 년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88년 올림픽에서 '97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있었을 겁니다. 그것을 몇 년 더 무리하게 끌고 오는 과정에서 1차 외환위기가 일어난 거거든요. 1차 외환위기 직후에는 늦었지만 재벌이 나라경제에 미치는 큰 문제가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4대 개혁의 하나로 재벌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당시에 재벌개혁을 위해 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의 해소, 재무구조의 개선, 업종 전문화,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 5대 원칙이 제시되었습니다.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99년 7월 부채규모로 1, 2위를 다투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씨가 경영권이 박탈되고 계열사는 워크아웃 되면서 어느 정도 시장의 규율을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진거죠. 대재벌이라고 무조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보여주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때의 자신감을 반영해서 '99년 8·15경축사에서 "추가로 금융지배 차단, 계열순환출자 억제, 내부거래 금지 등 3개항을 추가하겠다"는 발표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이미 '98년부터 아마도 재벌 쪽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빅딜'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재벌개혁 노력에 자꾸 혼선을 일으켰습니다. '빅딜'이라는 것은 부실기업끼리 교환한다는 것인데, 당시에 좋은 기업끼리도 어려운데 부실기업을 교환한다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은 LG반도체가 현대반도체로 간다든지 하면서 1년 이상 시간을 끌면서 상당히 불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재벌개혁을 하려면 기존 재벌 패러다임에 의해 다수가 손해를 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그것이 법 개정으로 반영되고 좀 더 엄격한 법에 의해 재벌의 행태에 대한 사회적인 견제나 규제가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는데 이미 국민의정부 초기부터 그 시기를 놓쳤습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당시에 제가 경제수석으로 있다가 불과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으로 옮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빅딜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재벌개혁의 공감대가 가장 높았을 때가 1차 환란 직후였는데 그 때조차 재벌개혁을 추진할 사회 동력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 뒤 김대중 정부 후반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평면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재벌 총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제도가 바뀌었고 실제 집행에 있어서도 재벌 총수에게 유리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현재 한국경제에 대한 재벌의 영향력, 실질적인 힘은 '97년 외환위기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 IT-창업 붐이 일시적으로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들 중에서 우량기업은 결국 대기업에 편입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기업의 견제와 방해로 인해 많이 도산했습니다. 결국, 재벌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세력이 등장하는 것도 좌절됐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민주화에 의해서 미약하지만 국회나 사법부가 행정부를 부분적으로라도 견제하는 힘이 있는데요, 경제 쪽에서는 5대 재벌, 그 중에서도 1, 2위의 재벌들은 시장에서도 견제할 수 없고 시장이 아닌 제도의 결정과정이나 집행과정에서도 견제 할 수 없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재벌이 어떻게 더 사익을 추구해 나갈지, 재벌은 이제 나라경제의 가장 위험한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계간 <광장> |
외환위기 전에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산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기업을 살려낸 외환위기 이후에는 '기업인은 망해도 기업은 살려야 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재벌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냐 하면, 지금 사회분위기가 공적자금으로 회생했던 이 재벌들에게 '주인을 찾아주자'는 아주 묘한 분위기가 생겨서 전부 옛날 주인에게 넘어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 재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조차 거의 금기시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나 보면, 우리 재벌들이 외환위기 전에 마구잡이 투자위주로 경영을 하다가 재무구조가 어려워진 경험을 한 후에 이익중심 경영을 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들어온 외국자본들도 다 이익경영을 하고, 단기위주 경영을 했죠. 그러면서 '기업은 오직 이익을 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다 보니까 재벌들이 갖고 있던 모든 문제가 덮여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부도를 내서 파산하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악이다'라는 인식이 강해져서 이제는 재벌들이 많은 문제가 있어도 국민들이 자신도 모르게 다 덮어주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재벌은 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장학생이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사람을 관리합니다. 관료들도 나중에 차관이나 장관을 할 정도로 똑똑하다는 말이 나오면 사무관 때부터 관리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정책결정이 자연스럽게 재벌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참여정부 당시에도 금산분리 원칙을 위해 조치를 취하려 해도, 실무자들 선에서는 논의조차 안 나옵니다. 그리고 요즘 사회의 주류(主流)라는 말을 잘 쓰는데, 재벌과 메이저 언론사는 대부분 혼맥으로 유착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했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자기들끼리 강고한 철옹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재벌이 사회 전체를 장악하다보니까 모든 의제를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사회의 다양성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장관까지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없어요. 오직 재벌의 논리만 의제가 되어버리고 다른 논리가 개진될 가능성이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재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역사 측면 어디에서도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재벌중심 경제의 폐해는 대·중소기업 양극화로 인한 성장동력의 상실을 야기
한국경제는 소수 재벌을 중심으로 한 수직계열화가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음
