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12월 제50강으로, 금강 변의 숨은 비경으로 유명한 영동고을 <양산팔경>과 <한천팔경>을 감상하고, 더하여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조선 전기 박연(朴堧)의 고향을 찾아 그 음률에 젖으며 올 한해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양산팔경>은 충북 영동군 양산면(陽山面) 금강 상류 일대의 아름다운 경승지로, 영국사(寧國寺), 강선대(降仙臺), 비봉산(飛鳳山), 봉황대(鳳凰臺), 함벽정(涵碧亭), 여의정(如意亭), 자풍서당(資風書堂), 용암(龍岩)을 이르며, <한천팔경>은 황간에서 서북방으로 2km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월류봉 밑 일대의 절묘한 산수 여덟 명소를 가리킵니다.(자료 출처:두산백과, 한국관광공사 등)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50강은 2017년 12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0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옥천IC-영국사(삼층석탑/승탑/원각국사비/은행나무)-양산팔경(여의정/강선대/용암/비봉산/자풍서당)-점심식사 겸 송년모임-관어대-난계유적지(난계사/박연묘소/난계생가/난계국악박물관)-영동읍(영동향교/김참판고택)-황간(한천팔경/황간향교/가학루/사로당/흥학당)-황간IC-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0강 답사지인 <영동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 넘는 세 고개가 있는 고을
영동(永同)은 동쪽으로는 백두대간 넘어 김천과 맞닿아 있고, 금강 물줄기에 안기어 옥천, 무주, 금산과는 북쪽, 남쪽, 서쪽으로 잇대어 있습니다.
영동에서 김천으로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는 세 곳이 있습니다. 과거보러 한양 가던 영남 선비들이 피해가던 추풍령(秋風嶺) 고개는 추풍령면에서 김천 시내로 이어지고, 또 한 고개인 괘방령(掛榜嶺)은 매곡면에서 천년고찰 직지사와 이어지며, 고개의 생김새가 길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질매재(우두령)는 상촌면에서 지례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자락에 둥지를 튼 삶의 터전인 상촌면, 매곡면, 추풍령면은 한 면에 하나씩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고갯길이 있는데, 백두대간에 위치하는 지역적 동질성과 각각의 길 또한 저마다 지역 특유의 역사, 문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 ‘상촌, 매곡, 추풍령’ 세 개의 면을 묶어 ‘삼면삼로(三面三路)’의 고장이라 하였습니다.
금강(錦江)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충청도와 전북을 적시며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에 이르러 서해로 흘러듭니다. 발원지에서 강 하구까지 천리를 흐르며 인삼의 고장 금산에서는 적벽강(赤壁江),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는 백마강(白馬江), 국악과 과일의 고장 영동에서는 양강(楊江)이라 불립니다.
이렇듯 충청도를 관통하는 금강이 금산과 영동을 관통하는 강변길은 걷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절경을 빚어놓았는데, 이 길을 ‘양산노사(陽山路史)’라 하며 금산의 제원면과 영동의 양산면을 잇는 길입니다.
