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활
1991년 소련이 붕괴한다.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구세주가 오신 날, 무신론 국가가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혁명가를 대신하여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구세주 탄생했으니 다 찬양하여라. 이 세상의 만물들아 다 화답하여라. 은혜와 진리 되신 주 다 주관하시니, 만국 백성 구주 앞에 다 경배하여라."
일국 사회주의가 무너진 자리, 만국과 만인과 만물을 주관하는 주님이 재림하셨다. 백성들은 찬양하고 화답하고 경배하였다.
1991년 이전 1988년이 있었다. 988년으로부터 1000년이 되는 해였다. 988년은 러시아가 출발한 때이다. 러시아의 옛 이름, 루시가 세례를 받았다. 크림반도에서부터 기독교를 수용했다. 지중해 북쪽 슬라브세계가 정교문명에 입문한 것이다.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온축되었던 그리스고전과 성경이 키릴문자로 전수되어 러시아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그 천주년을 기념하야 종교 해금을 단행했다. 신앙의 자유, 포교의 자유를 공인한 것이다. 페르스트로이카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즉 페레스트로이카의 요결은 시장화나 자유화가 아니다. 서구화는 더더욱 아니다. 이성의 독재에서 영성을 해방시킨 것이다. 근대의 독재에서 전통을 회복시킨 것이다. 타는 목마름, 탈세속화와 재영성화를 수긍한 것이다. 과학과 합리만으로 체제가 온전히 굴러가지 않음을 뼈아프게 후회한 것이다. 겸허하고 겸손한 인간을 재발견한 것이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인간보다 기꺼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거룩한 용기를 승인한 것이다.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만 살피는 '교조적 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 진단을 비웃기라도하는 양 21세기 러시아는 나날이 정교국가, 정통국가, 전통국가로 복귀하고 있다.
1988년 이전 1982년이 있었다. 11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사망한다. 국영방송을 통하여 장례식이 소련 전역에 전파되었다. 놀라운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미망인이 남편을 보내며 십자가를 긋는 모습이었다. 신의 가호와 가피를 빌어준 것이다. 천국행을 소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흑해부터 극동까지, 북극부터 초원까지, 소비에트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데올로기의 왕국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과연 1980년대 태어난 내 또래 이름들이 흥미롭다. 재차 기독교 전통에서 따온 이름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름만 살펴도 세대 차이, 역사의 귀환을 짐작할 수 있다. 소련 해체 이후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공산당 고위 간부들조차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생애를 걸쳐 무신론을 설파했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장마저도 1994년 사망하자 정교의 예법을 따라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과학은 형이하(形而下)만 다룬다. 영물(靈物)로서 인간은 형이상(形而上)을 갈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아편' 이념만으로는 충족이 되지 않는다. 신학 없는 과학 왕국은 백년도 못가 주저앉았다.
그 성/속 대반전의 상징이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이다. 크렘린의 서쪽에 자리한다. 1812년 나폴레옹에 맞선 조국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만들어졌다. 1931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기도할 시간에 노동을 하라고 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부가가치를 올리라 했다. 유물론을 신봉하고 물신을 섬기라고 했다. 그래야 과학적 인간, 합리적 인간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수 있었다. 성당의 종과 탑을 녹여 총과 칼, 낫과 삽을 만들었다. 생산력을 더욱 중시한 것이다. 복리와 복지를 따질 뿐 복음은 팽개친 것이다. 성당을 허문 자리에는 50m 크기의 레닌 금동상과 소비에트궁전을 세울 계획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불행 중 다행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히틀러 덕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에 급급했다.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또한 복원된 것이다.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1994년부터 복구가 시작되었다. 2000년, 예수가 태어난 지 두 번째 천년에 맞추어 완성된다. 바로 그 밀레니엄에 집권한 이가 푸틴 대통령이다. 2009년, 새 구세주 성당에서 취임식을 올린 첫 총주교가 키릴이다. 현재 성/속 양면에서 러시아를 이끌고 있는 쌍두마차이다.