김상조 : 재벌정책 하나하나를 보면 재벌들의 저항에 의해서 피폐화되고 실패한 측면도 있지만 외환위기 이후 우리 정부의 재벌정책 기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재벌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근대적인 독점자본, 또 하나는 전근대적인 천민자본의 의미를 갖고 있고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 재벌입니다. 따라서 재벌 정책은 이 두 측면의 문제점들을 함께 교정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부분인 독점자본의 문제, 즉 경제력 집중의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20년 전부터 출자총액제한제도라든지, 금융·산업 분리 같은 정책적 조치들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인 천민자본의 문제, 특히 재벌의 지배구조의 문제에 관해서는 '재벌 총수일가들에게 투명하게 하라, 당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라'는 지배구조 개선장치, 예를 들어 사외이사제 도입 등의 조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외환위기 초기단계를 거치면서 재벌정책의 기조가 전자에서 후자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97년 이전의 재벌정책 기조는 출총제를 비롯한 경제적 집중 억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 억제 쪽에 포인트가 맞춰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경제력 집중에 관해서는 기업집단, 재벌들이 더 크게 성장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원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바뀌고, 문제는 오직 재벌총수 일가의 견제 받지 않는 황제경영 식의 지배구조 문제를 교정하는 것으로 재벌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조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자기반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하성 교수 이래 제가 책임자 역할을 맡아온 소액주주운동의 기조가 지배구조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이게 한국에서의 재벌개혁의 대표적인 시민운동으로 인식이 되어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어필한 측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결국 재벌정책의 기조는 경제력 집중의 문제에서 지배구조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것이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산다'는 식의 재벌 총수의 여러 문제는 어느 정도 교정되었지만, '경제력 집중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기업의 발전은 국가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식의 정책기조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 2002년 경제시스템이 다시 안정화된 이후에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빠른 속도로 다시 시작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이 앞에 말씀하셨던 재벌중심의 성장전략, 트리클-다운 이펙트에 의존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은 일정 정도 있었지만 재벌들이 독점자본으로서의 힘을 점점 더 갖게 되니까 천민자본 문제 보다 경제력 집중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재벌의 경제권력이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소진시켜 버려서 새로운 기업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기업들은 전부 재벌의 계열기업들입니다. 이제 한국 경제구조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과 같이 새로 설립된 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졌습니다. 나아가 경제 권력이 경제영역을 넘어서 정치, 사회, 문화, 언론으로 심지어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까지 힘이 확장되면서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재벌에 대한 규제 시스템을 세심하게 재설계하는 것도 중요하고 행정 편의적인 사전적 규제를 사후적 규율로 전환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재벌정책의 목표를 지배구조 개선이 아니라 경제력 집중 억제로 다시 재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해찬 전 총리. ⓒ계간 <광장> |
그런데 재벌들은 투자를 미루면서 쌓아놓은 자금으로 유망한 중소기업들을 M&A(인수·합병) 하거나 이미 하청기업화 되어 있는 기업들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재벌이 얼마만큼을 소유하고 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증권 사이트에서 보니까 삼성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의 1차 협력회사들의 지분을 20%, 30%씩 확보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돈은 많으니까 그 돈으로 지분을 확보하고, 지분을 확보해 하청계열화 된 기업들에게는 다른 곳에 납품을 금지하고, 수직계열화 시키는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허성관 : 최근에 재벌들의 내부 유보율이 거의 2000%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벌들이 증자한다는 소식 들어본 적 있습니까? 거의 안하잖아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증자를 하면 재벌 소유주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율이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지금 황제경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게 됩니다. 물론 유보금이 있으니까 유상증자를 안 하고 무상증자를 할 수도 있는데 요즘은 무상증자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지분율을 유지하는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력 집중과 관련해서 삼성전자가 한 분기에 3조원, 5조원의 영업 이익을 낸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돈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이번 분기에 번 돈은 전부 쓰겠다고 정하고 돈이 될 만한 기업들의 지분을 사 모으면 감당을 못합니다. 이 총리님이 지적하신 대로 요즘 대기업들은 자기들에게 납품하는 회사 중에서 괜찮다는 기업에는 반드시 지분참여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분 참여한 회사가 몇 개인지 재무파트를 제외하고는 전혀 몰라요. 밖으로 드러난 것보다 경제력 집중이 훨씬 심각합니다. 올해 10대 재벌의 계열회사가 617개라고 하는데 계열회사에 포함되지 않은 중소기업까지 포함하면 수천 개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김상조 : 제가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인데, 한 달 전쯤에 유럽의 학자들과 재계 인사들이 한국에 방문했어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기업들이 잘 나가고 있는데 그 비밀이 뭐냐, 성공의 비밀을 알고 싶다고 해서 둘러보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평가 자리에서 어느 독일학자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한국기업들이 잘 나가는 이유를 첫째는 정부가 환율을 높게 해주고 있고 두 번째는 유리한 협력업체 관계, 세 번째가 비정규직의 존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기업은 비용을 엄청나게 줄여주는 정부정책과 대기업이 주도하는 하도급구조·노동시장구조를 갖고 있는데 유럽기업들은 어느 하나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에 한국기업을 상대할 수 없는 말이죠.
