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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즈존 찬성하면 아동 혐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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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키즈존 찬성하면 아동 혐오인가?

[기자의 눈] 노키즈존은 '정의'가 아닌 '합당함'의 문제

1.

2017년 11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제주의 한 식당이 아동 동반 손님의 출입을 금지한 것은 '차별행위'라며 시정을 권고했다. 인권위 결정의 요지는 헌법 15조 '직업선택의 자유'의 하위 범주 '영업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나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특정 집단의 서비스 이용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경우 합당한 사유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최근 수년 간 이어져 온 '노키즈(No Kids)존' 논란과 관련, 처음으로 나온 국가기관의 결정이었다. 다만 인권위는 노키즈존 논란을 '아동에 대한 합리적 근거 없는 차별'이라는 면에서 접근했으나, 이 논란에서 사업주의 권리와 실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사실 '아동'이 아닌 부모의 권리였다.

그럼에도 인권위의 이번 결정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책적 배경을 감안하면 지극히 '합리적'이다.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 생산가능 인구는 줄고 있고, 이 추세가 유지된다면 전체 인구도 감소하리라는 전망이 이미 정설이 됐다. 따라서 국가가 정책 입법과 행정을 통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키즈존'은, 그게 본질적인 저출산의 원인은 아니라 해도(좋은 식당·카페 가고 싶어서 아이 안 낳는 사람이 있겠나?), 출산과 육아에 따르는 수많은 비용 중 하나 정도일 수는 있다. 아이를 데리고 하는 외출을 더 불편하게 하고, 아이를 동반한 것만으로 활동 공간을 제약받아야 한다는 위축감을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핏줄을 남기고 싶은 본능을 경제적 이유로 제한당한 것이든, 그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귀찮고 우아한 삶을 살고 싶어서이든, 그 이유를 떠나 현재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고 있는 이들은 미래 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국민연금 재원의 현 상황상, 미래의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이 낸 돈을 자신이 받는 '적립식'이 아니라, 현재 일하고 있는 세대가 낸 돈을 그 시점에서 은퇴한 세대가 받는 '부과식'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따라서 국가가 출산을 장려하는 데에는 공익적 이유가 있고, 그런 맥락에서 노키즈존 영업을 금지하는 것은 합리적인, 또는 합당한 결정이다. 아이들이 뛰놀지 않는 식당에서 '쾌적하게' 식사할 권리? 식당 주인의 영업의 자유? 사회 전체가 저출산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 정도는 참는 식으로 저출산의 사회적 비용을 분담하라는 게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아니다.

2.

헌법상 영업의 자유 또는 다른 자유권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제한될 수 있다.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다른 손님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공중목욕탕(사우나) 출입을 금지당한 사례가 있다. 헌법상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으므로, 몸에 문신을 했다는 이유로 어떤 업소에 출입을 금지당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고의로 험악한 문신을 드러내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 사람"은 업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법적 제재 대상까지 된다(경범죄처벌법 3조 19호).

흡연의 경우도 그렇다. 이제 술집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금연법(국민건강증진법) 시행 초기에는 애연가들의 불만과 '사장님'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내 가게에 들어온 내 손님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업주인 내가 결정할 문제'라는 주장은, 법리적으로 번역하면 '영업의 자유 침해다'라는 말과 등치됐다. 하지만 국가는 유권자들의 건강권이라는 '공익'을 앞세워 이를 관철시켰고, 이제는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려면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오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진다.

정의의 측면만 놓고 보면, 문신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주장이 오히려 옳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문신한 사람이 득시글대는 목욕탕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업주가 손님을 가려 받겠다고 하거나, 국가가 법령을 통해 이를 규제하는 것은 정의롭지는 않더라도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합당한 행정행위일 수 있다. '흡연자인 내가 흡연자인 종업원을 고용해서 흡연자 손님들만 드나들 수 있는 가게를 만들면 그 가게 안에서는 흡연을 해도 되지 않느냐?'는 항변에 논리적으로 틀린 점이 없더라도, 한국에서는 그런 가게를 열 꿈은 포기하는 게 맞다. 역시 '공익' 때문이다. (정부가 그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입법을 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것은, 국가의 정책과 행정은 언제나 '정의(正義)'만을 기준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한 축의 기준은 '이익'이다. 안전벨트 규제가 대표적이다. 명백히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음주운전과는 달리, 운전자가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타인'의 생명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 운전자 본인의 생명을 위협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헌법과 형법은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음에도, 안전벨트 미착용은 법령을 위반한 행위로 단속 대상이 된다. 그게 사고시 생존율 향상이라는 사회적 이익을 고려한 합당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명백하고 합당한 공익이 있을 경우, 운전자가 답답하다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도 될 자유 같은 것은 보장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 모두는 보고 있다. 개인이 일해서 번 돈을 어떻게 쓰건 그건 자기 마음이지만, 국가로부터 세금 혜택을 받고 싶다면 돈의 용처에 보험료·기부금 등을 포함시켜야 하고, 지불 방법은 신용카드나 직불카드를 쓰는 게 좋다. 신용카드 사용은 정의롭고, 현금 사용은 불의해서? 아니. 세정 효율성 증진이라는 '공익' 때문이다.

