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백혈병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는 차디찬 땅바닥에 넙죽 큰절을 올렸다. 강남역 8번 출구 앞 삼성전자 사옥에서 반올림이 농성한 지 772일째. 황상기 씨는 함께 농성장을 지켜준 사람들, 반올림의 싸움을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 큰절을 농성장에 앉아 있던 세월호 유가족들도 받았다. 세월호 유가족들로 꾸려진 4.16 합창단은 노란 옷을 맞춰입고 <잊지 않을게>라는 노래로 화답했다. 그 날은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정부의 수색 종료 방침을 받아들인 날이다. 이 소식을 전하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 8반 고(故) 안주현 학생의 어머니 김정혜 씨는 울먹였다.
황상기 씨의 딸 황유미 씨는 삼성 반도체 기흥 공장을 다니다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 20일 단 한 명의 산재 인정 투쟁을 계기로 처음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처음에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이었다. 발족 당시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한 피해자는 황유미 씨 유족, 단 하나의 케이스였다. 그리고 2008년 2월부터는 삼성뿐 아니라 다른 반도체 전자산업체 노동자들의 직업병을 포괄할 수 있도록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 공대위를 꾸린 지 10년이 지났다.
16일 강남역 8번 출구 앞에는 반올림 1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제가 열렸다. 1년 전 촛불집회 때 만들었을 "최순실엔 수백억 뇌물, 백혈병 노동자엔 500만 원?"이라고 적힌 포스터는 빛이 바래 있었다.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아직도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한다.
삼성전자가 직업병 문제를 처음 인정했을 때는 2014년 5월 14일이다. 고(故)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숨진 지 무려 7년 만이었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가 직업병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공교롭게도 삼성 측이 사과한 날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5월 1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불과 4일 뒤였다.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경영 승계 작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직업병 문제'를 털고 가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삼성전자는 조정위원회의 조정 권고안을 무시하고 자체 보상 절차를 강행했다. 삼성전자는 자체 기준에 따라 선별한 피해자를 물밑 접촉해 일대일로 '비밀 보상 절차'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삼성이 피해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합의 사항을 누설하면 보상을 무효로 하는 '비밀 유지 조항'을 종용했다고 반올림은 주장한다. 보상 절차, 대상, 규모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반올림이 요구했던 투명한 배상 절차가 아니었다. 반올림의 나머지 두 요구 사항인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방지대책도 흐지부지됐다.
삼성이 10년 이상 외면하는 동안 '직업병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반올림이 활동한 지난 10년간 접수된 삼성 직업병 피해자는 320명이었고, 이 가운데 118명이 사망했다. 추석 명절 기간이었던 지난 10월 5일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뒤 희귀난치성 질환인 '전신성 경화증' 판정을 받은 이혜정(41) 씨가 사망했다.
이날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10년이 지났는데, 언제까지 싸우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유미의 백혈병은 산재가 맞다는 판결을 받아 저는 유미와의 약속은 지켰다. 하지만 나머지 너무 많은 환자들이 나오고 있다. 이분들이 삼성과 대화해서 이분들의 문제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이 자리에 있겠다"고 말했다.
황상기 씨는 "삼성도 이재용 등이 감옥에 가 있지만,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반올림과 반드시 대화해야 한다. 노동자를 보상해줄 돈 갖고 자기네 돈잔치하는 회사가 어디 있나"라고 말했다.
100여 명의 시민은 촛불을 들고 문화제를 지켰다. 세월호 유가족의 공연과 연대 발언이 이어졌다. 집회 말미에는 삼성전자 사옥을 한바퀴 행진했다. 삼성전자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자리를 일렬로 줄을 선 보안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서 일했다가 뇌종양 판정을 받은 한혜경 씨는 굳게 닫힌 철문을 답답하다는 듯이 치며 고개를 떨궜다.
시민들은 "삼성은 직업병 문제 해결하라", "삼성은 배제 없고 투명하게 보상하라", "삼성은 진정성 있게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집회를 마쳤다. 삼성전자 곳곳에 배치됐던 보안 요원들도 자리를 떴다. 기약 없는 천막 농성 772일 차 밤도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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