물론 외환위기 이후 매출의 4-5%를 R&D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생겨서 이제 우리 기업들도 기술 개발력을 갖고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제력 집중에서부터 나오는 정부정책의 왜곡, 불공정 하도급, 노동시장 구조의 왜곡과 같은 경제 질서의 왜곡으로부터 얻는 부당한 이득이 재벌 이익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잘 나가지만 그 밑에 있는 협력업체들과 거기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성장의 과실로부터 배제되어버리는 이중구조 문제를 계속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태동 : 저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 우리와 유사한 문제로 고민을 하는 나라가 과거나 혹은 현재에 있었느냐를 생각해 봅니다. 한국의 경제체제는 일본 식민지 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후 미군정 3년 동안에 특별한 개혁이 없었고 '50년에 농지개혁을 한 것 정도를 경제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군정은 재벌개혁을 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총수들을 경영에서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개혁이 일본 경제에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에 일본이 경제성장하는 과정에서 재벌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는 심각하게 나온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전쟁 전 재벌시스템이 어디서 왔느냐를 보면 독일의 프러시아에서 왔습니다. 독일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자본주의 역사가 훨씬 짧았지만 기업들은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고 전쟁과정에 군수기업으로 적극 참여하면서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2차 대전 중에 독일의 경제학자들은 이 전쟁에 질 것이다, 그런데 지고 나면 어떻게 독일의 경제질서를 재구축할 것이냐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보수적인 경제학자들이 내세운 이론이 질서자유주의입니다. 질서자유주의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정부가 자유방임을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국가가 노력해서 공정한 경쟁질서를 만들고 그 경쟁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부는 시장의 경제과정, 수요와 공급에는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케인즈주의와는 다릅니다. 이 질서자유주의에는 대기업을 견제하는 여러 장치들이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참여도 보장했고 우리의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하는 엄격한 반독점, 불공정거래 규제 등이 나왔습니다. 바로 이 질서자유주의를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채택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은 어쩌면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 할 때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이번에 이명박 정권이 맞이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2차 대전 직전 대공황의 국제경제질서 상황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재벌중심 논리가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논리는 결국 파탄에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저는 우리 경제가 파탄에 이르기 전에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제대로 된 개혁을 했으면 좋겠는데, 과연 한국인이 일본이나 독일 같이 엄청난 비용을 치루지 않고 재벌의 폐해를 고칠 수 있을까요. 일반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재벌개혁에 동의하고 이를 위한 정치인을 뽑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2008년 제2차 환란 중에 재벌들이 어떻게 이익을 냈느냐를 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수출 재벌은 고환율정책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이 정책을 책임지는 대통령이나 담당 관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수출이 잘되어야 한다, 수출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미 '96년에 OECD에 가입해서 자본이동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자본이동이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환율정책과 금리정책을 따로 관리하면서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임파서블 트리니티(impossible trinity)라고 하는데 자본이동의 자유, 환율정책, 금리정책의 세 가지는 공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이 우리 경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경제학 교수들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마치 고환율정책을 쓰면서 동시에 고금리정책을 펼 수 있다고 말하는데 고환율정책은 저금리정책과는 쌍이 될 수 있지만 고금리정책과는 쌍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이명박 정부는 고환율, 저금리 정책을 써왔고, 그 결과 삼성등 대재벌의 수익성이 인위적으로 보장된 것입니다.
그리고 납품가와 비정규직 문제는 공정거래위원회와 노동부 소관인데 현재 있는 법조차 제대로 적용을 안 하면서 재벌을 편드는 이유는 이미 경제력 집중이 많이 이루어져서 사실상 수요 독점이 되어 있는 상태 때문입니다. 제품시장에서 공급 독점이 되면 한계비용 이상으로 가격을 매길 수 있고, 그래서 초과이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노동시장이나 중간재 시장에서 수요 독점이 이루어지면 반대로 한계노동생산물 만큼 분배가 되지 못하고 그것보다 낮은 수준에서 임금이나 납품가가 결정됩니다. 즉, 우리 시장구조는 이미 10년, 20년 전에 비해 대·중소기업 관계나 노동시장이 재벌에게 유리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시장에만 맡겨 놓으면 임금이 비정규직으로 해결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납품가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치 제품시장에서 독점가격을 규제하기 위해 시장에서의 실효적인 독점률을 판단하고 독점을 해체하는 것처럼 접근해야 합니다. 이처럼 수요 쪽에서도 노력을 기울여야 요소 시장의 왜곡이 완화되고 소득 배분나 양극화가 덜 악화될 텐데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상을 그냥 놔둔 채, 구조적인 개혁 논의조차 없는 것이 지금 한국경제의 현실입니다.
허성관 : 참여정부 때 보면, 대기업들이 정부에 대고 엄청나게 불만을 내놨는데 사실 참여정부 때 재벌기업들은 호황이었습니다. 지금 정부에서도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전부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익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자기들이 독식하면서 비용은 밑으로 전가시켜서 문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정부가 제대로 인식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편의주의가 이런 문제를 조장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4대강 사업을 시행하면 먼저 재벌건설사들이 낙찰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30%를 떼고 재하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예 하청을 받는 기업들에게 낙찰해줄 수 있는 제도는 지금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공무원들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편의주의 때문에 정부 스스로 경제 질서를 왜곡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건설뿐만 아니라 정부가 IT 관련해서 발주하는 것도 보면, 삼성SDS, LG의 몇 개 업체가 전부 독점을 합니다. 그러면 그 업체들 스스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시스템을 까느냐 하면 이것도 아니죠. 전부 재하청에 들어갑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빌게이츠도 불가능하고 구글도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정부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현상을 악화시키는 측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장률 신드롬과 외환보유 만능론의 허구에서 벗어나야
이해찬 : '97년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에 재벌들을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97년 이후에 몇 개의 잘못된 개념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은 경험 때문에 외환보유고가 없으면 큰일난다는 인식이 일반 국민들에게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마치 우리 경제의 곳간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어요. 또 하나는 그 때부터 외국자본이 국내에 많이 투자하고 우리 주식시장에 들어오니까 이에 맞서는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는 인식도 강합니다. 성장률 신화는 그 전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왔죠. 공무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표가 성장률입니다. 고환율정책을 통해서 수출을 많이 하는 것이 성장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요. 정부가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외형적 성장률에 잘 반영이 안 됩니다. 경제 관료들은 성장률 지표를 사용하는 것이 아주 만성화 되어 있습니다.