2017년 외부에서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조망한다. 21세기하고도 17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20세기 시각으로 러시아를 접근한다. 정작 러시아인들은 시쿤둥하다. 공산혁명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는 2018년을 훨씬 더 고대한다. 모스크바 (재)천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수도를 되돌렸다. 그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도 개최한다.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간주하는 러시아의 세계관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러시아의 중심이 옮아간 때가 16세기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영향이 지대했다. 몽골 치하에서 중국의 중심이 남방에서 북방, 오늘의 북경으로 이전된 것처럼, 러시아 또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치의 중심지가 전이한 것이다. 몽골의 대칸이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으로 구축했던 물류망의 상당부분을 모스크바가 물려받았다. 언어에서부터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은 울리짜(у́лица)이요, 돈은 뎅기(де́ньги)이다. 전자는 국가를 의미하는 몽골어 '울루스'에서 왔고, 후자는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화폐와 도로, 러시아의 하부구조는 명백하게 몽골의 유산이다.
몽골의 육체에 로마의 영혼을 얹은 곳이 모스크바이다. (동)로마의 카이사르와 몽골의 칸이 합류하여 모스크바의 차르가 등극한 것이다. 모스크바가 정교의 성지(聖地)로서 자부심을 더욱 고취하게 된 계기에는 비잔티움의 몰락도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들어서면서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로 대체된 것이다. 지중해가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 이제 모스크바가 기독교문명을 수호해야 했다. 즉 모스크바는 정치적, 군사적 위상보다 종교적 권위가 훨씬 더 높다. 북방의 예루살렘을 자처한다. 명장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이반 대제>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반 대제가 모스크바 귀족들을 앞에 두고 두 개의 로마(로마와 콘스탄티노플)가 모두 몰락하고, '제3의 로마'가 섰음을 선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에이젠슈타인을 <전함 포템킨>의 감독만으로 기억하는 것 또한 편향이다.
2017년 3월 16일, 성도 모스크바에서 또 한 번의 획기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정교회의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고의식파'의 모스크바 주교와 정식으로 회동한 것이다. 2020년에는 고의식파의 태두로 불리는 아바쿰 장사제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상도 세우기로 했다. 외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고의식파를 낯설어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좌/우를 막론하고 고(古)가 부재함이 고질병이다. 허나 러시아 문명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다면 충격적인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350년 만에 국가권력과 이단파 사이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러시아 정교회도 신교와 구교가 갈리어 오래 반목해왔다. 러시아의 프로테스탄트가 고의식파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러시아판 종교개혁과 신/구 갈등이 20세기 러시아혁명과 소련 해체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그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부상하여 공식서사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혁명 전후사의 재인식, 러시아 혁명사를 다시 써야한다.
2.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죄와 벌>이 있다. 출간된 해가 중요하다. 아무 때나 출판한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정교사상가였다. 1866년에 발표한다. 1666년으로부터 200년이 흐른 해였다. 1666년은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을 상징한다. 종교논쟁이 일어난 해이다. 당시 니콘 총주교는 '근대화'를 추진했다. (서)로마교황과 동방정교 사이 동/서 합작을 추구했다. 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하는 강성한 오스만제국에 공동 대처하여 이스탄불로 전락한 콘스탄티노플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북방의 십자군', 성지 탈환을 위해 정교회 개혁을 촉구한 것이다. 서로마적, 라틴적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가톨릭 세력이 우세한 우크라이나 서쪽까지 합병하는 정치적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제국화에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여기에 동방정교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옹호하며 저항한 세력(프로테스탄트)이 바로 '고의식(古儀式)파'이다. 문자 그대로 옛 의례를 고수하는 세력이다. 선봉에 선 사람이 장사제 아바쿰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죄와 벌>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라스콜니코프'이다. 라스콜(раско́л)은 분열이라는 뜻이다. 고의식파에 대한 속칭, 멸칭이었다. 보수파라고도 불리지 않았다. 분열파로 치부되었다. 신의식파가 러시아제국의 주류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일등공신이 표토르 대제이다. 러시아의 제국화, 서구화, 근대화에 일로매진했다. 고의식파의 아성인 모스크바마저 버렸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성도(聖都)에서 제도(帝都)로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고의식파의 눈에는 불경한 짓이었다. 천박하고 위엄 없는 새파란 신도시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성토했다. 표토르 대제 또한 정교회의 적으로 간주했다. 동로마식 차르라는 명칭마저 서로마의 황제로 바꾸어버린 그를 '독사의 자식'으로 쏘아붙였다. 봉합되지 않는 갈등 끝에 표토르는 국가가 직접 종교를 관리키로 한다. 총주교직을 폐지하고 종무원을 설치하여 성당을 통제했다. 주목적은 고의식파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의식파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이요 모스크바마저 등지기로 한다. 볼가강을 지나고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일대까지 망명을 선택했다. 고독하고 고아하게 고립되어서 성스러운 러시아를 고수키로 한 것이다. 20세기 초, 러시아제국 인구의 얼추 3할, 3500만이 고의식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알음알음 살금살금 러시아판 '태평천국운동'을 도모한 것이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호시탐탐했다.