읍치구역은 영동과 황간
영동(永同)이란 지명은 영동의 중심을 흐르는 영동천(永同川)이 주곡천(主谷川)과 양정천(楊亭川)의 두 물줄기[二水]가 합류하여 생겼는데 이수(二水)를 한 글자로 표기하면 영(永)자가 되고, 이두문(吏讀文)의 발음에 따라 길동(吉同)의 길(吉)도 ‘길=영(永)’이 되어, 영동(永同)은 이수(二水)와 길동(吉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길동(吉洞), 계주(稽州), 영산(永山), 계산(稽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비로소 영동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영동은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계주자사(稽州刺史)를 두었고 1018년(현종 9)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고, 1176년(명종 6)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감무를 두었고 뒤에는 폐지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속시켜 현감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 칙령에 따라 영동군이라 칭하고, 군내, 군동, 남일, 남이, 서일, 서이, 북일, 북이, 양내, 양남일소, 양남이소, 용화의 12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4년 부, 군, 면(府 郡 面) 폐합령에 의하여 황간군, 옥천군 및 경상도 상주군 일부를 합병하여 영동, 용산, 심천, 양강, 양산, 용화, 학산, 황간, 매곡, 상촌, 황금의 11개면으로 개편하였고, 1940년 영동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91년 황금면이 추풍령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1읍 10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동에는 영동과 황간(黃澗)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영동향교(永同鄕校)는 선조 때 처음 지었고 1660년(현종 원년)에 옛 읍성 안으로 옮겼으며, 1676년(숙종 2)에 구 교동으로 옮기고, 1754년(영조 3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앞에는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중간에는 내삼문을 두었고, 뒤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어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노후사(盧侯祠)는 영동향교 내 대성전 서쪽에 위치합니다. 1415년(태종 15) 노흥(盧興)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학문을 일어나게 하였으나 향교가 피폐하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 사재를 희사하여 관리토록 하였는데 이러한 공로를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황간향교(黃澗鄕校)는 1394년(태조 3) 읍치구역의 뒷산에 처음 지었고 1666년(현종 7) 서쪽의 토성 안으로 옮겼으며, 1752년(영조 28)과 1901년(광무 5)에 중수하였고 1978∼1981년에 크게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갖추었습니다.
대성전, 명륜당, 고직사 등이 남아 있으며 초석이 연화문으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사원 건축양식과 정자, 주택 건축양식이 절충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가학루(駕鶴樓)는 황간향교 앞에 있는 누정으로 자연을 관상하고 세상일을 논하며 손님을 맞기도 한 곳으로 전시에는 지휘본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403년(태종 3) 현감 하담(河澹)이 처음 세웠고 경상도 관찰사 남재(南在)가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하다" 하여 편액을 ‘가학루’라 하였으며, 이첨(李詹)이 기문을 썼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현감 장번(張蕃)이 다시 세웠고 1716년(숙종 42) 현감 황도(黃鍍)가, 1781년(정조 5) 현감 이운영(李運永)이, 1930년에 군수 김석영(金錫永)이 각각 중수하였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황간초등학교가 불타자 학교 건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읍청루(揖淸樓)는 황간현의 아문루(衙門樓)인 황악루(黃嶽樓)가 퇴락하여 1925년에 영동군수 최지환(崔志煥)이 당시의 지방유지와 협의하여 군 소재지인 영동읍 매천리로 이전신축하고 ‘읍청루’라 편액하였습니다.
특이한 구조의 자풍서당
자풍서당(資風書堂)은 정종과 태종 연간에 이 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남수문, 이충범, 김문기, 박수홍, 전팽령 등을 배출하였고 이후 이충범(李忠範)이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입니다.
원래는 풍곡사(風谷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의 배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을 폐하고 그곳에 새로 집을 짓고 풍곡당(豊谷堂)이라 하다가 1614년(광해군 6) 한강 정구(鄭逑)가 이곳에 머물며 ‘자법정풍(資法正風)’으로 학문을 장려하였다는 뜻으로 자풍당(資風堂)이라 하였고 다시 자풍서당으로 바뀌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유교 건축물 내에 불탑이 있다는 것입니다. 1989년 지하에 매몰된 석탑의 옥개석(屋蓋石)이 발굴되어 이 탑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 명칭은 ‘두평리오층석탑’입니다.
송계서원(松溪書院)은 1666년(현종 7) 창건된 서원으로 매계 조위(梅溪 曺偉), 송당 박영(松堂 朴英), 남정 김시창(嵐亭 金始昌),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 등을 봉안하였고 숙종 말에 삼괴당 남지언(三槐堂 南知言), 일석 박유동(一石 朴惟棟)을 추향(追享)하여 이를 송계 육선생(松溪 六先生)이라 하였으며, 봉안문은 우암 송시열이 썼습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 훼철된 것을, 1898년(광무 2) 지방 유림들이 유계를 창설하여 매년 음력 3월 보름날 육선생의 위패를 묻은 단소에서 배향제를 받들어 오고 있으며, 1956년 송계서원 유허비각을 건립하였습니다.
