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연평도 피격 사태 이후 '안보 의식 강화'를 주문하면서 다소 과거회귀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과도 대비된다. '북한 변수'로 민생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색깔논쟁'을 하고 있는 정치권의 분위기 속에서 박 전 대표는 '복지'라는 생활밀착형 이슈를 선점하고 나선 셈이다.
'선방' 날린 박근혜…곤혹스런 야당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뉴시스 |
박 전 대표가 '복지'를 2012년 대선에서 화두로 끄집어낼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그래서 전형적인 '작은정부론'에 기반하고 있었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바로세운다)라는 박 전 대표가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주장했던 정책 노선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인지, 진보진영에서 얘기하는 '보편적 복지'와 다른 '박근혜식 복지'의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이 어떤 것인지 등 질문이 제기됐다.
20일 공청회를 통해 박 전 대표가 내놓은 대답은 '생애주기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형 복지론'이다. 현금 지급 위주에서 벗어나 사회서비스 제공을 늘리겠다는 게 핵심이다. 도덕적 해이와 전달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올 수 있는 '돈'이 아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얘기다.
솔깃한 말이다. 특히 그동안 '복지 수혜 대상'에서 빠져 있었지만 복지에 대한 요구가 높은 중산서민층이 듣기엔 더 그렇다. 보육, 교육, 노인부양 등 이들 계층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들도 '돈'을 준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도 '사회서비스 확충'은 큰 틀에선 올바른 접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복지'라는 깃발을 쳐든 것이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복지가 정책적 화두가 된 상황 자체는 정치적으로 진일보한 것이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지만 복지라는 이슈마저 보수정당에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줄푸세'는 포기했나? 복지 재정 확충은?
21일 각 정당이 '박근혜 복지론'에 대해 내놓은 평가를 보면 이런 곤혹스러움을 엿볼 수 있다.
민주당 전병헌 정책위의장은 이날 열린 의총에서 "철학, 비전, 대안 없는 속빈 강정, 빈수레형 복지정책"이라고 비난을 쏟아냈다. 전 의장은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사각지대의 빈곤, 빈곤의 대물림, 청년실업 등 구조적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방안도 아니라는 점이 확인됐다"며 "레토릭(수사학)에 불과한 한나라당의 선별적 복지, '말로만 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감세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 동조하면서 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어떤 철학이나 비전, 대안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박 전 대표의 '한국형 복지론'에 대해 "나라가 한나라당의 광기어린 전쟁선동에 의해 불안해하고 있는 지금, 한나라당의 대표적 정치인이 복지를 이야기한들 국민이 얼마나 호응할 수 있겠는지 의문"이라며 "백번양보해서 복지정책을 제시할 권한은 자유지만 '한국형 복지'를 뜯어보면 그 내용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우 대변인은 "부자 감세의 원조격인 '줄푸세'에 대한 입장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노동정책, 부동산 정책, 감세 정책은 어쩌고?
야당들은 발빠르게 '경계태세'를 취하면서 박 전 대표의 '한국형 복지론'에 대한 흠집내기에 우선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들이 내놓은 문제제기를 뜯어보면 '한국형 복지론'이 '선언'을 넘어 현실적 '제안'이 되기 위해선 풀어야할 난제가 곳곳에 숨어 있다.
진보신당의 정책논평이 이런 '박근혜식 복지'의 연착륙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진보신당은 박 전 대표의 구상에 대해 "이를 놓고 '한국형 복지국가'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모자라다"며 "적어도 복지국가라고 한다면, 국민들이 가장 고통을 겪고 있는 노동시장 문제에 대한 개입 전략이 나와야 한다. 또 실생활과 직결되는 주거, 교육 대책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이라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보신당은 "사회복지정책을 아무리 잘 제시한다 하더라도, 경제정책과의 상호보완 작용이 없으면 심화되는 사회양극화 문제는 해결하기 매우 어렵다"며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계속 유지한다면, 고용의 질을 악화시켜 대규모의 근로빈곤층을 양산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빈곤층의 급격한 확산은 사회복지정책의 부담을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는 한나라당의 노동정책 노선과 '한국형 복지론'의 상호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들은 또 "한국의 고질병인 교육문제, 주거문제에 대한 대책이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주거복지는 한국경제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부동산과 직결된 문제다. 이명박 정부가 2008-2009년 경제위기를 맞아 집값이 떨어질 때 잇따라 부양책을 발표할 정도로 집값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부동산 부자'들은 대체로 한나라당을 지지해왔다. 주거복지 서비스를 늘리기 위해선 "상위 1%가 소유한 토지가 전체 사유지의 57%에 달하고, 집 100채 넘는 사람이 37명이고, 부유층 100명이 1만5000채를 소유하고 있는" 현재의 불평등한 부동산 소유를 바로잡아야 한다.
또 '돈'이 아닌 '서비스'로 틀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돈이 든다. 박 전 대표가 주장한 것처럼 '생활보장' 수준까지 가려면 그냥 '돈'을 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재원이 필요할 수 있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는 박 전 대표가 답해야할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입장이 뭐냐는 질문은 이 때문에 나온다. 지난 8일 새해 예산안을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하는 과정에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침묵'에 대한 비난도 이와 연결된 문제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은 회피한 채 발빠른 선언을 통해 '복지' 이슈를 선점하려 한다면 "'박근혜식 복지국가론'은 치사하다"는 야당들의 비판이 과도하다고 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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