제가 총리를 할 때 재벌의 구조조정본부장들을 만나 보면 주로 환율문제를 이야기하더군요. 참여정부 때에는 환율이 절상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1 달러당 1000원 이하로 환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저에게까지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경쟁력이 떨어져서 수출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럼 당신들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니까 회사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재벌들이 이야기한 것보다 환율이 더 내려가도 버티는 겁니다. 제가 총리가 되었을 때, 지금하고 비슷한 1,100원에서 1,050원 사이였는데 그들은 절대 천원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천원이하로 내려가도 큰 문제가 없었어요. 대신에 그 과정을 겪으면서 생산성이 높아졌습니다. 전형적인 케이스가 하이닉스였죠. 하이닉스는 주인도 없었고 다른 투자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수출을 해야 하니까 자체 기술력과 생산성을 높여서 끌고 갔습니다.
이처럼 재벌들은 성장률 신드롬과 외환보유고를 확보해야 한다는 2가지 잘못된 인식을 토대로 해서 정부에게 끊임없이 로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국내 물가나 소비 여력과 같은 내수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97년 이후에 이런 신화나 조류가 훨씬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재벌에 대한 견제력 있는 비판이 안 나오는 거죠. 그것을 비판하면 경제를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현재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사회는 재벌과 언론·관료·경제학자들이 유착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조차 삼성의 광고가 없으면 유지가 안 됩니다. 한동안 삼성이 한겨레에 광고를 안 했었는데 한겨레는 도산할 지경이었어요. 결국 타협을 하면서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톤이 많이 약화가 되었죠. 한겨레 같은 조그마한 곳이 그럴 정도이니까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 언론들은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벌은 이처럼 언론에 대해서는 광고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관료들에게는 학맥으로 로비를 하고 일부는 퇴직 후의 사후 보장을 해주면서 얽혀 있습니다. 국회에 대해서도 로비를 많이 합니다. 어떤 법안이 하나 나오면 굉장히 조직적으로 대응합니다. 특히 공정거래나 금융관련 법과 제도를 만드는 정무위나 재경위 같은 경우에는 하나의 재벌이 아니라 여러 재벌과, 전경련이 이중으로 로비를 합니다. 주로 반대하거나 견제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학맥과 돈으로 로비를 하기 때문에 법안을 막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 사회의 상층구조는 혈연화 되어 있습니다. 이런 영향들로 인해서 재벌정책이 잘 안 풀리는 겁니다. 심지어는 고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평채까지 발행합니다. 2004년도는 수출이 잘 되고 있었는데도 외평채를 발행해서 50억 달러씩 사들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더군요. 그러면서도 재경부 관료들은 계속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김태동 : 이 총리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1차 외환위기 이후에 우리 정부에는 '외환보유액이 부족해서 환란을 당했다'는 인식이 퍼져서 계속 외환을 쌓고 있습니다. 문제는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것은 공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3분의 1 내지 4분의 1은 원화 외평채를 발행하고 나머지는 한국은행이 통화안정채권을 발행해서 늘리는 것이죠.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에 환율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이전만큼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1400원에서 1300원, 1200원으로 떨어지고 참여정부에서는 900원대까지 떨어졌는데, 사실 전두환 때는 600원대이었던 적도 있었거든요. 여기서 정상적인 판단을 했더라면 정부가 더 이상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외환을 쌓는 것이 아니라 800원대로 가면서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생산성을 높여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2차 환란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계속 개입해서 외환보유액은 세계 5등, 2600억 달러가 되었지만 결국 이 돈으로도 2차 환란을 막기에 부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1차 환란부터 2차 환란까지의 10년 동안 경상수지가 흑자면 자본수지는 적자가 되어서 종합수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경상수지가 흑자이면서 자본수지도 흑자를 보이니까 달러가 막 들어오고 외채가 늘어났습니다. 1년에 수백억 달러씩 외환보유액이 늘어나는 것이 좋은 것 같았지만 바로 그것이 제2 환란의 씨앗이었죠. 당시 유입된 자본은 대부분 단기 외채였습니다. 2008년 가을 이후 단기외채 만기 연장률이 50%, 또는 그 이하로 떨어지니까 한 달에 몇 백억 달러씩 외환보유액을 쓸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2,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미국과 3백억 달러를 스왑하고 중국, 일본에 손을 벌려서 겨우 막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1차 환란에 재벌의 잘못이 있었다는 것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있는데, 2차 환란에도 역시 재벌의 문제, 고환율을 고집하는 재벌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고리의 본질을 지적하면 오히려 지적하는 사람이 왕따 내지 바보취급을 당합니다. 거기에 정치권력조차 이명박 정권처럼 진정한 보수가 아닌,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언뜻 보면 '초과이익공유제다, 중소기업과 상생이다'라고 하면서 현 정권이 마치 재벌을 견제하고 재벌과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극히 현상적인,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입니다. 현실은 이명박 정권은 고사하고 민주정부 10년 하에서도 수출 재벌을 위해서는 환율정책과 함께 기업의 부실을 털어주고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정상화시켜주는 등,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직·간접적인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국민의정부 마지막이었던 '02년에는 금융계열사가 가지고 있는 계열사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허가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도 초기에는 의결권 행사를 다시 제한했지만 마지막에는 공익재단에 출연하는 것도 늘려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벌 총수 본인과 가족의 직접적인 지분은 1∼2%에 불과하지만 계열사 지분에 금융계열사의 지분, 공익재단의 지분을 포함하게 되니까 경영권을 세습할 수 있는 카드가 '97년 전 보다 2개나 더 생겼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출총제를 이명박 정부가 없앴기 때문에 재벌의 인위적인 가공자본을 통한 그룹 지배와 세습은 '97년에 비해 더 쉬워졌습니다. 거기다 차명거래도 제대로 규제를 안 하니까 개선 된 것은 거의 없고, 총수의 세습을 도와주는 장치만 더 많아졌습니다. 경영능력이 별로 없어도 이익을 쉽게 낼 수 있는가하면 세습도 더 쉬워지고, 이런 이유들로 이미 우리 사회는 재벌공화국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찬 : 지금 이른바 3세 경영체제가 완성되어 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습에 의한 3세 경영체제가 나타나면서 재벌의 분화가 일어나고 동시에 사업영역이 무한정 확대되고 있어요. 삼성, 현대, SK 같은 곳이 분화되면서 작은 재벌들이 다시 생기고, 사업 영역은 유통, 서비스업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 재벌에 이들 소재벌까지 합쳐서 보면 이들의 하청기업이 되거나 말단 지점, 분점이라도 안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동네에서 담배를 사려해도 재벌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사야하고, 막걸리도 거기서 사먹어야 합니다. 