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국이 파키스탄 핵 개발에 눈감은 이유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국이 파키스탄 핵 개발에 눈감은 이유는

[북핵 위기라는 허상] <1> 핵 확산을 허용한 것은 누구인가

아래 글은 <녹색평론> 11~12월호에 실린 다니구치 나가요(谷口長世) 국제 저널리스트의 '북핵 위기라는 허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녹색평론>의 허가를 받아 기사 전문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다니구치 나가요 씨는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브뤼셀 지국장을 거쳐 1998년부터 독립, 벨기에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 저널리스트입니다. 현재 국제기자연맹 부회장으로 저서로는 <N나토―변모하는 지역안보>(2000), <사이버시대의 전쟁>(2012) 등이 있습니다.

아래 기사의 일본어 원문은 월간 시사종합지 <세카이>(世界) 2017년 7월 및 8월호에 '北朝鮮核緊張のまぼろし'(북핵 긴장의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됐습니다. 한국어 번역은 김형수 씨가 맡아주셨습니다.

'적어도 빈 라덴급의 위험인물'의 공범자에 대한 재판

2005년 12월 16일 아침, 네덜란드 북서부의 작은 도시 알크마르에는 가는 눈발이 계속 날리고 있었다. 오전 8시 조금 넘어 아직 어두침침한 가운데 숙소를 나서서 철로 반대편에 있는 회색 건물인 지방재판소 건물까지 걸어갔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이날의 개정(開廷)은 오전 9시. 입구에서 몸과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들어서니 썰렁한 넓은 홀에는 딱딱한 긴 의자들이 몇 개 놓여 있고 자판기가 하나 있을 뿐, 매우 살풍경한 분위기였다.

자판기에서 꺼낸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벤치에 앉아 돌아보니 방청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대여섯 명이 어색하게 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만 맥이 풀려버렸다. 그날 아침 '적어도 빈 라덴 급의 위험인물'(테닛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말)이라고 지목된, 파키스탄의―이른바 '핵 암시장'의 주역인―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최대 협력자 헹크 슬레보스에 대한 선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엄중한 경계 속에 수많은 보도진이 밀려들 것으로 나는 예상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인 슬레보스는 1970년대부터 거의 3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 핵무기 제조기술 비밀을 훔쳐 파키스탄으로 도망친 칸 박사와 협력하여 유럽과 북미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특수 소재, 부품, 기기류의 암거래를 위해 중요한 조달책과 중개인 역할을 했던 인물, 즉 '핵 암시장'의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2004년 초, 칸 박사가 중심 역할을 했던 '핵 암시장'의 실태가 밝혀져 국제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이면에서 네덜란드에서는 '어둠의 중개인' 슬레보스에 대한 재판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평화 국가' 일본까지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 제조에 도움을 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자 나는 이 농축산 지대 복판에 있는 알크마르에 온 것이었다.

오전 9시 조금 전, 등 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성이 "저기 저 사람이 슬레보스다" 하고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더니, 작은 체구의 초로의 피고인이 잰걸음으로 법정 입구를 향해 가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말을 걸며 소개인인 X의 이름을 말하자 갑자기 멈춰 서서는, "X는 오늘 치과 수술이 있어요. 재판에 못 온다고 전화 왔어요. 경황이 없을 거야"라며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법정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한번 맥이 풀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어둠의 거물 중개인에 어울리는 악의 화신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옅은 회색 기성품 양복 차림의 고지식한 표정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법정 안은 일본의 지방재판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재판장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 배석과 왼쪽 배석. 검찰관 몇 명이 왼쪽, 피고인과 변호인이 오른쪽에 위치하고, 출입구 가까운 뒤쪽이 방청석이다. 보도 관계자는 나 외에는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온 <에이피>통신 기자가 한 명. 그리고 중·노년의 시민들이 듬성듬성 방청석을 채우고 있었다.

기소 내용은 1999년부터 2002년 사이의 압력계, O링(패킹), 베어링, 흑연 등 5건에 대한 수출관리령 위반이었다. 이들 제품과 특수 소재를 수출허가 없이 파키스탄의 칸 박사가 운영하는, 핵무기 제조를 위한 위장 기관, 즉 칸리서치연구소(KRL)의 조달 부문인 산업자동화연구소(IIA)로 불법 수출했다는 것이다.

