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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350만 원짜리 신발을 던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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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350만 원짜리 신발을 던졌나?

[기고] 하이디스 정리해고 1000일 투쟁기

제가 하이디스에 입사한 건 스물두 살 때였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휴학을 하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6개월만 일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집에 있던 자동차가 사고가 나서 폐차를 하게 되고 차를 새로 사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정직원이 된 지 얼마 안됐지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대출을 받아서 부모님께 차를 사드렸습니다. 저는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계속 일해야 했고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집안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할 땐 열심히 일하고, 쉬는 날엔 부모님과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고 여가를 보내며 평범한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2013년 5월, 회사가 일이 없다며 공장을 멈추고 교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두 달 휴직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산물량이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말하며 희망퇴직을 공고했습니다. 생산팀 관리자들은 개인 면담을 하면서 남아있어도 너희가 할 일은 없다고 희망퇴직을 종용했습니다. 수많은 동료들이 떠나갔습니다. 800여명이던 직원이 반 토막이 났습니다.

그러나 희망퇴직이 마무리 되자 기다렸다는 듯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없다던 물량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적은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사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직원 가족들까지 모아 놓고 회사를 더 키워나갈 것이라고 경영설명회를 했습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힘들지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시 공장은 잘 돌아갔고, 2014년에는 새로 직원도 뽑았습니다. 이때 제 동생이 하이디스에 입사했습니다. 동생은 비정규직으로만 일하다가 정규직으로 일하니 너무 좋다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동생과 함께 쇼핑도 가고 서로 돈을 모아서 집에 용돈도 드리고 하는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015년 1월 7일 회사 상무가 직원들을 모아놓고 급작스럽게 공장폐쇄를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희망퇴직이 공고되었습니다. 하이디스 지회는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두 차례의 대만원정투쟁을 떠났고, 한국에서는 대만영사관 앞과 사측법률대리인 김앤장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했습니다. 고용노동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하이디스 상황을 알리고, 문제해결에 나서라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 떠나갔습니다. 제 동생은 집안 사정 때문에 퇴직을 선택했습니다. 동생이 집안을 챙긴 덕분에 저는 남아서 싸우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2015년 4월 1일, 377명의 직원들 중에 해고되지 않은 시설관리인원 30명과 희망퇴직을 선택하지 않은 해고자 79명만이 남았습니다. 정리해고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리해고 일주일 뒤, 당시 민주당 문재인 당대표를 만나서 하이디스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함께 싸우던 동지가 열사가 되었습니다. 정리해고가 아니었으면 행복하게 잘 살았을, 한 가정의 가장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열사 죽음에 책임을 묻기 위해 3차 원정단이 열사부인과 함께 대만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대만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폭력 연행당하고,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저는 3차 대만 원정단의 강제추방에 항의하고, 하이디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4차 대만원정을 떠났습니다. 40도에 육박하는 숨 막히는 더위와 틈만 나면 내리는 폭우 속에서 투쟁했습니다. 한국에서 열사의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저는 대만에 있어서 장례식에 갈 수 없었지만 열사가 남긴 "끝까지 싸워 반드시 이겨 달라"는 말을 가슴 깊숙이 새기며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하이디스 정리해고가 100일째 되던 날, 대만에서 문화제를 진행했습니다. 문화제 마지막에 회사 임원들 사진을 걸어두고 신발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이 신발던지기로 저는 한국에서 모욕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형사재판에서 벌금 100만원이 선고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 측이 신발던지기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민사소송을 걸어 손해배상 1억을 청구했고, 25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집에 알려지게 되면서, 집에서 이제 투쟁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라는 압박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길 위에서 두 번의 계절을 보내고, 올해 6월 하이디스 문제해결에 정치권이 나설 것을 요구하며 여의도로 갔습니다. 6월 16일 긴 시간 미뤄져온 해고무효 민사소송에서 하이디스의 해고는 부당하다 판결 받았습니다.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판결이 선고되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억울하게 해고당하고 2년이 넘게 길 위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내 옆에 함께 울고 있는 동지들의 얼굴을 보며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법원에서도 판결 받았으니 뭔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질 않았습니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하이디스 문제해결을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겨울을 코앞에 두고 청와대 앞으로 왔습니다. 비닐 한 장에 의지한 채 매서운 추위 속에 투쟁하고 있습니다. 12월 25일이면 정리해고 투쟁을 시작한지 1000일이 됩니다. 하이디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230일입니다. 이 오랜 시간을 정부의 무관심 아래 외투자본의 특허권 먹튀와 정리해고에 외롭게 맞서 싸웠습니다. 처절한 투쟁 끝에 저에게 남은 것은 350만 원짜리 죄가 덧씌워진 신발뿐입니다. 벌써 길 위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친 마음에 올 겨울이 유난히 더 춥게 느껴집니다.

이 추위를 견디고 1000일의 시간을 뛰어넘어서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투쟁을 이어가려 합니다. 다시 한 번 힘내서 갈 수 있도록 연대의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이디스는?

2014년 기술료 수익으로만 천억 원의 수익이 났다. 그러나 2015년 1월 급작스럽게 공장을 폐쇄시키고, 전직원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2015년 4월 1일 해고당하지 않은 시설관리 인원 30명과 희망퇴직을 거부하고 정리해고 당한 79명이 남았다. 109명이 먹튀자본에 저항하여 투쟁을 시작했다.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오래 노숙을 해야 했다.

2015년 5월 해고자가 아니었던 배재형 전 지회장을 먼저 하늘로 보내야만 했다. 전 지회장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투쟁을 했었다. 조합원 신분으로 대만 원정투쟁도 두 차례나 다녀왔다. 자본의 탐욕에 저항하며 꼭 이겨달라는 말과 함께 노동탄압, 착취가 없는 세상으로 먼저 간다며 '천사불여일행'을 남기고 하늘로 올랐다. 남겨진 이들은 슬픔을 뒤로 한 채 약 2개월간의 열사투쟁을 통해 열사의 가족대책방안과 장례절차에 합의하고 열사를 모란공원에 모셨다.

투쟁 1000일을 맞아 12월 27일(수) 11시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대의 날 행사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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