서비스, 외식, 유통, 인터넷쇼핑까지 이들이 다 장악을 하고 있고 이제는 대학에까지 재벌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결국 중소기업이 할 수 있는 영역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이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 김상조 한성대 교수 ⓒ김상수 |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하준 교수의 논지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는 위험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하준 교수가 산업정책을 연구하면서 과거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하면서 정부와 재벌사이의 협력을 통해서 나온 성장의 과실이 트리클-다운되는 효과를 언급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 국가의 개입을 통해서 공정 경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시스템과 관료들이 이른바 '공공선의 담지자'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장하준 교수가 살고 있는 영국에서는 이 부분을 의심할 수 없는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 강화를 말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아무런 모순을 안 느낄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는 영국과는 너무 다릅니다. 특히 경제 관료들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화 된 세력이고 사실상 재벌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장하준 교수의 논리는 한국사회에서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진보개혁진영에서는 모피아들이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하지만 저는 최중경, 강만수로 대표되는 이런 관료들은 신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중상주의자(重商主義者)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보수화된 관료사회를 극복하지 못하면 설사 선거를 통해서 집권을 한다고 해도 모피아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재벌과 관료가 유착되는 과정에서 특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기업연구소의 문제입니다. 이들은 우리 국민들의 경제의식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기업연구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을 조중동과 매경, 한경이 한 글자도 안 바꾸고 매일 같이 신문에 실어주고 학생들은 경제를 공부한다며 그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재벌의 경제 이데올로기가 국민들의 경제의식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관료들이 경제정책을 왜곡하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집권기회가 주어진다면 집권세력이 하나의 팀을 만들어서 관료들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개혁적인 정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동 : 결국 관료를 활용하고 통제하는 것은 집권세력이 하는 것이죠. 그런데 진보, 보수도 중요하지만 경제의 구조와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먼저인데, 정치영역의 한계는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임기만을 본다는 것입니다. 시계(視界)가 너무 짧은 거죠. 중앙은행과 금융 감독기구가 독립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들이 정치권력에 종속 되면 그 때, 그 때의 경기부양이나 성장에 매몰되어서 제대로 감독도 못하고 물가안정대책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죠. 진보정당이 집권해도 1년, 2년 단위의 단기적인 관점에서 성장과 일자리 문제를 생각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세력이 정말 진보를 원한다면 국민의정부, 참여정부가 잘못한 것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진보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잘못된 논리에 따라 표를 성장과 일자리로 일치시키다 보니까 10년을 10년처럼 쓰지 못하고 1, 2년으로 짧게 썼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재벌공화국에서 피해를 보는 중산층과 중소기업, 서민층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확보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재벌이 관료들과 짜고 중앙은행과 금융감독기구를 종속화하여 성장이란 미명하에 저금리, 고환율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능하고 강한 정부여야 지속가능한 진보정권이라 하겠습니다.
이해찬 :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2002년도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당시에 IMF 외환위기를 수습하느라 정부 재정이 좋지 않았는데, 2002년 선거는 다가오니까 2001년 하반기부터 경기부양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부양정책의 하나가 공기업 민영화인데, 정부가 보유한 공기업 주식을 팔아서 재정사업에 투입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용카드 문제였죠. 이 2개가 2001년 하반기부터 2002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경기가 나쁘다는 소리는 안 들었지만 결국 이것이 인플레이션을 가져오고 경제구조는 매우 취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정부에게 큰 부담이 되었죠.
진보개혁세력이 다시 집권을 하면 언론, 관료, 재벌들의 요구에 맞서야 합니다. 언론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통제가 불가능한데, 이번에 종편까지 남발을 해서 더 어려워졌습니다. 재벌은 지배력이 더 강화되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결국 집권세력이 통제 가능한 것은 관료집단입니다. 그런데 집행부처, 경제 관료들의 경제에 대한 기본 인식은 주로 토목사업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우리 재정을 4대강 같은 토목사업에 과도하게 몰아주는 것이죠. 그 다음이 고환율·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음이 규제완화입니다. 이런 것들을 해주는 것이 마치 정부의 일인 것처럼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진보개혁세력이 관료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와 정치적, 경제적 배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현직에 있을 때, 집값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집값이 오른 이유는 소득이 편중되어 있고 재벌들이 소유한 건설사들이 분양가를 과도하게 높인 것 때문인데 건교부는 DTI(총부채상환비율) 같은 금융규제 보다 물량 공급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공급을 늘려야 수요가 안정되고 집값이 안정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펼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지간하면 그 논리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쪽으로 갔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보고를 받지 스스로 기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관료들이 논리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다음은 언론이 나섭니다. 당시에 일반 서민들 아파트값은 안 올랐고 가수요가 있는 곳만 올랐는데, 언론은 이제 '왜 우리 집값은 안 오르냐'는 원망을 부추깁니다. 집값이 안 오르는 것이 정상인데 여론을 부추기는 것이죠. 그래서 대책을 논의할 때, 집 없는 50% 세입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면 임대아파트 추가공급 대책처럼 작은 아이템이 나옵니다. 이것이 부동산 대책에 포함되는 같은 아이템이지만 규모와 질이 완전히 다른 것인데, 같이 나열을 해서 서민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우는 것처럼 합니다. 지금 정부에서 동반성장을 위해 대기업들이 무슨 협약을 맺는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기본 구조는 독점을 심화시키는 쪽으로 가면서 부분적으로 몇 가지 정책을 내세워 무슨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관료의 논리 구조를 깰 수 있어야 합니다.