재판은 약 1년 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피고인 슬레보스는 기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재판장이 조금 귀찮은 듯이 읽어 내려가는 판결문을 듣고 있었다. 슬레보스(62)에게 내려진 판결은 금고 1년, 단 8개월은 집행유예였다. 피고인이 경영하는 두 회사의 몫까지 합산해서 19만 7000유로의 벌금이 선고되었다(그 후 슬레보스는 판결에 불복, 항소하여 2007년 9월에 암스테르담고등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게 된다).

선고 판결이 끝나자 피고는 뜻밖에도 성큼성큼 검찰관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검찰관들도 천천히 피고와 악수를 나눴다. 그것은 '적어도 빈 라덴 급'이라고 CIA 국장이 표현한 위험인물의 파트너와 관련된 공판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정경이었다.

빙산의 일각, 도마뱀 꼬리 자르기

"맛은 어떤가? 이건 에르텐 수프라고 하는 네덜란드 토속 요리라네. 마른 콩에 당근, 감자, 소시지, 베이컨을 잘게 썰어 넣어 걸쭉하게 될 때까지 끓인 소박한 요린데,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최고지."

재판이 끝난 뒤 방청석에 있던 70대 초반의 R 씨와 함께 알크마르역 앞의 술집 겸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걸쭉한 녹색의 콩 수프는 적당히 소금 간이 되어 있어서 몸속까지 따뜻해지는 듯했다. R씨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정년퇴직을 하고 원래부터 흥미가 있던 평화문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취미가 본격화되어 평화연구 관련 소책자를 내거나 헤이그의 네덜란드 국회 앞에서 선전지를 나눠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칸 박사가 관련된 '핵 암시장'은 말할 필요도 없이 R 씨에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슬레보스 재판에는 첫 공판부터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고 했다.

"아침에 슬레보스가 도착했을 때 당신에게 말을 건 사람은 공안 수사관이라네."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는 것일까?

"공판 때마다 만나게 되니 서로 친해졌지. 오랫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슬레보스를 감시했다고 하더군. 집이나 사무실에서 나온 쓰레기들을 뒤지기도 하고. 오늘은 그나 그의 동료들에게는 지금껏 해온 것의 총결산 날이었을 테지."

그러나 그에게 씌워진 죄목도, 판결도 지나치게 가벼운 게 아니었을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슬레보스 재판 자체가 말하자면 도마뱀 꼬리 자르기 같은 거라네."

빙산의 일각, 도마뱀 운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우선 '핵 암시장'의 주인공들, 즉 칸 박사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최대 협력자인 헹크 슬레보스의 경력을 밝혀보자.

운명적인 만남

헹크 슬레보스는 1943년 2월 9일,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네덜란드 중동부에 있는 반농·반어촌 엘부르흐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의 북해 연안 가까운 델프트의 공과대학에서 처음에는 항공우주공학을 지망했다가 1963년에 같은 학교의 야금학 전공으로 이적했다. 이 이적이, 과장하자면, 대량파괴무기에 관련된 세계사의 일부를 결정하게 되었다.

한편, 칸은 1936년 영국령 인도 보팔의 이슬람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대전 직후인 1947년, 파키스탄은 영국령 인도로부터 자치령이 되어 이탈하여 1956년에 파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되는데, 칸 일가는 처음에는 인도에 머물다가 나중에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인도에 대해서 칸은 엄청난 증오심을 키워왔다고 한다. 그는 1961년에 서베를린으로 가서 공부하다가 1963년에는 네덜란드의 델프트공과대학으로 이적하여 야금학을 전공하게 된다. 1967년에 졸업한 후 다음 해 1968년에 바로 이웃 나라인 벨기에의 루뱅가톨릭대학교(KUL)의 야금학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1971년에 학위를 취득했다.

