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게 아니라 억울하게도 됐다. 감사원장 후보자로 내정됐다 자진 사퇴한 정동기 씨의 이야기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철저한 '피해자'다. 사퇴회견에서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래 35년간, 심청사달(心淸事達 :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이란 좌우명 아래, 원칙과 정도를 따라 살아왔다고 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자기관리 철저히 해왔다, 지탄받을 일 하지 않았다, 아끼고 저축해왔다, 부동산도 현재 살고 있는 집 외에는 평생 땅 한 평 소유해 본적 없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하고 싶은 다른 말이 있었을 것이다. MB정권 고위직들이 청문회장마다 꼬리표를 달고 나오는 "위장전입과 투기문제까지도 나는 해당사항 없다"고 외쳐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퇴를 했으니 얼마나 분했겠는가.
그는 "사퇴하라"고 한 안상수 대표 등 한나라당 최고위원들과 야당 측을 '가해자'로 단정한 듯하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회견은 검사의 준엄한 논고처럼 이어졌다. "청문회 없이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재판 없이 사형선고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청문절차를 정치행위로 봉쇄한 것은 살아있는 법을 정치로 폐지한 것"이라 했다. "법치주의에 커다란 오점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문상할 때나 하는 검정 넥타이를 매고 회견장에 나왔다. '조종(弔鐘) 울린 법치주의를 애도한다'는 나름대로의 뜻이었을 것이다. 사퇴회견을 마친 뒤 정부 법무공단 이사장 퇴임식에 가면서, 그는 빨간 넥타이를 맨다.
그는 자신이 결백하고 옳다는 확신에 차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 씨에게는 오해가 있어 보인다. 정 씨가 결백하지 않다거나 옳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딱히 그에게 허물이 있다고 말할 계제도 아니다. "도곡동 땅 실소유주가 이명박 후보라고 볼 증거가 없다"고 2007년 대검 차장 때 그가 내린 결론이나, 청와대 정무수석 때 민간인 불법사찰 내용을 보고 받은 적 없고, 관련이 없다는 그의 주장도 아직은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은 시빗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또 4600만 원이던 로펌의 월급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간사되었다고 1억 1000만 원으로 2배 이상 뛴 것도, 자기들 정하기 나름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그 뿐일 수 있다. 그러나 감사원과 감사원장의 자리문제는 다르다. 정부의 다른 부처 장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 씨는 그 점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감사원법 제2조는 감사원의 '지위'를 규정하는 조항이다. '감사원은 대통령에 소속하되 직무에 관하여는 독립의 지위를 가진다'는 ①항과, 감사원 소속 공무원의 임면, 조직 및 예산의 편성에 있어서는 '감사원의 독립성이 최대한 존중되어야'한다는 ②항으로 되어있다. 감사원의 독립에 대한 강도 높은 주문이다.
정부 모든 부처는 주요 업무를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침도 받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감사원은 다르다. '감사결과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사항에 관하여 수시로 대통령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나, 그 '수시보고' 내용은 사전에 감사위원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감사원법에 규정돼 있다. 바로 감사원 업무의 '공정성과 독립성'에 무게를 실어주는 또 다른 대목이다.
따라서 감사원의 수장은 '독립성'이 담보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엄숙한 전제가 등장한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한다. 일반회사에서 고용사장이 자기 심복을 감사로 심어놓고, 회사의 방만한 운영을 눈감게 한다면 회사는 망하게 된다고 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감사원장으로 내정됐던 윤아무개 후보자가 낙마한 것도 '독립성'이 문제가 되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역임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측근'이기 때문에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했다.
정동기 씨는 대검차장 때, 도곡동 땅과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그게 진실이었다 치더라도) '고마운 일'을 해준 사람이다. MB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간사를 했다. 이어 청와대 민정수석도 지냈다. 측근 중의 측근일 수밖에 없다. '독립성' 측면에서 볼 때, 정 씨는 애당초 MB정부의 감사원장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정 씨는 그 점을 잘못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자기 자신만 결백하고 옳으면, 게다가 위장전입조차 없는 자신이야말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 듯하다.
우물 안에서 본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나무만보고 숲을 못 본 '피해자'다. 그가 오해한 것이 맞다면, 그가 단정한 '가해자'도 고쳐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 측근이 감사원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한 쪽 보다는, 저간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무리를 해가며, 측근을 그 자리에 앉히려한 임명권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그쪽이 '가해자'다. 바로 대통령이 '가해자'다.
'독립성' 확보라는 감사원의 본질을 중요치 않다고 본 게 틀림없다. 대통령이 감사원장으로 낙점만 하면, 국회의 임명동의 절차는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170명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사설 거수기부대 쯤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사원을 대통령이 장악해 의도대로 몰고 가려면, 측근을 원장자리에 앉히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감사원은 전임 감사원장(김황식 현 국무총리) 시절, 4대강 사업 등의 감사결과 중 70%를, 감사원법에 명시된 '감사위원회의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수시보고'했다. 국회의 국정감사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지어 이 '수시보고' 가운데는 감사위원회의 의결은 말할 것도 없고, 감사반원들이 현장에서 돌아와 정식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전에 이뤄진 것도 여러 건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절차 밟아 보고하라"했을 리 없고, 감사위원들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시보고서'들고 청와대로 뛰었을 리도 없다. 국정의 중요한 통로가 공로(公路)대신 법을 어긴 사로(私路)로 이뤄지고 있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게 '정동기 씨 파동'과도 관련되는 '대통령의 감사원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정동기 씨 파동' 이후 요 며칠사이, 청와대쪽에서 담 넘어오는 '말'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청문회 통과는 문제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논리로 '가해자'인 대통령이 '피해자'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서운함 때문에, 1월 26일로 예정된 한나라당 지도부의 청와대 초청만찬이 무기 연기됐다. '대통령의 뒤통수를 때린' 가해자 안상수 대표에 대한 성토가,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했다. 관련해서 "대통령은 여러 사람이 아닌 단 한사람에게만 감정이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방귀뀌고 성내기'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후임 감사원장을 물색 중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MB정권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다. 알면서도 그러는지 모른다. 그건 오만이고 오기다.
인사말고도 외교, 안보, 4대강, 종편, 물가, 전세, 모두가 불안이나 부실의 딱지를 붙이고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 게 요즈음이다. 불법사찰은 또 그것대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잠망경처럼 고개를 들고 사방을 살피는 것 같다. 구제역에 이르러서는 이 정권의 국정수행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파묻어야 할 건 소ㆍ돼지가 아니다"는 절규도 들린다. MB정권은 매사를 구제역 다루듯 한다. 그게 걱정이다. 국민만 '피해자'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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