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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ㆍ신영철 대법관, 대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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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ㆍ신영철 대법관, 대답을 듣고 싶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14>법 축에도 못끼는 '법'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은 표현의 자유를 억눌러보고자 했던 이명박 정권의 시도가 분명한 잘못이었음을 확인해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어떤 구실로도 제한해서는 안 되는 헌법적 가치'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촛불시위때 혼쭐이 난 MB정권은 그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쪽팔림'을 '만회'해보려 기를 썼던 게 사실이다. 50년간 잠자고 있던 전기통신기본법 조항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 것이나, "촛불시위자들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MB가 악을 쓴 것이나 다 궤를 같이 한다.

일부에서는 이번 결정을 놓고, "공익 침해가 어떤 경우인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는 취지일 뿐, 인터넷상 허위사실 유포가 처벌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들이 더 많다. "지금도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폐해는 정도가 심하면 처벌 받는다"고 했다. "선거 때 허위사실 유포는 선거법으로 처벌하고, 다른 사람 명예를 훼손하면 형법상 명예훼손죄에 해당된다"고 지적했다.

"국민의 주장이 허위라면 국가는 아니라고 하면서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대응하면 된다"고 했다. "정부가 공공연히 '허위사실'을 발표까지 한 사례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연평도 사태 때도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헌법소원을 낸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는 물론, 촛불시위·'천안함'·연평도사태의 '유언비어' 관련자들이 모두 범죄누명을 벗게 되었다.

▲ 전기통신법 47조 1항에 대한 위헌 결정에 따라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등이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됐다. ⓒ연합

그중에서도 촛불시위는 ▲2009년 9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의 야간옥외 집회금지 조항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은 데 이어 ▲정부가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단정한 MBC PD수첩 관련자들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고 ▲이번에 전기통신기본법 조항까지 위헌결정이 나옴으로써, 그야말로 '죄 하나도 없는 집회'였음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MB정권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은 수백만 국민들의 '추호도 거리낄 것 없는 당당한 함성'이었음이 입증되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면서 머리에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다. 신영철 대법관이다. 그는 아직도 있다. 아직도 대법관이다. 그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가 있다. 특히 촛불집회재판에 대해 그가 보여준 집요함 때문이다. 이번에 위헌결정이 난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에 대해서도 그는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었다. 바로 촛불시위 관련자들의 재판 때문에 그랬다.

그가 그쪽에 손을 뻗친 것은 서울중앙법원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촛불시위의 거대한 물결과 맞물려 끝 무렵에 이른바 '촛불 범법자'들이 기소돼 재판에 회부되면서였다. 그가 희한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촛불시위관련 재판을 보수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특정 부장판사에게 몰아주는 것이었다. 통상 재판은 컴퓨터에 의한 무작위 배정방식에 따라 담당판사가 결정되는 게 관례였다. 그게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소리'가 났다. 판사들 여럿이 법원장실로 몰려갔다. 그리고 나서야 원래의 무작위 배정방식으로 재판이 배당되기 시작했다.

재판 진행 중 한 '촛불 피고인'이 "집시법 10조 야간옥외집회 금지조항에 대한 위헌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청해 달라"고 담당 판사에게 신청했다. 밤이라고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헌법 제21조의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금지'조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지적이었다. 재판도중 어떤 법조항에 대한 위헌심판을 헌재에 제청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담당판사가 결정하게 되어있다.

그 때문인 듯하다. 신영철 당시 법원장은 휘하의 형사 단독판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개의 법조항에 대한 "위헌심판을 헌재에 제청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당시 위헌제청신청이 들어와 있는 집시법 10조와 (이번에 위헌결정이 난)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이었다. 위헌 심판제청신청을 받아들여 헌재에까지 넘기지 말고, 그냥 판사 손에서 기각해 끝내달라는 이야기였다.