슬레보스와 칸이 만난 것은 1963년, 델프트공과대학 학생식당에서였다. 같은 야금학 전공인 데다가 둘 다 인근 동네 레이스베이크에서 하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30분 정도의 거리를 함께 자전거로 통학하면서 우정이 깊어졌다. 델프트는 델프트도자기로 알려진 도자기의 고장인데,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이다. 도시 외곽의 도자기공장 부근에 있는 현대적인 공과대학은 유럽 여러 나라들과 옛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비롯해서 세계 각지로부터 유학생들을 받고 있었다.

▲ 카타르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인터뷰하고 있는 칸 박사 ⓒ알자지라 방송 갈무리

야금학 전공 학생 칸과 슬레보스가 바라본 세계

당시의 세계정세는 유동적이었다.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릴 정도로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을 이뤘다. 1961년 동독이 건설한 베를린장벽으로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고, 칸이 당시 유학했던 서베를린은 소련 진영의 동독 속에 홀로 남겨진, 육지 속의 고도가 됐다. 1962년에는 쿠바봉쇄 사건으로 비롯된 미소의 핵무기를 둘러싼 3차대전 발발 가능성이 우려되었고,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되는 한편, 중국과 인도의 국경에서도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만난 1963년의 11월에는 케네디 암살이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핵무기 분야에서도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963년 미국, 영국, 소련에 의한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이 조인되어 1968년에는 핵확산방지조약(NPT)이 조인됐다(62개국이 참가,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은 불참). 1960년대 중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새로운 원칙을 정리한 당시 벨기에 외무장관 피에르 하멜은 그때의 상황을 1999년 말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듯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은 점점 심해졌다. 미국과 소련의 핵이 포화상태에 도달해서 거의 균형을 맞추게 되었을 때 양국은 핵확산방지조약을 만들어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미소 양국의 핵우산 아래로 편입되도록 했다." (NATO―변모하는 지역안보,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 2000, p. 10)

하멜의 보고가 NATO의 기본전략으로 채택된 1967년에 칸은 델프트공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핵확산방지조약이 탄생한 1968년에, 아이러니하게도 장래 핵확산의 어둠의 주역이 되는 칸은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벨기에 루뱅으로 이동한다. 슬레보스가 이사를 도왔다. 칸의 학생 시절을 아는 관계자가 말한다.

"학부·박사 과정을 통해서 특별히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사교적이어서 누구와도 금세 친해졌다. 교수에게도 주저 없이 부탁을 하고, 부탁을 받은 쪽이 거절하기 힘들게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다. 이것저것 지도하는 중에 박사 논문도 결국 내가 거의 다 쓴 셈이 되었다고, 지도교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할 정도였다."

인맥을 만들어내는 이 발군의 특별한 재능이 훗날 엄청난 사태로의 진전을 가져왔다.

'핵 암거래상'의 탄생

독일, 영국, 네덜란드 삼국이 공동출자해서 세운 유렌코(URENCO)는 초원심분리에 의한 핵연료 제조 회사로 네덜란드의 부분이 UCN사(社)이다. 1972년 칸은 암스테르담의 UCN 하청회사 중의 하나인 FDO에 들어간다.

한편 슬레보스는 델프트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해군에 근무하면서 잠수함을 비롯한 무기의 수리·정비를 담당했다. 교환부품의 조달도 담당해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구미를 중심으로 전략물자나 민생, 군사의 양 부문에서 이용되는 범용기술, 범용품을 취급하는 전문기업들과 인맥을 만들었다. 1974년 그 기업들 중 하나이면서 무기 제조도 하는 네덜란드 남부의 EMWH에 판매과장으로 부임했다. EMWH도 유렌코의 하청업체였다. 즉, 슬레보스와 칸 두 사람 모두 유렌코와 연관된 기업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1974년 인도가 첫 핵실험을 행했다. 매스컴 보도 등을 통해 이 뉴스를 알게 된 칸은 애국심으로 분기탱천해서 당시 파키스탄의 부토 수상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계획에 조력하겠다고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칸의 핵 스파이 계획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칸이 핵 스파이 후보로서 독일로 유학, 파견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예를 들어, 1972년에 FDO에 취직하자마자 드러난 의심스러운 행동은 시사적이다. 그는 입사 후 겨우 일주일이 지나 출입자격도 없는 UCN의 네덜란드 북동부 알멜로에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을 방문하여 초원심분리기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고는, 담당 기술자들에게 온갖 질문을 했다. 그 후 근무처인 FDO의 상사들은 칸이 출입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러 다니는 것을 용인했다.