기회는 1905년에 열린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다. 제국이 흔들거렸다. 휘청거렸다. 그러자 대항국가, 대안국가가 자태를 드러내었다. 종무원 관할 밖에 있는 고의식파는 무교회 운동, 독자적인 민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일종의 '인민 교회'를 세운 것이다. 제국의 탄압 속에서 고난과 수난을 겪으며 단련이 되었다. 주류문화에 맞서는 저항문화, 하위문화도 형성했다. 엄격한 종파인 만큼 청교도처럼 근검절약과 근면성실과 성심성의를 덕목으로 쌓았다. 공권력 밖에서 자조하고 부조하며 경제기구, 협동기구, 금융기구도 만들어내었다. 독자적인 산업도 일구고 기업 활동도 전개한다. 고의식파 윤리를 갖춘 자본가들을 배출한 것이다. 국회에 맞서는 민회 또한 작동시켰다. 시민사회를 이룬 것이다. 두마의 마주 편에 섰던 그 민회의 이름이 바로 '소비에트'이다. 고의식파 신도들이 영성생활과 물질생활을 공동으로 영위했던 민간 조직이 소비에트의 기원이다. 즉 소비에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파리 꼬뮨을 복제한 것이 아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사후 합리화였을 따름이다. 소비에트는 철두철미 러시아적 현상이었다. 제국 아래 복류하던 거대한 뿌리, 정교문명의 고층(古層)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래서 1917년 러시아제국이 붕괴하자 이듬해 곧바로 수도를 옮긴다. 제3의 로마, 북방의 예루살렘, 모스크바로 되돌아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되돌리기(re-volution), 회심(回心)의 회향(回向), 혁명(革命)이었다.
3. 이바노보 소비에트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1917년 러시아제국 인구 1억 가운데, 노동계급은 고작 200만 남짓이었다. 도무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될 수 없었다. 끼워 맞추기 억지논리를 구사하면 더덕더덕 잔말과 군말이 붙는다. 볼셰비키 또한 소수파였다. 불과 5000명에 그쳤다. 한 줌 모래였다. 그 중에서도 레닌은 극소수파, 티끌이었다. 멘셰비키는 제국의 서남부가 근거지였다. 유럽 지향적인 세력이었다. 볼셰비키는 동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포진했다. 볼가 강과 우랄 산맥 일대가 터전이었다. 고의식파가 오래 진을 치고 있던 장소이다. 700만 농민병들이 볼셰비키와 결합한다. 러시아판 의병들이었다. 결정적으로 고의식파도 합세한다. 무려 3000만이 넘었다. 토착파가 외래파에 승리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아니라 '러시아적' 혁명이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라고 외쳤던 것이다. 공산당으로! 가 아니었다. 고의식파의 민간 네트워크가 국가를 접수한 것이다. 1918년 '제3 로마' 모스크바 천도에 이어, 1919년에는 '제3 인터내셔널'이 출범한다. 선민사상이 전위사상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세계선교가 세계혁명으로 업데이트되었다. 1918년 테러 이후 레닌이 은거하며 지낸 별장 또한 고의식파 마을에 자리했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사체를 방부 처리키로 결정한 것 또한 마르크스주의와는 일말의 관련이 없었다.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과학적 공산주의자들은 줄곧 반대했다. 왜 혁명 지도자를 '정교의 성인'처럼 기념한단 말인가? 반박하고 반발했다. 정곡을 찌른 것이다. 레닌은 고의식파의 전통에 따라서 성인으로 추앙된 것이다. '빈자의 차르', '프롤레타리아트의 신'이 되었다. 레닌이 안치된 곳 근방에는 이반 대제 등의 유체들도 보존되어 있다. 모스크바 천도도, 소비에트연방 국명도, 레닌의 시신 처리도, 종교의 입김이 지대했던 것이다. 일종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방불했다고 하겠다.