한천정사(寒泉精舍)는 우암 송시열이 ‘한천팔경’이라 일컫는 아름다운 절경을 음미하면서 서재를 짓고 글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후세에 우암의 제사를 모시고 글을 가르치는 한천서원(寒泉書院)이 세워졌다가 고종 초에 철폐된 후 유림들이 1910년 한천정사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소라천(召羅川), 장교천(長橋川), 중화령(中化寧)의 물이 이 부근에서 합류하여 월류봉과 어울려 선경(仙境)을 이루는 장소에 있는데, 고려시대 때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되는 석탑의 부재(部材)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한천팔경(寒泉八景), 월류봉 일대의 수려한 산수
<한천팔경(寒泉八景)>은 월류봉 밑 일대의 수려한 산수를 일컫는데 월류봉(月留峰), 산양벽(山羊壁), 청학굴(靑鶴窟), 용연대(龍淵臺), 냉천정(冷泉亭), 법존암(法尊菴), 사군봉(使君峯), 화헌악(花軒嶽)의 8곳입니다.
무첨재(無添齋)는 기묘사화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온 안요(安燿)가 지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네가 난 바에 욕됨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무첨이라 하였습니다. 1522년(중종 17)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안요는 본관이 순흥(順興)이고 이조판서(증직) 안우하(安友夏)와 세종의 왕자 밀성군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여러 차례 사화의 어려움을 겪고서 영동군 매곡으로 돌아와 무첨재를 짓고 후학을 위해 강학에 힘썼습니다.
난계사(蘭溪祠)는 박연(朴堧)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박연은 자가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밀양으로 1387년(고려 우왕 4) 영동군 심천에서 태어나 1411년(태종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거쳐 1418년(세종 원년) 관습도감 제조가 되어 음악에 전념하고, 1425년(세종 7) 악학별좌가 되어 당시의 불완전한 악기의 율조(律調)를 정리하여 악서를 편찬하였습니다.
그 후 편경(編磬)을 만들고, 궁정에서 향악을 폐하고 아악을 연주케 하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으며 1433년(세종 15)에는 회례아악을 만든 공으로 안마(鞍馬)를 하사받기도 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대제학에 올랐습니다.
1456년(세조 2) 삼남 계우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고, 난계 또한 화를 당할 뻔했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벼슬만 파직되어 낙향하여 1458년(세조 4)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는데, 특히 피리에 능했으며 조선 초기에 국악의 기반을 닦아놓은 업적으로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3대 악성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세덕사(世德祠)는 1871년(고종 8)에 밀양박씨 복야공파의 조상 6위와 고려조 우문관대제학 박시용(朴時庸), 증이판(贈吏判) 박천석(朴天錫), 한성판윤 박천귀(朴天貴), 증이판 박흥생(朴興生), 예문관대제학 박연, 전중어사(殿中御史) 박흥거(朴興居) 등 13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충주박씨와 고성남씨의 유적들
영동에는 충주박씨(忠州朴氏)와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흥학당(興學堂)은 충주박씨 종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선영 아래에 지었기 때문에 묘소에 향사할 때 재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520년(중종 15) 목사공 등 3형제가 당시 황간 현감 박영(朴英)에게 배울 때 그의 지시에 따라 처음 지었으며 1709년(숙종 35)과, 1735년(영조 11), 1869년(고종 6) 각각 중수하였으며. <흥학당기>와 <중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유재(奉裕齋)는 중종 때 안주목사를 지낸 박성량(朴成樑)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1632년(인조 10) 건립한 재실입니다. 처음에는 현판도 달지 않고 소종재(小宗齋)라 하였는데 이는 대종재(大宗齋)인 흥학당 앞에 세워져서 그리하였고 후대에 이르러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奉先裕后)"라는 뜻의 현판을 달고 ‘봉유재’라 했습니다.
사로당(四老堂)은 충주인 박수근(朴守謹)과 아우 수인(守認), 수해(守諧), 수원(守源) 4형제가 나이 80이 되도록 학문을 익히던 서당으로 1710년(숙종 35)에 처음 짓고 1767년(영조 43)에 중수하였습니다.