그뿐 아니라, 1974년에는 UCN이 독일에서 설계된 최첨단의 원심분리기에 관한 독일어로 된 극비 문서와 도면을 네덜란드어로 옮기는 일을 칸에게 맡겨, 16일간에 걸쳐 자유롭게 극비 문서를 열람하는 것을 허락했다. FDO 사옥 1층에 있던 칸의 옆방에서 근무한 당시의 동료 프리츠 피어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출입금지 시설의 출입은 아무래도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에게는 조금 무리가 있어도 허락되는 분위기가 있었고, 또 스스럼없는 성격의 칸에게는 모두 관대했습니다. 저 같은 일반 기술자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고,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켄터키후라이드치킨을 좋아했죠.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명물인 매춘굴에도 자주 눈요기하러 자전거로 다녔던 걸로 봐서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칸은 자주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한번은 그의 서재에 핵시설 플랜트 설계도에 대한 청사진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걸 보고 이거 뭐냐고 물었더니, 청사진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고…. 그래도 의심스러워서 상사에게 보고했더니 어쩐 일인지 그대로 묵살되었습니다. 그 후 조금 지나 칸은 휴가를 이용해 파키스탄으로 돌아갔는데, 아프다는 이유로 소식을 끊어버렸습니다."

칸이 도망간 것은 1975년 12월 15일이었다. 조짐은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 칸은 갑자기 이전 명령을 받고 FDO 내부에서 우라늄 농축작업 부문으로부터 제외되었다. 이 이동은, 칸이 스위스에서 개최된 핵 관련 산업 견본 박람회를 방문하여 의심을 살 만한 질문들을 하며 돌아다니고, 슬레보스와 칸이 극비로 취급된 4―M형 원심분리기 공동 실험을 했다는 정보를 네덜란드 첩보국이 입수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좁혀오는 추적 속에서 칸은 절묘한 타이밍으로 활동 거점을 옮긴 셈이 됐다. 피어만은 칸이 도주한 뒤 FDO의 칸의 상사와 루뱅대학교의 지도교수가 파키스탄에 초청을 받아 여행한 사실을 문제시했다.

핵무기와 초원심분리기―수많은 기기, 부품, 소재, 기술의 집대성

파키스탄이 입수하고자 했던 것은, 초원심분리 기술로 핵무기에 사용 가능한 고농축 우라늄을 얻는 방법이었다. "초원심분리법 농축우라늄 추출에는 고속 회전에 의한 마모를 최대한 감소시킬 플랜트 설계를 위시하여 다양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칸이 근무했던 FDO는 이런 기술들의 보고였습니다."(네덜란드 핵무기 전문가)

그런데 핵무기 제조에는 적어도 핵폭탄을 제조하고 그것을 발사, 운반할 수단(미사일 등)이 필요하다. 실제로는 수십, 수백만의 부품과 특수한 소재들, 특별한 지식과 첨단기술 그리고 그것들을 통제할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미사일의 내부를 보면 집적회로로 가득한 일반적인 가전제품과 한눈에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핵폭탄 제조 비밀을 훔쳤다고 해도 금방 핵무기를 제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조하기 위한 방대한 양의 특수한 부품들, 소재, 기기 등을 조달할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기술자들의 양성도 불가결하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오랜 세월 동안, 국경을 넘어 상당한 양을 수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칸과 슬레보스는,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이러한 어둠의 조달 네트워크를 착착 만들어나갔다. 파키스탄 정부의 윤택한 재정도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파키스탄이 스스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최우선시했던 것은, 무엇보다 카슈미르 분쟁으로 대립하고 있던 이웃나라 인도의 핵무기에 대한 공포, 적개심, 대항의식 때문이었다.

'핵 암시장'의 형성과 돈독한 우정―애국자에서 핵 상인으로

칸과 슬레보스가 구축한 핵무기 제조를 위한 어둠의 조달 네트워크는, 1972년에 칸이 FDO에 입사한 당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칸은 당시 해군에서 각종 무기의 수리, 정비 부문에서 근무하고 있던 슬레보스와 단순한 우정을 넘어 암거래의 협력관계를 심화시켜갔다.