신 당시 법원장이 '기각'을 부탁한데는 까닭이 있었다. 일단 어떤 법 조항의 위헌여부 심판이 헌재에 제청되면, 같은 법조항 위반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 선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도, 헌재의 위헌여부 결정이 나올 때까지 정지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었다. 정부로서는 모든 촛불시위와 관련 '괴담'들이 하루속히 유죄판결을 받아 처벌되어야 하는데도, 그게 늦어지므로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신 당시 법원장도 그렇게 정부편에 서서 애를 태운 것 같다. 촛불시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는 '시국관'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 뿐만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집시법 10조에 대한 위헌 심판을 헌재에 제청해 달라"는 신청을 받은 판사는 신 법원장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위헌심판을 헌재에 제청했다. 그게 옳은 길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신영철 당시 법원장은 눈물겨운 작업을 이어간다. 그는 2008년 10월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 단독부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집시법 10조에 대한 위헌심판이 제청돼, 헌재의 결정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릴게 아니라고 했다. 현행 집시법 조항을 그대로 적용해 재판을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훗날 이게 '재판 개입'이라며 문제가 되었다. 신 대법관은 "사법부내의 일상적인 행정으로서, 후배 판사들에게 '조언'내지 '당부'를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나서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서둘러 현행법대로 징역이나 벌금형을 선고하라는 '독려'처럼 보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판사들이 움직이지 않자 신 당시 법원장은 2008년 11월 6일과 11월 24일 이메일을 두 번 더 보낸다. "통상적으로 (현행법에 따라)처리하는 것이 어떠냐하는 것이 저의 소박한 생각입니다" "결정이 미뤄지게 되어 저 자신 실망을 많이 하였습니다"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주십사고 다시 한 번 당부 드립니다" 신 대법관은 이 역시 단순한 '조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법원 조직법상 지방법원장은 단독판사들의 직속상관이자 근무평정을 하는 일정부분의 인사권자다. 그 인사권자가 특정사건의 재판진행과 관련한 자신의 의견을 담은 이메일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것을 받아보며 휘하의 단독판사들은 '조언'으로 느꼈을까, '압박'으로 느꼈을까.

이 나라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과 함께, 법관이 지녀야 할 잣대와 자세를 엄숙하게 새겨주는 헌법조항이다. 특히 법관은 법에 따르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외압받지 말고' 심판하라는 이야기다. 2008년 이 나라 서울 중앙지방법원의 형사 단독판사들은 외부압력을 배격하라는 헌법정신을 철저히 지켜낸 훌륭한 법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상관이면서 역시 법관인 신영철 당시 서울 중앙지방법원장은 헌법정신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촛불' 재판을 특정법관에게 몰아주었다. 피고인의 위헌제청 신청을 기각하라고 판사들에게 외압을 행사했다. (그는 당시 집시법과 전기통신기본법조항에 문제가 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현행법 조항에 따라 재판 서두르라했다.

요컨대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았다. '양심'에 따른 것 같지도 않다. '독립'하여 판단한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그는 단독판사들의 '독립'까지도 흔들어댔다. 결론적으로 솔선해 '위헌'하면서 '위헌'을 강요한 꼴이 되었다. 그 신영철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2009년 1월 이용훈 대법원장의 추천을 받아 2월 18일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 임명장을 받는다. 뒤이어 '촛불시위 재판 외압행사'가 말썽으로 불거진 것은 필연처럼 보인다.

판사들의 집단의사표시가 나왔다. 법원노조도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신 대법관 사태가 보여준 법원개혁의 올바른 방향'이란 대토론회까지 열렸다. 대법원은 현직 법관 6명만으로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외부인사는 한명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어느새 대법원 윤리위원회에 회부된 최초의 대법관이 되어있었다. 결국 사태는 대법원장의 '엄중 경고'로 매듭지어졌다. 2009년 6월 5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법원장의 '엄중 경고'라는 '최종 조치'가 내려진 이후에 발생한다. 새로운 상황이 터져 나왔다. 대법원장의 '최종 조치' 3개월 뒤인 2009년 9월 집시법 조항에 대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다. 그리고 2010년 12월 전기통신기본법 조항이 위헌판정을 받았다. 그가 "현행법을 적용해 재판을 진행해 달라"고 그토록 간곡히 당부하던 그 '현행법' 조항 두 개가 모두 법 축에도 못끼는 '법'인 것으로 드러나 버렸다. 말하자면 법 축에도 못끼는 '법'을 적용해 재판 빨리 끝내라고 독촉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궁금한 게 있다. 2008년 신영철 서울 중앙지방법원장은 무엇 때문에 촛불시위 재판에 그토록 끈질기게 팔을 걷고 나섰을까. 그의 행적을 알고 있었던 이용훈 대법원장은 왜 그런 그를 대법관으로 추천했을까. 헌법정신을 어겨가면서까지 재판에 외압을 행사한 그를 이용훈 대법원장은 왜 '엄중 경고'하는데 그쳤을까. 헌재의 결정으로 사후에 새로운 상황이 불거졌는데 대법원장의 '최종 조치'는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알고 싶다. 이용훈 대법원장과 신영철 대법관의 대답을 듣고 싶다. 사법부는 인권과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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