진보개혁진영은 부문별 개혁과제를 넘어 민생중심의 거시경제모델을 제시해야
김상조 : 사실 진보개혁진영도 외환위기 이후 민주정부 10년과 보수정부 3년을 거치면서 많은 경험과 반성을 쌓아서 부문별 역량은 많이 강화되었습니다. 미시적 개혁과제들, 예를 들어 재벌개혁, 금융개혁, 노동, 복지, 주택, 의료 이런 부분별로 보면 이제 준비가 되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문제는 부분별 개혁과제들을 조직화하는 거시정책체계, 산업정책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이것이 되지 않다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관료들이 개혁과제들에 대해 말만 해놓고 이것이 거시적으로 어떻게 연계되는지 보고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이 의도하는, 또는 로비 받은 대로 정책을 끌고 가도 거기에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악순환을 반복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진보개혁진영도 개혁과제들을 병렬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집권하지 못한 때에도 '쉐도 캐비넷(shadow cabinet, 그림자내각)'을 만들어서 주요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고 합리성을 갖고 있느냐를 점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나중에 집권을 했을 때 관료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성관 : 제가 정부에서 일해 본 경험으로 보면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마치 재벌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 공무원들이 재벌 개혁이 잘되고 경제도 발전하는 것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보지만 여기에 하나의 맹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끈끈하게 묶여 있습니다. 만약 윗사람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 승진할 기회가 생기고, 자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일이 생기면 산하기관으로 가서 고액 연봉을 받으면 됩니다. 일반 부처 공무원이 기관장으로 나가는 산하기관은 연봉이 1억 원을 겨우 넘지만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나가는 산하기관은 연봉이 보통 6, 7억원하는 구조입니다. 공무원들 입장에서 보면 '정권은 유한하고 장관은 잠시고 공무원은 영원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부처 공무원들을 컨트롤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고 아주 정교한 방법을 써야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 생각해보면 경제부처에 자체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공정한 경쟁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다양성이 전혀 없습니다. 자본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들이 전부 모피아, 기획재경부 출신입니다.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그룹에 모피아 출신도 있고, 민간 출신도 있고, 한국은행 출신도 참여해서 경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거나 반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 기획재정부 장관들을 보면 조순씨 등 몇 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경제관료 출신들입니다. 그런데 경제 관료들이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고 법학공부를 한 사람들이 다수예요. 그러다 보니 경제를 보는 사고방식, 접근방식이 많이 다릅니다. 저는 기획재정부나 공정거래위원회의 수장은 한번은 경제 관료를 시키고 다음은 다른 분야의 사람을 시켜야 부처 내 사고의 다양성이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행자부장관을 할 때, 아까 이해찬 총리께서 말씀하신 부동산 관련 정책조정회의에 참여했었습니다. 당시에 집값을 잡으려면 돈도 좀 줄여야 하고, 세금도 좀 조정하고, 시장구조도 바꿔주는 등 다양한 정책을 함께 추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무원들은 공급대책만 가지고 나왔어요. 그래서 유동성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행에서 창구지도를 해서 소득대비 대출한도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냈는데 공무원들이 절대 안 받아들였습니다. 지난 일이지만 그 때가 2004년도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졌다면 참여정부 시절에 그렇게 집값이 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해찬 : 그때 상황이 심각해서 제가 거의 두 달 동안 전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까 일정 부분 공급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유동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규제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돌아다니는 돈이 전부 재벌과 이른바 강남 3구, 분당에서 나온 겁니다. 이 사람들의 돈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값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처음에는 공급정책이 보고되었지만 나중에는 재경부도 유동성을 규제하지 않으면 물가가 안 잡히겠다고 생각해서 DTI를 하자고 합의가 된 것이죠. 그래서 결국 2006년에 공급계획하고 DTI 두 개가 같이 나갔지만 이미 집값이 한참 오른 상태에서 추진하게 된 상태라서 사실상 효과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 ⓒ궁리 |
그리고 현행 법체계에서도 행정부에서 법만 제대로 집행하면 재벌의 불공정 행위를 사후적으로라도 제재할 수 있습니다. 진보냐 보수냐라는 논의보다 법치를 하는 것이 더 우선이고 이렇게 함으로서 중소기업이 간접적인 혜택을 보거든요. 최근에 안철수 교수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니까 정부에서 '초과이익공유제' 같은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중소기업, IT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정의고 둘째도 정의고 셋째도 정의라고 말했더군요. 그것은 법을 제대로 집행하라는 얘기고 만약 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법을 바꾸라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법을 만들고 엄격하게 집행만 해도 재벌의 나쁜 행태를 줄일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예산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관행화된 불공정행위에 대해서는 재벌들이 아프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벌칙이 예외없이 부과되어야 그런 행위를 안 하게 됩니다. 징벌적 배상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상조 : 이해찬 총리님이 말씀 하신 것 중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재벌들의 3세 승계문제, 특히 그 과정에서 유통업과 서비스업까지 확장해 나가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경제의 발전단계를 생각하면 제조업만으로 먹고 사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이제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잘 결합이 되어야지만 거기서 훨씬 고부가가치의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고 제대로 된 고용도 만들어지는 거라서 서비스업의 발전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핵심 제조업체가 이미 재벌의 계열사로 되어 있다 보니 재벌 3세들이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영역으로 유통업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재벌의 창업자들은 불법 로비능력도 포함해서 기업가 정신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2세들도 형제간의 다툼 속에서 총수가 된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3세들은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고 도전도 없는 온실에서 재벌 총수가 됩니다. 이미 기업가 정신은 소멸해 버리고 아무런 위험 부담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장한 3세들이 총수가 되었을 때 거대한 왕국을 얼마나 제대로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전혀 검증되지 않은 재벌 3세들, 더구나 위험 없는 안전한 삶만을 추구하는 3세들의 행태를 보면 이 자체가 개인의 불행이고, 기업의 불행이며 국민들의 불행이라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감 몰아주기' 등에 대한 보다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재벌개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행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한편, 기업집단을 하나의 권리와 의무 주체로 규율하는 체계로 전환해 나가는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자주 얘기하는 기업집단법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우리 재벌들은 수 십 개의 계열사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기업집단입니다. 