▲ 지난 1998년 5월 28일에 일어난 파키스탄의 핵실험 ⓒ파키스탄 TV 방송 갈무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슬레보스는 1974년 해군 근무 시절의 거래처였던 EMWH로 이직하여 고속증식로와 칸이 빈번하게 출입했던 UCN의 업무를 담당했다. 1975년 말, 칸은 초원심분리기 설계도 청사진을 비롯한 수많은 극비 정보들을 가지고 홀연히 파키스탄으로 사라져버리고, 이듬해 1976년에 핵무기 제조를 위한 국책기관(훗날의 KRL)으로 위장한 기관을 주재하게 된다.

같은 해에 슬레보스는 자신의 관할을 벗어난 의심스러운 행동을 되풀이한 책임을 지고 EMWH에서 퇴사하고 처음으로 파키스탄을 여행하게 된다. 같은 해에 칸이 핵 관련 기밀정보를 훔쳐낸 근무지였던 FDO의 판매부장도 파키스탄으로 초청을 받아 여행을 한다. 이 부장은 1977년과 1979년에도 파키스탄 초청 여행을 한다. 1979년에 FDO가 파키스탄으로부터 60만 유로 상당의 진공측정장치 구입을 수주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1980년 네덜란드 국회의 칸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와 공개된 극비 문서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칸이 FDO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칸과 슬레보스는 네덜란드 수출관리 당국과 첩보기관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파키스탄에서 돌아온 슬레보스는 1978년 1월에 유한회사 '슬레보스리서치'를 설립, 핵무기 제조를 위한 부품, 기기, 소재 조달의 브로커 활동을 맹렬하게 시작한다. 그리고 1979년 네덜란드 스히폴공항 세관에서 원심분리기용의 마레이징강관 300개를 압수당했다.

이 당시의 조사에서 슬레보스는 1976년부터 도합 6200개의 마레이징강관을 파키스탄으로 수출했다는 사실이 발각됐다. 이는 극히 일부로, 훗날의 조사에서는 슬레보스가 파키스탄의 '칸연구소'와 그 외의 위장단체들에 평균 주 1회 빈도로 핵무기 제조와 관련된 기기, 부품, 물자를 발송했다고 되어 있다.

파키스탄으로 귀국한 후의 칸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단 형세였다. 1978년 4월에는 네덜란드에서 훔쳐낸 설계도와 정보를 토대로 완성한 파키스탄 카흐타 P―1형 원심분리기에서 처음으로 우라늄농축에 성공했다. 1981년에는 이 시설에서의 상당한 양의 우라늄농축 달성을 발표하고, 그 공로로 그가 주재하는 핵무기 개발 중심 기관이 '칸리서치연구소(KRL)'로 개칭되어 명실상부한 파키스탄 핵무기 개발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동시에 국제적인 규모의 '핵 암시장'의 주역으로서 내딛은 첫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이번에도 칸이 훔친 설계도를 토대로 제2세대의 원심분리기, P―2형이 카흐타에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1983년에 파키스탄으로 핵 관련 기기들을 부정하게 수출한 혐의로 슬레보스가 처음 체포되면서, 네덜란드에서 칸에 대한 결석재판이 열려 금고 4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절차상의 미비를 이유로 두 사람 모두 무죄가 되어버렸다.

놀랍게도 칸은 몇 차례나 네덜란드에 몰래 돌아왔던 것 같다. 칸은 1988년 12월 24일, 벨기에 국경 부근의 그의 처가 근처에서 슬레보스가 운전하는 자가용으로 주행 중 경찰의 검문을 당해서 바로 구속되었다가 파키스탄으로 강제송환을 당했다. 첩보의 세계에서는 다른 조처도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칸과 슬레보스는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로 네트워크를 확대해갔다. 이른바 '핵 암시장'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2004년 2월 이후 매스컴 보도, 서적, 논문 등에서 수없이 많이 다루고 있으니, 그런 것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일본에서의 최대의 관심사는 칸과 북한과의 관련성이다. 2002년 11월 25일 자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은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생어 기자의 "북한과 파키스탄의 원자폭탄 관계―우라늄 기술과 미사일 부품의 물물교환을 미국이 찾아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같은 해 7월에 파키스탄의 군용수송기 C―130이 북한 내의 활주로에 착륙해서 북한제 탄도미사일 부품을 싣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미국의 정찰위성이 촬영했다고 보도했다. 또 1990년대에는 북한이 핵무기 제조의 노하우를 파키스탄으로부터 입수했다는, 칸 자신의 고백을 보도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일제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2003년 말이 되어서였다.