박수근은 호가 농와(聾窩)이고 1725년(영조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과 현감을 지냈으며. 효도와 우애로 80이 되도록 4형제가 같은 방에서 독서를 하며 정을 이어 왔기 때문에 비해당(匪懈堂)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세천재(歲薦齋)는 1691년(숙종 16)에 충주박씨 문중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손들이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성하식(成夏植)이 이곳에서 훈장을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이 황간, 매곡, 상촌 지역의 유림들을 모아 시국강연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황의사(黃義祠))는 충주인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을 모신 사당입니다. 박이룡은 1577년(선조 10) 승문원정자로 처음 벼슬에 올라, 해서(현재 황해도) 순찰사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스스로 황의장이 되어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괘방령을 근거지로 삼아 김천, 지례, 개령, 선산 등지에서 200여 회에 걸친 전투로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적으로 능성현령(전라도 화순)을 제수 받았고 1595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봉해졌으나, 임진왜란 때의 부상이 재발하여 그해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1812년(순조 12) 이조참의로 증직되었습니다.
일제재(一祭齋)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수기>에 따르면 1445년(세종 27년) 고성남씨 봉사공(奉事公) 세지(世智)가 상촌면 임산리에 복거한 후 365년 되던 해인 1809년(순조 9) 중수된 재실이라고 합니다.
대청 중앙에 있는 일제재(一祭齋) 현판을 중심으로 좌우에 존저당(存著堂), 추원당(追遠堂)의 별칭의 방이 있으며 1809년, 1919년, 1969년에 각각 작성된 중수기 편액이 남아 있습니다.
묘역은 세칭 남씨 삼효(南氏三孝)라 불리는 고성남씨 참봉공(參奉公) 인(寅), 삼괴당공(三槐堂公) 지언(知言), 참판공(參判公) 경효(景孝) 삼대의 묘소와 삼괴당의 동생 지원(知遠), 참판공의 큰 아들인 수약(守約)의 묘소가 있습니다. 묘역이 처음 조성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중종(中宗) 때인 1500년경부터 130여 년 동안 조성된 묘역으로 추정됩니다.
영모재(永慕齋)는 고성남씨의 재실로 1826년(순조 28) 남주한(南周漢)이 선대의 묘소 아래에 처음 지었는데 특이한 것은 굴뚝이 없는데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나오지 않고 불꽃이 내부로 빨려 들어가 열효율을 극대화한 구조를 하고 있는 점입니다.
1938년경 방의 구조를 알아보기 위하여 온돌을 뜯어본 결과 온돌이 2중 구조이며, 온돌 밑 사방에 물이 담겨진 옹기가 묻혀 있었다고 하며 물이 연기를 잡아들이는 특성 때문에 그런 구조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수루(花樹樓)는 고성남씨 수일파 문중에서 후손들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서당으로 1546년(명종 원년)에 옥계서당으로 처음 세운 뒤 1804년(순조 4)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화수루라 이름을 바꾸어 후손들의 강학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삼괴당(三槐堂)은 남지언이 말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강당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02년(순조 2)에 중수하였으며, 안에는 한원진의 <삼괴당기>, 송환기의 <삼괴당중수기>와 윤봉구(尹鳳九)가 쓴 당호가 남아있습니다.
고반대(考槃臺)는 남지언이 을사사화로 은거하며 즐기던 곳인데, 이곳에 그의 유허비가 있어 대각(臺閣)을 건립하여 고반대라 하였고 ‘깊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영사각(永思閣)이라고도 했으며, 앞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는 봉황정(鳳凰井)이라는 천연우물이 있습니다.
세심정(洗心亭)은 남지언이 기묘사화 때 시국을 비관하고 일생을 은거하며 세운 정자입니다. 학문과 덕을 숭상하고 도리를 배우는데 일생을 바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사는 선비들의 뛰어난 행실과 높은 절개를 본받아 이어가라는 의미에서 ‘세심정’이라 하였습니다.