3.

노키즈존 영업 금지 역시(이는 아직 인권위 권고일 뿐 행정기관의 실효적 규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더 큰 이익이 되느냐'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풀릴 수 있는 문제다. 유의해야 할 것은, '저는 술집에서 담배 피우고 싶어요', '저는 문신한 사람이 많은 목욕탕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는 주장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게는 어른들만 손님으로 받고 싶어요'라는 주장을 정치적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정책적 제한과 토론의 대상으로 삼으면 족할 문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까진 없다는 얘기다.

물론 영업의 자유와 관련된 모든 문제가 '정의의 문제'가 아닌 '이익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과거 미국이나 남아프리카에 존재했던 '백인 전용 술집(식당)'이나, '동성애자 출입금지' 같은 간판을 내건 가게는 정치적 소수자, 즉 약자에 대한 차별을 내세웠단 점에서 불의했다.

'정치적 올바름'의 본질은 정치적 소수자 옹호다. 정치적 소수자란, 머릿수의 다소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니다. 약자다. 이를테면 부자는 소수이고 가난한 자는 다수이지만, 부자는 강자이고 가난한 자들이 '정치적 소수자'다.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도 치환된다. 누가 '주류'(main stream)를 형성했나, 또는 누가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주도권)를 쥐고 있는가?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가 여성혐오를 사회적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과는 달리 (일부 페미니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남성 혐오'라는 상상적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보는 이유는, 특정한 혐오적 발화나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해당 표현에 대응하는 '차별적 사회 구조의 존재'가 있느냐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약자에 대한 조롱은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지만, 강자에 대한 조롱은 풍자로 용인되는 것 역시 그래서다. 여성의 남성에 대한, 흑인의 백인에 대한, '알바'의 '사장님'에 대한 비판이 그 반대와 본질적으로 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군대에 가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현역 장병이나 예비역이 한국사회의 사회적 약자, 정치적 소수자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은 명백히 병영 국가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많은 현역과 예비역은 '그러면 나는 비양심적이어서 군대를 갔다 왔다는 것이냐'며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나도 원치 않게(?) 2년 동안 고생했다'는 경험을, 스스로를 약자의 위치에 놓는 징검돌로 사용했고 이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이들의 공격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정치적 올바름을 다투는 싸움의 요체는 스스로를 약자의 위치에 놓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노키즈존 논쟁 역시 그랬다. 앞선 논쟁의 결을 살펴보면, 노키즈존 찬성파는 '강자'인 손님이 '약자'인 가게 주인과 종업원에 대한 '갑질'을 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짰고, 반대파는 '강자'인 남성 중심 사회, 또는 육아에 포용적이지 않은 가부장적 사회가 '약자'인 아이 엄마를 배제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짰다. 양쪽 모두 과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정색을 할 문제였을까?

찬반 논란 와중에 나온 주장들 가운데 일부는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 노키즈존을 여성혐오나 '아동 혐오'(?)와 등치하는 것이 그렇다. 물론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주장 가운데 일부는 '아이 엄마'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육아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떠넘기는 성차별적 문화·제도 때문이지, 아이 동반 손님을 가려 받겠다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일 수는 없다. 이것이 여성혐오이려면 똑같이 아이를 데리고 와도 '아이 엄마'는 입장을 거부당하고 '아이 아빠'는 받아줘야 했을 것인데, 그런 일이 있었던가?

또 물론 육아는 힘든 일임이 맞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가 '정치적 소수자'인가? '노키즈존'이 겨냥한 것은 '약자인 여성'일까, '부모'라는 사회 주류적 존재일까? 사회적 필요에 의해 노키즈존을 금지하는 것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일이지만, 반대측 주장을 악마화하는 것이 논쟁의 바른 태도는 아니다. 그게 약자에 대한 차별의 선동임이 아닌 이상.

"오늘의 온갖 미디어들에서는 어린이 편집광이 유행이어서 그들의 눈에는 오직 불행에 처한 어린이밖에는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어떤 도시가 폭격을 당하면 오로지 어린아이들만 폭탄을 맞는 것 같다. 이 세계 어딘가에 기근이 들면 굶주리는 것은 오직 어린아이들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늙은이들은 폭탄에도 굶주림에도 철통같이 방어되어 있다는 식이다." 이 역시 너무 맞는 말이다. - 2003.6.13. <한국일보> 김영하 '너무 맞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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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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