'운명의 순간' 2003년 10월

2003년 늦여름, 미국의 정찰위성은 수에즈운하를 항해 중인 독일 선적 'BBC차이나'호를 계속 감시, 추적하고 있었다. 이 배가 지중해로 나와 목적지인 리비아를 향하는 도중에 이탈리아에 기항했을 때,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었던 이탈리아 관헌이 화물 검사를 실시하여 컨테이너 5개에 실려 있던 우라늄농축 관련 기기 약 1000점을 압수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발각된 리비아의 지도자 가다피 대령은 같은 해 말에 리비아의 핵무기 제조계획의 포기를 표명하고, 거기에 더해 핵무기 확산과 관련된 파키스탄의 관여 실태를 폭로했다.

칸 박사를 중심으로 한 소위 '핵 암시장'의 실태가 차례차례 폭로되어 국제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된 파키스탄은 다음 해인 2004년 1월, 칸 박사를 형식상 체포했다. 그리고 2월 4일에 칸 박사로 하여금 텔레비전을 통해서 사죄하도록 하고, 무샤라프 대통령이 다음 날 박사에게 특사를 베푸는 것으로 상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박사의 사죄는 파키스탄의 우르두어가 아니라 영문을 읽는 형태였다. 국민에 대한 사죄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외국을 향한 상황종료의 국책 메시지였던 것이다. '핵 암시장'은 칸 박사의 독단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정부와 군은 관계가 없다는, 이른바 도마뱀 꼬리 자르기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칸은 2011년에, 핵무기 관련 기술 공여에 대한 사례로 북한으로부터 파키스탄 군 간부에게 300만 달러가 지불되는 데 자신이 중개 역할을 했고, 당시 무샤라프 장군(훗날의 대통령)도 북한에 대한 기술 공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분명히 군용수송기 C―130의 운용은 칸의 독단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핵 암시장'은 파키스탄의 국책사업이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또 필요 없어진 구식의 초원심분리기를 "핵무기 제조에 사용할 수 있다"고 명기해서 판매하려는 광고를 파키스탄 정부가 국제시장에 제시한 기록도 남아 있다.

여기서 최대의 의문은 왜 2003년 10월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 시점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발각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여론이 들끓고 무시무시한 '핵 암시장'의 존재를 폭로하는 보도가 넘쳐나게 되었다.

'2003년 10월'이라는 타이밍을 맞춘 이유에 대해서 어느 핵무기 확산 문제 전문가는 "중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시하는 파키스탄에 대해서, 미국이 핵무기 확산 국책사업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협박한 것은 아닐까"라고 분석한다. 파키스탄과 중국이 전투기를 공동 개발하고, 중국에 의한 파키스탄 항만 정비 원조와 그 대가로 파키스탄 항만 사용권이 중국에 제공되는 등, 양국이 급속히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서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는 관점이다. 나는 2003년 가을이라는 타이밍은 북한, 동북아시아의 긴장 확대의 복선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부정 수출은 왜 오랫동안 방치되었는가―네덜란드 전 수상 vs CIA

또 하나의 의문은 부정(不正) 수출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칸과 슬레보스에 대한 네덜란드 당국의 감시활동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2003년까지 슬레보스를 확보하지 못하고, 파키스탄만이 아니라 북한, 이란, 리비아 등으로 핵무기 기술이 확산되도록 허용한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대립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네덜란드 뤼버르스 전 수상은 1973년에서 1977년 사이의 네덜란드 경제장관 시절에 칸의 핵무기 제조기술에 대한 스파이 행위를 미국 측에 통고했더니, 미국에서는 계속해서 감시·보고하기를 요청하면서도 칸은 체포하지 말고 일단 그대로 두라는 지시가 돌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런 일이 두 번 있었다고 한다. 전 수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네덜란드 공공국제방송, NHK, 네덜란드 공공라디오 제1국과의 인터뷰에서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증언했다. 스파이 영화 같은 충격적인 고백이다.

