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기 싸움에서 이겨 감사원장 인사를 밀고 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국회의 인준 동의에 자신이 있는가. 거기서 꺾이면 그 자리에서 정권이 끝난다. 물론 내년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도 전국적으로 궤멸할 것이다. 반대로 한나라당이 이기면 어떻게 되나. 그 순간 정권은 만신창이가 된다. 정권이 사실상 끝났는데 총선은 잘될 것 같은가. 이 두 가지가 화학 반응하면서 내년 12월 19일을 향해 굴러가면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라도 하는가. 아무리 정치에 무지(無知)한 사람들이라 해도 이렇게 무지할 수가 없다."
<조선일보>가 12일 '임기 4년차 증후군'에 빠진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권이 끝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조차 '부적격' 판정을 내린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를 고집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멤버일 뿐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지낸 정 후보자는 정치적 독립성이 요구되는 감사원장 후보자로 부적절한 인사다. 뿐만 아니라 검사 옷을 벗은 뒤 로펌에 취업해 월 1억 원씩 총 7억 원을 받아 '전관예우' 문제도 불거졌다. 한양대 박사학위를 둘러싼 학력의혹, 부동산 투기 등 재산축적 과정에 대한 의혹도 나왔다. 노무현 정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윤성식 전 감사원장 후보자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한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유로 국회 인준 과정에서 떨어뜨렸다. 정 후보자를 감쌀 경우 당장 '이중잣대'라는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한나라당은 급속히 악화되는 여론을 감안해 1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일찌감치 '부적격 인사'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정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 후보자는 아직까지 거취를 고민하고 있다. 11일 오후엔 인사청문회 준비와 관련해 "할 건 하겠다"고 말해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날 정 후보자는 퇴근하면서 자신의 거취 문제와 관련해 "하루만 더 고심하겠다"고 말해, 12일 중으로 사퇴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당조차 '비토'한 인사가 빨리 자신의 거취를 정리하지 않고 미적대면서 정권과 여당에 부담을 주는 일이 왜 일어났는가. 일차적으로는 임기 4년차를 맞아 "밀리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생각이 밑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선상반란'을 일으킨 한나라당에 대해 격노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공식적으로 청와대의 "유감" 표명도 나왔다. 빨리 사태를 수습할 수록 자신의 잘못된 인사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버틸 때까지 버텨 여당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정 후보자가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여론은 악화된다. 인사를 기본적으로 '명분 싸움'이다. 여당조차 감싸지 못하는 후보자가 국회 인준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기라 기대하기는 무리다.
12일자 조간신문을 봐도 '게임 끝'을 감지할 수 있다. 보수언론인 조선, 중앙, 동아일보가 일제히 "정동기 불가"를 외치고 나섰다. 현 정부의 지지기반인 보수세력 내에서도 여론이 그만큼 안 좋다는 얘기다. 또 하나 지난해 연말 종편 선정 결과가 나옴에 따라 종편을 노리던 보수언론들과 현 정부의 '밀월관계'는 끝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 "대통령과 한나라당, 함께 망하는 길로 가나"
물론 신문마다 온도차는 있다. 가장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선 것은 <조선일보>다.
이 신문은 "대통령과 한나라당, 함께 망하는 길로 가는가"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정권의 끝을 보고 싶냐'고 '몽니' 부리는 이 대통령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조선>은 정동기 사태에 대해 "감사원장 인사를 둘러싼 내부 논란이 여당 지도부 내분, 청와대와 여당의 충돌로 번지면서 이제 감사원장 청문회보다 여권 전체가 이렇게 공멸(共滅)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 아니냐가 화제의 초점이 돼 버렸다"고 개탄했다
<조선>은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이번 일이 어떻게 수습되느냐에 따라 당·청(黨·靑) 관계의 주도권이 바뀌게 된다고 보는 모양이다. 한나라당은 내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 신경이 곤두서 있고, 대통령은 집권 4년차인 올해가 마지막 일하는 해라며 '우리는 정치는 모른다'는 자세다. 정치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치고받고 하는 경기장과 그것을 둘러싼 관중석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 관중석의 국민은 청와대가 주도권을 쥐느냐, 여당이 주도권을 쥐느냐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 청와대의 기(氣)가 찬 헛발질 인사에 혀를 차면서 그걸 수습하겠다고 나선 한나라당의 무기력(無氣力)·무감각(無感覺)에 질려버렸다. 관중은 벌써 스탠드에서 일제히 일어서 야유와 조롱을 던지며 경기장을 등지고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건 대통령과 한나라당뿐"이라고 맹비난했다.
<중앙> "집권당에 부담 준 쪽은 오히려 청와대"
<중앙일보>도 이날 "정동기 후보 사퇴, 더 이상 미루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청와대는 사안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격사유가 명백한 후보자를 임명함으로써 집권당에 부담을 준 쪽은 오히려 청와대"라면서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줬다. <중앙>은 "이번 갈등은 집권세력의 내부 대립이라기보다 입법부 주도세력이 행정부 권력을 견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와대가 이를 간과하고 계속 여당을 압박한다면 갈등은 레임덕 국면으로 번져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중앙>은 이어 "노무현 정권 시절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가 추천됐을 때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부결시켰다. 대통령 인수위에 참여한 측근이어서 감사원의 독립성이 손상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동기 후보는 인수위는 물론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지낸 측근"이라면서 '이중잣대'를 문제 삼았다.
이 신문은 "몇 번의 인사 실패로 청와대는 300가지의 설문조사를 하고, 내부 청문회를 여는 등 검증 시스템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번 파동을 보면 인사제도나 검증시스템보다 더 중요한 게 청와대의 의식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며 "청와대는 공정을 임기 후반기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했지만 스스로 불공정의 관행을 벗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의식과 체질이 변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정동기는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가장 톤 다운 시켜 정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한 곳은 역시 <동아일보>다. 이 신문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나라'를 만들 정권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사설 말미에 정 후보자 사태에 대해 다뤘다. <동아>는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 추천과 검증 과정에서 청와대가 보여준 도덕적 불감증은 놀라울 정도"라면서 "이런 사람을 감사원장 후보자로 내세우며 청와대는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현 정부가 스스로 내건 '공정 사회' 구호가 무색해진다. 정부는 부패와 특권의 타파가 곧 안보 강화라는 인식 아래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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