그런데 우리 법체계는 이런 기업집단 전체를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계열사들을 규율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 규칙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는 문제가 많습니다. 재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주장할 때는 기업집단의 강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기들이 책임져야하는 일에 대해서는 개별 기업차원으로 후퇴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기업집단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다르겠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처럼 상법체계 하에서 기업집단들을 하나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 주체로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기업집단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하도급 기업의 관계도 준내부적 관계로 규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봅니다. 나아가서 금융기관과의 거래관계에서도 이런 관점이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법의 엄정 집행과 감독기구의 독립성과 전문성 확보가 중요
금융은 자본시장의 감시자, 금산분리 원칙은 자본시장의 안정을 위한 안전판임
김태동 : 삼성의 전환사채문제에서도 나왔듯이 상속세를 내기 전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전 증여에 대한 관련 세법을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당시 검찰이나 법원에서 거의 면죄부에 가까운 판결을 하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특별 사면을 했습니다. 이처럼 기존 법조차 행정부와 사법부가 지키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집단소송제가 입법화는 됐는데, 활성화되지 않은 것도 문제죠. 그 다음에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선진국 기관투자가처럼 재벌의 경영진이 잘못했을 때 주주총회에서 대주주로서 반대의견을 분명하게 내야 합니다. 결국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죠. 선진국에 비해 우리는 법체계 이전에 법대로도 제대로 안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중요한 지주회사 문제가 아직 안 다뤄졌는데, 제1차 환란 이후 지난 10년 동안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것이 추진되었습니다. 그에 맞춰서 LG 같은 5대 재벌들도 금융 부문을 일부 정리하면서 일반지주회사로 전환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금산분리 원칙이 다시 대폭 완화되고 있습니다. 일반 비금융지주회사가 중간지주회사를 통해 금융자회사를 둘 수 있도록 입법화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또한 금융지주회사가 비금융 자회사를 두는 것은 이미 허용되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바꾼 법체계 하에서는 재벌이 은행 지분을 9%까지 직접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PEF(사모투자펀드)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오너쉽을 갖게 되면 재벌이 시중은행마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명실상부한 재벌공화국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시중은행 외에도 금융투자회사, 미국과 같은 경우에는 투자은행이겠죠, 이것을 산업재벌이 운영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지금 정부는 못하겠지만 우리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재벌의 시중은행 지분 한도를 다시 낮추고 PEF(사모투자펀드)를 못하게 하고, 금융투자 쪽에서도 재벌이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에 대우그룹 같은 경우도 금융투자 부문은 별 문제가 없었는데도 대우가 부도가 나면서 같이 부실화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제3의 환란, 제4의 금융위기가 닥치면 일부 시중은행 주가가 일시에 폭락하면서 시중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재벌의 자회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상조 : 김 교수님께서 재벌체제 개혁을 위한 법, 제도적 장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주회사제도를 개선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현 정부에 들어와서도 지주회사제도가 후퇴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제도가 완전히 망가진, 무늬뿐인 지주회사제도로 전락한 것은 2007년에 있었던 2차례의 공정거래법 개정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지주회사제도에서도 상장 자회사에 대한 지분율이 30%, 비상장 자회사는 50%로 너무 낮은 수준이었는데, 2007년도에는 상장사는 20%, 비상장사는 30%로 낮춰주고 자회사와 손자회사의 업무관련성 요건을 폐기하고 부채비율도 완화해 버렸습니다. 참여정부의 2차례 공정거래법 개정은 재벌개혁의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두 번째는 금산분리문제입니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봤지만 금융이 통제되지 못했을 때, 특히 산업적 이익을 위해 금융이 왜곡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가 분명해 졌기 때문에 금산분리 원칙의 중요성이 더 분명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금산분리 원칙은 대상이 은행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습니다. 은행이면 강하게 규제하고 비은행이면 아예 규제를 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교훈은 은행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해서 시스템 리스크를 가져올 잠재적 위험성이 있느냐'에 따라서 규제의 강도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재벌 몇 개가 사실상 금융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삼성, 한화, 동부, 동양, 태광 등인데 어떻게 보면 몇 개 그룹의 문제입니다. 몇 개 그룹이 금융을 지배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원리를 왜곡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벌의 금융지배문제에 관해서 좀 더 분명한 규제원칙과 실행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향후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최근에 도요타가 망가진 이유 중 품질관리가 제대로 안 된 부분도 있지만, 도요타의 별명이 도요타 뱅크일 정도로 사내유보금이 워낙 많기 때문에 외부 자본시장, 금융시장에서의 규제나 감독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데 있어요. 완전히 폐쇄된 공간에서 독자적으로 의사결정하는 것이 오래되다 보니까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그것을 시정하는 시스템을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금융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본주의에서 감시자거든요. 그 감시자를 제대로 세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더 드리면, 참여정부에서도 나왔던 말이지만 이명박 정부는 재벌규제의 원칙에 대해 '사전적 규제는 완화 내지 폐지하고 사후적 감독이나 규율로 보완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과거 행정편의적으로 도입됐던 사전적 규제의 문제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사후적 감독체제로 바꿔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출총제 같은 문제는 사전적 규제로 봅니다. 그래서 출총제를 완화하는 대신 다른 식의 보완장치로 바꿔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사후적 감독기능을 하는 공정위나 금융위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전규제를 사후적 규율로 바꾸기 위해서는 규제기관들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키우는 노력이 반드시 같이 가야합니다. 또 하나, 출총제와 금산분리원칙을 같은 반열에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출총제가 완화하고 보완해야 하는 사전적 규제라고 생각하지만 금산분리는 사후적 감독으로 완화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 때문에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재계의 로비에 대해서는 원칙적 입장을 지켜가야 합니다.