그러나 CIA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파키스탄의 핵확산 문제를 담당한 리처드 발로는, 칸의 행동에 의혹을 갖게 된 미국이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여러 차례 네덜란드 당국에 요청했지만 대응은 너무나 둔감하고 비협조적이었다고,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전 수상인가 아니면 전 CIA 베테랑 분석가인가,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과 네덜란드 당국이 오랫동안 칸과 슬레보스 등에 의한 부정한 무역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공개된 많은 양의 네덜란드 정부 비밀문서들이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양국은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칸 박사를 '적어도 빈 라덴급 위험인물'로 주요 미디어들에서 대대적으로 다룬 것은 2004년 초의 일이다. 마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처럼, 처음으로 이 '핵 암시장'의 주역이 발견되기라도 했듯이, 미국의 당시 부시 대통령과 유엔 관계자들은 놀라고 분노했다.

그러나 칸 박사의 핵무기 간첩행위는 그보다 20년도 더 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예를 들어, 1979년 12월 9일 자 영국 일요신문인 〈옵저버〉에는 "칸 박사는 어떻게 이슬람을 위해서 폭탄을 훔쳤는가"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1980년에 네덜란드 국회는 칸 박사의 핵무기 제조 관련 간첩행위에 대한 조사위원회 보고서까지 발표했다. 그럼 왜 국제사회는 칸 박사와 슬레보스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결과적으로 핵무기 확산의 위험성을 증폭시킨 것일까?

왜 핵무기 제조와 관련된 부정 무역이 오랫동안 방치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실은 '핵 암시장'의 존재가 왜 2003년 10월이라는 시기에 발각됐던가 하는 질문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문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북한 핵 문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힌트이다.

칸 스스로, 초기부터 네덜란드 첩보기관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이 글의 후반에서 풀어내기로 하고, 여기서는 백혈병과의 사투 끝에 작년에 세상을 떠난 이집트의 한 노련한 기자가 임종 전에 남긴 칸 박사에 대한 불가사의한 고백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죽음에 임박한 고백

이집트인 아흐마드 이드리스 박사는 중동통신, BBC 국제방송(아랍어)의 기자로 파키스탄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보도 활동을 하고, 브뤼셀에서 일하던 도중 백혈병으로 쓰러졌다. 여러 해에 걸친 투병 말기에는 코와 입에서 계속 피를 쏟으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임종이 가까워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박사를 방문했더니 그는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네는 칸 박사의 핵무기 문제에 관심이 있었지? 실은 칸 부부와는 파키스탄 특파원 시절에 가족들 다 같이 친하게 지냈다네"라고 헐떡이듯 말을 꺼냈다. 15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던 일이었다.

놀란 내가, "그 사람은 초원심분리기의 비밀을 훔쳐서―"라고 말을 시작하는 것을 가로막고는, "거짓말이라네, 그 이야기는. 초원심분리기에 의한 고농축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소리는. 사실은 옛 소련으로부터 흘러 들어간 거야. 나는 파키스탄이 입수한 납으로 된 케이스의 실물을 이 눈으로 봤단 말일세…"라고 한꺼번에 말하고는 괴로운 듯이 말을 멈췄다.

확실히 소련 붕괴로 인한 핵의 유출에 대한 우려는 존재했다, 어느샌가 잊히긴 했지만. 그래서 칸 부부와 친교를 했다는 것을 보여줄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부인에게 무언가 지시를 했다. 다음 번 병문안을 갔을 때 보여준 것은 오래된 자선활동 관련 팸플릿이었다. 거기에는 주재자인 칸 부인과 이드리스 부인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런 게 무슨 증거가 되느냐고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이드리스 박사와의 다음 대면은 병원 지하의 영안실에서였다. 평온한 표정을 하고 새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은 세계의 상식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짓말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고 해서 믿어 의심치 않는 국제사회의 상식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여러가지 정보와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해서 늘 겸허해야 한다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