남지언은 자를 신지(愼之), 호를 삼괴당이라 했으며, 본관은 고성이며, 남인(南寅)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나 장인 김시창에게 배워 향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김천찰방에 임명되어 잠시 나갔다가 사임하고 돌아와 강당을 짓고 후진양성에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덕수이씨 가문의 6세8효정문
6세8효정문은 선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 덕수이씨 가문에서 6대에 걸쳐 배출된 효자(孝子) 6인과 효부(孝婦) 2인에 대한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1764년(영조 40)에 한 곳에 모아 건립한 것입니다.
효(孝)란 부모님 생시에는 극진한 마음으로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섬기고 사후에는 법도에 따라 예를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효도가 매우 특출하다 하여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는 경우가 흔치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6세에 걸쳐 8인의 효자, 효부가 배출됨은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든 사례입니다.
청절사(淸節祠)는 정수충(鄭守忠)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정수충은 자는 경부(敬夫), 본관은 하동(河東), 호는 고송재(孤松齋),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으로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463년에 대사성이 되고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인을 숭상하고 빈곤한 자를 친척 같이 대접하여 덕화가 주위에 알려져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청백서원(淸白書院)에 배향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후손들이 1700년경에 현 위치에 영정을 봉안하고 청절사라 하였습니다.
김자수 유적은 중종 때 지어 많은 인재를 길러낸 선지당(先志堂)과 1721년(경종 원년) 건립된 9대손 김은, 김추 형제의 효자비각인 정효각(旌孝閣)이 있습니다.
김자수는 자가 순중(純中), 호는 상촌(桑村)이며, 경주김씨의 중시조로 1374년(공민왕 23)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좌상시,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고려가 망한 후 안동에 은거했던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자결하였습니다.
김참판댁은 17세기 말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안채와 별당 형식의 안 사랑채만이 남아 있고, 안채 앞에 있었다는 사랑채는 현재 건물의 기단만 남아 있습니다.
안 사랑채의 건축 연대는 17세기 말보다 조금 더 내려올 것으로 추측되고, 현존하는 문간채와 곳간채는 모두 20세기에 지어졌습니다. 안 사랑채는 부엌, 안방, 윗방, 대청을 차례로 배열하는 별당 형식의 아담한 건물로 전형적인 사대부집으로서 건축의 장식기법이 대단히 우수합니다.
금강 변의 수려한 정자들
영동에는 양강 변의 수려한 절경에 아름다운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영동과 옥천 남쪽의 하천이 양강(楊江)을 이루어 호수를 뚫고 금강으로 흘렀으니, 이 호수를 금호(錦湖)라 불렀습니다. 호수 위에 있던 환선루(喚仙樓)가 큰물에 허물어지자 이 고장 선비 37명이 1938년에 무주에 있던 한풍루(寒風樓)를 옮겨다가 옛터 옆에 세웠으나, 1971년 무주의 요구에 따라 한풍루를 반환하고, 현 위치에 다시 지어 금호루(錦湖樓)라 하였습니다.
채하정(彩霞亭)은 원래는 강선대(降仙臺) 옆에 있었으나, 오래 되어 무너진 것을 25명의 선비들이 뜻을 같이하여 계를 조직하여 1935년 새로 지었으며, 다시 무너질 위기에 봉착해 후손인 상속계원(相續契員)들이 성금을 모아 1990년 중수하고, 채하정중수공적비를 세웠습니다.
정자 안에는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이 지은 <채하정기>를 비롯하여 전태언(全泰彦)의 상량문과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여의정(如意亭)은 연안부사였던 만취당(晩翠堂) 박응종(朴應宗)이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강 언덕 위에 전원을 마련, 여러 되의 해송 종자를 손수 뿌려서 송전(松田)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어 만취당이라 하고 예의와 풍속 및 정치와 역사를 설교하며 시간을 보냈던 곳입니다. 1935년 문중에서 새로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여의정이라 하였습니다.