허성관 : 재벌들이 규제를 싫어하지만 금산분리 규제는 따지고 보면 재벌들을 보호해주는 정책이기도 합니다. 미리 보호막을 칠 수 있는 칸막이를 갖게 해주는 겁니다. 경영학에서는 금융시장을 기업의 지배권을 규제하는 기업 지배권 시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산업과 금융 분리원칙을 허무는 것은 대기업을 통제하는 시장기능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미 삼성은 은행이 필요 없는 단계로 가고 있습니다. 시장의 규율을 전혀 받지 않는 기업이 되고 있는 것이죠. 도요타 예에서 보듯이 돈을 시장에서 빌릴 필요가 없으니까, 신용분석을 당할 필요도 없고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금산분리 문제는 정말 신중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면, 지금 재벌과 중소기업간 특허소송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피눈물 나는 소송이지만, 중소기업이 이길 가능성을 많지 않습니다. 특허재판 문제만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도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실정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사법부의 역할도 매우 중요해요.
김태동 : 오늘 나눈 이야기는 재벌 기업을 없애자, 벌칙을 주자는 그런 취지가 아닙니다. 이런 주장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것은 오히려 재벌에 속한 기업이요, 재벌 구성원들입니다. 재벌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금산분리는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등 시급한 개혁과제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김상조 : 마지막으로 저는 하도급 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소기업이 발전되어 있는 일본, 대만,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등의 공통점은 중소기업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 클러스터 등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중소기업들이 협력해서 공동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자체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술⋅디자인 개발, 해외시장 개척, 공동구매, 공동판매 등을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그들 사이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활성화할 수 있는 조직이나 관행들이 잘 발전되어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중소기업 상호간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있어야만 대기업과의 수직적 거래관계에서도 협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발전을 위해 대·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 관행에 관해서 엄격한 법 집행과 소송제도를 보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은 중소기업 서로간에 수평적 네트워크를 쌓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행 법체계에서 이러한 네트워크는 공정거래법 19조의 담합, 카르텔에 해당됩니다. 이번에 하도급법을 개정할 때도 납품단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집단 교섭권을 주자라는 얘기가 일각에서 있었지만 그것을 못하고 협동조합에게 대리로 신청할 수 있는 권한만 줬는데 왜 집단 교섭이 안 되냐 하면 이것이 법 규정상 담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초과이익 공유제'처럼 이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재계가 이념적으로 반발하는 것처럼 중소기업들이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크를 깔아주자는 아이디어도 재벌들은 이념적으로 거부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점들을 극복하는 것이 재벌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가서 중소기업을 발전시키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찬 : 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조류가 확산되면서 자본이동이 자유로워 졌고 노동의 협상력은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벌구조가 강화되면서 노동조합 자체가 양극화 되었습니다. 몇 개 재벌에 속한 노조는 엄청난 혜택을 보고, 나머지 하청화 되어 있는 노동 쪽은 수탈을 당하면서 노동 연대가 안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지간한 수출 대기업들은 평균 임금이 8천만원을 넘어가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계열화되어 있는 하청기업들은 비정규직에다가 임금도 낮고 고용도 불안한 상태입니다. 노동연대가 안 되는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공정거래의 기본 정신이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건데 그것이 오히려 약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결국 민주주의가 없이는 자본주의도 안 됩니다. 소수의 재벌 위주로 경제를 운영하면 경제도 발전하고 민주주의도 정착되느냐, 이미 20세기에 일본과 독일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법의 엄정한 집행, 사법부의 올바른 판결, 정확한 정보, 이런 것들은 민주사회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지금 중국이 노동력, 자본을 투입해서 성장하고 있지만 조금 더 지나 우리와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토대가 되어야 자본주의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과 같이 금산분리 원칙이 계속 완화되고 재벌의 독점이 심화되는 현상이 지속 될 수 있겠냐는 것이죠. 언제쯤, 어디에서 궁극적으로 파탄이 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흐름을 막을 진보개혁진영의 역량은 미약한 수준입니다. 한국경제 구조가 이런 방식으로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정말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좌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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