소련의 탄생 밑바닥에 종교가 자리함을 가장 날카롭게 간파한 이가 스탈린이다. 제국의 남부 조지아 출신이었다. 조지아 정교회, 신학생이었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줄도 알았다. 철저한 무신론자 트로츠키를 누르고 후계자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스탈린 별장에서의 최측근 모임에서는 종종 성가도 울려 퍼졌다. 소련을 구하는데도 종교를 이용한다. 1941년 독소전, 나치의 탱크가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까지 밀고 들어왔다.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우랄 산맥 동편, 시베리아와 몽골과 만주와 극동에서 총동원된 병사들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응당 고의식파 신도들이 다수였다. '제3의 로마'를 수호해야 한다는 성전(聖戰)을 수행한 것이다. 그래서 1943년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와의 화해를 선언했던 것이다.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을 파괴한 것이 착오였음을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명명 또한 '대조국전쟁'이었다. 불과 20년에 불과한 신생국가 소련를 위해서 헌신했던 것이 아니다. 소비에트인이 아니라 정교도 신자로서, 러시아문명을 호위하기 위하여 분투한 것이다. 오늘날 정교회(의 보수파)가 유독 스탈린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스탈린 사후, 우크라이나 군산복합체 출신의 후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성당은 재차 트랙터 보관소로 전락해버린다. 이성이 영성을, 이념이 종교를, 과학이 신학을, 속이 성을 압도했다.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이바노보가 있다. '어머니의 강' 볼가 유역에 자리한 지방도시이다. 한때는 '러시아의 맨체스터'라고 불렸던 신흥공업도시였다. 19세기 중반 방직산업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소비에트'가 가장 먼저 출연한 도시로 유명하다. 소비에트연방, 소련의 발원지이다. 과연 20세기 초 시민의 2/3가 고의식파였다. 러시아 상징주의의 카리스마적 존재, 시인 블로크가 혁명을 포착하여 써내려 간 시 <12>(1918)가 상징적이다. 12란 명백하게 예수의 열 두 제자를 의미한다. 혁명병사가 곧 예수의 사도였다는 것이다. 복음서를 들고 혁명에 나섰지, <공산당 선언>을 읽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은 것은 런던과 파리 등 서유럽의 대도시에 유학 갔던 극소수 엘리트뿐이었다. 혁명을 설파했던 <이스크라> 또한 고의식파 자본가가 자금을 댄 잡지였다. 그러고 보니 <이스크라>(и́скра)도 <프라우다>(пра́вда)도 종교적 메타포로 가득하다. '불꽃'과 '진리'이다. 진리의 불꽃을 전도하는 신심 깊은 열 두 제자의 후예들이 성상을 들고 구체제를 전복시킨 것이다. 세속화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 종교를 탈색시켜버린 기왕의 혁명사관이야말로 러시아 문명에 대한 커다란 무지에 기반한 교조적 해석이었던 셈이다.
