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좀 더 들려달라는 아이에게 "그 다음은 아빠도 생각을 해 봐야하니 내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곤, 음악을 틀고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몇 분이 지나 키득거리며 인디언 팬플룻 소리를 따라 내던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는 그렇게 있으면 좋아?"
"응, 좋아."
"뭐가 좋아?"
"그냥 정리가 되어서 좋아."
"그렇구나~."
아이는 금세 잠들고, 저는 가만 앉아 생각과 감정을 지켜봅니다. 필요 없이 욕심냈던 일, 여물지 않은 말과 행동들, 환자를 보면서 했던 말이나 치료에서 놓친 것, 아이에게 했던 말과 행동... 대체로 후회되는 일이 많고, 시간이 흐르면 케케묵은 일들까지 떠오릅니다. 때론 그러다 꾸벅 졸기도 하지요. 어떤 분들은 수마(睡魔)라 해서 조는 것은 경계하지만, 저는 편하게 이완되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기에 그냥 씩 웃고 다시 자세를 바로 잡습니다. 언제나 'Let it be, Let it flow, 하는 둥 마는 둥' 입니다.
환자를 살피다 보면 맥(脈)이 조(躁)한 경우가 많습니다. '분주함, 급함, 심란함, 불안, 답답함'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소화되지 않은 감정으로 인한 긴장반응이 신체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성질환 환자에게서는 치료를 하면서 일정 정도 회복되면 이런 반응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처리되지 않고 묻혀 있던 묵은 것들이 치료과정에서 올라오는 것인데, 그래서 치료가 잘 되다가 후퇴하기도 합니다.
이런 환자에게는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도울 수 있는 호흡 기법을 익히도록 합니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신체를 이완시켜서 보다 섬세하게 본인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나 명상을 권합니다. 많은 환자가 드러난 증상을 가리고 감추고 없애는 치료에만 익숙해져 있다 보니, 정작 자신의 몸과 감정과 생각의 상태를 인지하는데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래 감춰진 또 다른 자신은 계속 '이대로 괜찮겠어? 시간 내서 날 좀 봐!'라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치는데, 이것이 조(躁)한 맥과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나지요.
호흡법이나 명상과 같은 기법은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과 같습니다. 여러 곳에 접속해 작업하면서 생긴 불필요한 파일이 쌓이면 처리 속도가 떨어지고 때론 컴퓨터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정리가 되지 않은 감정과 기억의 조각이 몸과 마음과 생각에 흩어져 쌓이게 됩니다. 이럴 때 백신 프로그램을 돌려서 파일을 청소하고 바이러스를 찾아내서 제거하는 것처럼, 잠시 멈춰서 감정과 기억의 조각을 바라보면 대부분은 그 동안 무사히 살아온 경험에 의해 자동으로 정리가 되고 바이러스처럼 병적인 것들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소화가 됩니다. 이렇게 최적화 작업을 마치고 나면 뇌와 신경계와 신체는 보다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되고, 이것은 효과적인 치료로 이어집니다.
환자들에게 이런 맹물 같은 처방을 하면 크게 세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는 않겠습니다(물론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생각날 때마다 하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중 예후가 가장 좋은 환자는 두 번째 경우입니다. 첫 번째는 당연하고, 세 번째의 너무 열의에 찬 경우도 대부분 자신이 한계지은 기간 내에(변화가 일어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기대한 결과(너무나 큰)가 나오지 않으면 급격히 관심이 식어버리고 방법 자체에 불신을 갖더군요. 하지만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냉담하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게 느리지만 꾸준히 실행한 분에게는 분명한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당연히 병의 치료에 있어서도 좋은 결과가 따라옵니다.
다카하시 신지의 <붓다>(김해석 옮김, 해누리기획 펴냄)란 소설에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매일 숙소로 돌아와 자신의 설법과 행동과 마음을 점검하는 부처가 등장하는데, 저는 실제 부처가 그러했을 거라 생각하고 그런 부처를 사랑합니다. <논어> 학이편에는 "나는 날마다 세 번 나 자신을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도모하는 데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들과 사귀면서 믿음이 없었는가? 전수받은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라는 증자의 말이 나옵니다. <대학>의 저자로 알려진 증자는 유학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수양의 방법론을 강화한 학자로 알려져 있지요.
우리가 잠시 눈을 감거나 한 곳을 응시한 채로 몸을 바르게 하고 호흡에 집중한다고 해서 부처나 증자의 경지에 이를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몸과 감정과 생각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리란 것은 확실합니다. 나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건강한 삶의 필수 조건 중 하나이지요.
어느새 2017년이라 이름 붙여진 시간의 한 마디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밤도 긴 요즘 하루 정도 가만 앉아 홀로 지난 한 해를 반추해 보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지난 시간을 잘 정리하면 새로운 한 해는 자연스레 분명해질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수고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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