빙옥정(氷玉亭)은 고려 말 전객령(典客令) 김영이(金令貽)가 맏사위인 정랑 박원용(朴元龍), 둘째사위 한성판윤 장비(張丕), 셋째사위 대제학 박시용(朴時庸)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학문을 강론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입니다. 후손들이 이들을 추모하여 정자를 짓고 얼음과 같이 맑고 구슬과 같이 윤이 난다는 뜻으로 ‘빙옥정’이라 하였습니다.
봉양정(鳳陽亭)은 금운(錦雲) 이명주(李命周)가 동문수학(同門受學)하던 13명과 함께 힘을 모아 정자를 지었던 곳입니다. 어진 새들이 아침볕(朝陽)에 와서 울어대서 봉양정이라 하였고 이곳이 일만 가지 기상이 있다고 여겨 옛날부터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버금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선대(降仙臺)는 금강 기슭의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곳으로 아래를 감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과 멀리 퍼진 넓은 들의 경관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 하였으며,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훌륭한 시가 남아 있습니다.
함벽정(涵碧亭)은 봉황대의 동쪽 강변 바위에 있는 정자로, 강변 백사장에는 물새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비봉산 낙조를 볼 수 있는 위치 때문인지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고 합니다.
봉황대(鳳凰臺)는 처사 이정인이 소일하던 곳으로 양산면 수두리 들머리 양강 위에 있으며 8경 중 으뜸가는 경치로 꼽히나 지금은 누각은 없어지고 바위만 남아 있습니다.
관어대(觀魚臺)는 도로변에 기암이 우뚝 솟아 양강에 불쑥 튀어나와 강물은 대(臺)를 휘어 감아 맴돌고, 깎아 세운 듯 벼랑에 송림이 우거져 있어 고기가 노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경입니다.
민욱(閔昱)이 아우 민성(閔晟)과 더불어 이곳에서 놀며, 고기가 노는 모양을 장난하며 보았기에 이름을 ‘관어대’라 하였는데 민욱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호는 석계(石溪)이며 관어대란 현판은 시남(詩南) 민병석(閔丙奭)의 친필입니다.
삼호정(三乎亭)은 1860년(철종 11) 치당(治堂) 성대식(成大植)이 세웠고, 양강(楊江)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에는 긴 강이 뻗어 마치 유단(油單)을 펼쳐 놓은 듯하고, 뒤에는 높은 산들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모든 번뇌를 씻고 산색을 우러러 심신을 바르고 고요하게 할 수 있어 선비들이 수양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한천정(寒泉亭)은 백우(白愚) 이시연(李時然)의 문인들이 그를 추모하여 세운 정각으로 만취(晩翠) 이찬연(李燦然)의 기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양산면 수두리에서 강을 건너 대곡 입구 언덕 강안에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양산들이 한눈에 보이고 금강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양산팔경 제1경 영국사
영국사(寧國寺)는 천태산 자락에 있는 신라 때의 고찰로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가 국청사라 했던 것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안정된 삶을 기원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했다 하여 영국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1893년(고종 30)과 1934년에 중수하였고 1980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법당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문수, 보현 보살과 성중(聖衆)들을 빽빽하게 배치하였으며, 1709년(강희 48년, 숙종 35) 인문, 민기, 세정 등 불화승(佛畵僧) 3인이 그린 후불탱화가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는데 2중 기단 위층과 아래층 돌이 바뀌어져 있어, 옮겨 세울 때 잘못 복원한 것으로 보이며 상륜부의 각 구조물에 쓰인 재료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현존하는 통일신라 말기의 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는 1171년(명종 1)에 왕사(王師)가 된 원각국사의 비로 그는 교웅에게 아홉 살에 출가하였고 열반 후 유골은 영국사에 모셔졌으며, 1180년(고려 명종 10) 한문준이 비문을 지어 원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그 전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망탑봉 삼층석탑은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500m쯤 되는 곳에 일명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화강암반 위에 세워졌는데, 자연암을 그대로 이용하여 암석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기단을 만들고 몸돌은 괴임 받침을 두어 그 위에 세웠고, 지붕돌은 다른 돌로 만들어졌는데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영국사 승탑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인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원각국사 유골이 영국사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 있어, 이 부도가 원각국사 사리를 안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 신청 안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