2017년 이바노보를 둘러보면서 뜻밖의 사실도 접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사랑했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고향이 바로 이바노보였다. 비디오로 소장까지 했던 <희생>과 <노스텔지아>, <솔라리스> 하나 같이 원죄와 구원을 주제로 삼은 수작들이었다. 고의식파였음에 틀림이 없을 듯하다. 펜을 든 19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메라를 멘 20세기 타르코프스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백년을 넘어 천년이 한 줄에 꿰어지는 듯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스크바로, 동로마에서 북로마로. 1500년 '다른 기독교'의 유산이 바로 이바노보에 착근되었던 것이다. 이반(Ива́н)은 요한(John)의 러시아어식 표기이다. 즉 이바노보는 '사도 요한의 도시'이다.
4. 승천
본래 이름이 이바노보가 아니었다. 스탈린이 집권 초기 바꾸어버린 지명이다. 1932년 스탈린 체제에 저항하며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응당 성화를 들고 투쟁했다. 이바노보 이전에는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Ива́ново-Вознесе́нск)'였다. 요한의 '승천'(вознесе́ние)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이 하늘로 오르는 곳이었다. 요한마저 지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천상 대신 지상에 묶어둔 셈이다. 2032년 다시 '이바노보 보즈네센스코'로 복귀할지도 모르겠다. 정교문명 대국을 표방하는 푸틴-키릴 체제 아래서 능히 가능한 일이다. 2009년 키릴 총주교의 취임 연설이 흥미롭다. '탈-세속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본디 정치와 종교의 심포니, 성과 속의 교향(交響)을 추구했던 동로마제국의 원리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포스트-투르스(Post-Truth) 시대, 교조적 계몽주의 시대와의 작별과도 정합적이다.
2014년 푸틴의 대통령 취임식도 인상적이다. 맨 앞줄에 총주교가 섰다. 사실상 2인자이다. 이미 준국교로서 위상을 누린다. 공교육에도 '정교문화의 기초'라는 과목이 도입되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비롯한 주요 대학에도 정교회 사원을 가지고 있다. 군대에도 종군성직자 제도가 마련되었다. 사령관을 보좌한다. 외교부와도 갈수록 밀접해지고 있다. 외교부 직속의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도 정교회 대외관계 지도자가 교육을 맡는다. 여론 또한 호의적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제도는 대통령, 더 정확히 말해 푸틴 대통령이다. 두 번째가 정교회이다. 키릴을 국가 지도자로 여긴다. 세 번째가 군대이다. 네 번째가 외교부이다. 정당과 언론과 은행과 노조는 최하위에 속한다. 적폐로 취급된다. 이미 정교국가의 틀에 상응하는 꼴을 상당 부분 갖춘 것이다. 고로 오늘날 러시아를 알고자 한다면 천 년 전 비잔티움에 비추어보는 편이 유익하다.
21세기 정교국가의 수장 푸틴과 20세기 혁명국가의 지도자 레닌의 인연이 오묘하다. 레닌은 1918년부터 고의식파 마을에 은닉했다. 1922년 발작 이후로는 언어기능을 상실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말년의 레닌을 수발하며 보살펴 준 요리사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푸틴이다. 러시아에 푸틴(Путин)이라는 성, 흔치 않다. 지금도 대략 3000여 명, 희귀성이다. 우랄 산자락에 위치한 집성촌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1770년 볼가 강을 따라 이주한 이들의 후손들이다. 그 푸틴이라는 요리사가 바로 현직 대통령의 할아버지다. 즉 레닌과 푸틴 또한 혈연과 종교로 연결된다. 레닌 묘를 철거하지 않고 보존해야 한다며 논란을 종식시킨 사람 역시 푸틴이었다. 자연스레 푸틴을 탐구해볼 차례가 되었다. 2000년 이래 17년째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다. 2020년대에도 변함없이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 전반기를 상징하는 지도자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민주냐, 독재냐? 20세기형 적폐적 관점일랑 폐기처분한다. 그 모든 선입견을 청산하고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70억분의 1' 블라디미르 푸틴을 직시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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