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인물 인지도에서 너무 달렸다. 선거 당일까지도 한나라당이 조심스럽게 엄기영 후보의 승리를 점친 이유기도 했다.
그런데 최문순이 엄기영을 눌렀다. 여론조사마다 확연하게 뒤지던 최문순이 엄기영을 제치고 당선증을 받았다. 긴박한 '리얼 추격전' 끝에 대반전을 이뤄낸 최문순의 승리에 숨겨진 주인공들이 화제다. 이른바 'X맨'과 'P사감'이다.
강원지사 선거 최대 화제작 "딴소리하는 엄기영"
▲비례대표 의원 3년이 정치 경력의 전부인 최문순에게 강원도지사라는 거대한 역할을 안겨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상대 후보인 엄기영이었다. ⓒ연합뉴스 |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된 후 강원도지사 선거의 키워드 중 하나는 'TV토론'이었다. MBC <뉴스데스크> 앵커 14년 경력의 엄기영 후보가 기자 출신이기는 하나, 앵커 경력은 없는 최문순 후보와 맞서 번번이 '황당한'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엄 후보는 TV토론에서 동문서답으로 일관하거나 준비해 온 답변서를 질문과 관계없이 반복해서 읽는 모습을 강원도민들에게 보여줬다.
TV토론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것의 제목은 "딴소리하는 엄기영"이었다. 이 토론에서 최문순 후보가 "엄 후보는 '이광재 전 지사가 참여정부에서 기소됐다'고 했는데 이 전 지사가 기소된 것은 2009년 3월 26일인데 사실관계를 확인해 달라"고 하자, 엄 후보는 엉뚱한 답변을 이어갔다.
엄 후보는 "이광재 전 지사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며 "이 전 지사는 어떻게 보면 비운의 정치인이었고 결국 민주당이 재판 중인 이 전 지사를 공천해서 다시 선거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최 후보가 "우선 사실 관계 여부를 확인해 달라",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해 달라"고 재차 재촉했지만 엄 후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원도지사 재보선에 국민의 혈세가 엄청나게 들어가는 만큼 민주당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이런 엄 후보의 모습에 토론 사회자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동영상의 조회수는 무려 24만에 달했다.
또 다른 동영상도 있다. 이 동영상에서 엄 후보는 불과 5분 여 사이에 완전히 180도 다른 의미의 주장을 동시에 펼쳤다. 그는 "기업의 투자는 해당 기업의 경영 논리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라며 메디슨을 인수한 삼성의 1조2000억 원 투자는 이광재 전 지사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뒤에서는 같은 건을 놓고 "나는 벌써 강원도의 일자리를 이렇게 창출하고 있다"며 자신이 삼성의 투자를 이끌어낸 것처럼 말했다.
최 후보가 이런 모순을 지적하자 엄 후보는 "내가 언제 내가 유치했다고 했냐, 삼성과 꾸준히 접촉해 왔다고 했지"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 동영상의 제목은 '엄기영 개콘 2탄'이었다.
엄기영의 전 특보가 연출한 '펜션 불법 선거운동'
엄 후보의 '최문순 일병 구하기' 프로젝트는 선거 막판에 드디어 대미를 장식했다. 강릉의 한 펜션에서 35명의 여성을 동원해 불법으로 전화 선거운동을 하다 적발된 것이다. 일당 5만 원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성들이 담요와 점퍼를 뒤집어 쓰고 펜션에서 나오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엄기영 후보는 더욱이 이 여성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이 펜션에서 발견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서명 명부를 엄 후보에게 전달했던 단체에서는 "깊은 배신감"을 토로했다.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엄 후보의 전 특보 최모 씨는 잠적했다.
이 사건이 강원도 표심을 크게 뒤바꿨다는 것은 공통된 분석이다. 여론조사기관 <더플랜>의 박병석 대표는 "마지막 일주일 강원도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적발 등 일련의 일들이 전체 표심을 '심판'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최문순 당선자도 28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큰 틀에서 보면 한나라당의 일방주의와 힘에 의한 통치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에 자리 잡고 있었고 작게 보면 TV토론이 승부를 가른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최 당선자는 "강릉 펜션 사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돈 모아주고 '딴 짓'하는 동료 의원 감시까지, 최문순의 P사감
결과적으로 엄기영이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숨겨 둔 'X맨'이었다면, 민주당 내에도 숨은 주인공이 있다. 이른바 'P사감'이다.
P사감은 강원도 선거에서 그야말로 종횡무진했다. 돈을 모아주고, 배치된 지원 인력의 실시간 위치까지 감시했으며, 선거 하루 전날 모 방송사의 <9시 뉴스>에 나와 "엄기영 당선되면 선거 다시 해야 한다"고 '협박(?)'해 부동층 민심을 끌어 왔다.
P사감은 다름 아닌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강원도 선거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가장 먼저 '자금 확보'에 나섰다. 86명 소속 의원 전원에게 1인당 100만 원씩 후원금을 내라고 '당부'하는 수준을 넘어, 후원금 내기를 머뭇거리는 의원들에게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독촉했다. 의총에서 공개적으로 '10명'을 지목하는가 하면, 그래도 내지 않은 5명에게 포기하지 않고 후원금을 거둬 들였다. 결국 민주당 의원 전원이 최 후보의 선거운동 비용을 후원했다.
심지어 지원 유세에 배치된 의원들의 '딴 짓'까지 감시했다. 28일 홍영표 의원은 민주당 의총에서 박지원 원내대표를 소개하며 "내가 지원 유세 배치를 받아서 잠시 딴 일을 하느라 그 지역을 벗어나 있으면 (박 원내대표가) 곧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며 "위치추적 장치까지 달아 악역을 하느라 수고하셨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선거 막판 가장 화제가 된 강릉 펜션 사건에서도 박지원 원내대표의 '역할'은 도드라졌다. 그는 선관위가 펜션을 급습했다는 보고를 받고 강릉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경찰과 선관위 직원에 의해 통제된 기자들이 '그림'을 찍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전화기와 컴퓨터, 펜션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엄기영 후보의 명함은 유권자들의 머리 속에 확실한 이미지로 남았다.
▲ 결과적으로 엄기영이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숨겨 둔 'X맨'이었다면, 민주당 내에도 숨은 주인공이 있다. 이른바 'P사감'이다. ⓒ연합뉴스 |
이광재 전 지사의 부인의 눈물…강원도, 민주당의 '블루 오션'?
모두가 인정하는 공로자, 이광재 전 지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재보선에서는 이 전 지사보다 이 전 지사의 부인의 눈물이 많은 역할을 했다.
이 전 지사의 부인 이정숙 씨는 최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눈물의 지지 연설'을 했다. 이 씨는 "강원도민들을 마주하면 제 마음이, 제 아픔이 봇물 쏟아진 듯 쏟아나올 것 같아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었지만 강원도민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이 자리에 섰다"며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최문순 당선자를 만들어낸 여러 사람의 숨은 공(功)은 이제 '과거'가 됐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 이어 재보궐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강원도를 쟁취하면서 강원도 출신 민주당 의원들의 '고향행'이 미래의 관심사다.
강원지사 후보 경선에 참여했던 이화영 전 의원을 비롯해 상당수 강원도 출신 의원들에게 강원도는 더이상 민주당의 불모지가 아니라 '블루 오션'이 됐다.
▲27일 밤 최문순 후보의 당선 소식에 함께 기뻐하는 이광재 전 지사(오른쪽)와 이 전 지사의 부인 이정숙 씨(중간).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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