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에 지어진 집
"'붉으실 마을'답지 않은 평야지대에 있는 거예요, 저희 집이."
집터에 대한 자부심 섞인 미소를 띤 이상협 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수경 님이 바로 덧붙였다.
"평지 집이죠. 그런데 저는 처음에 붉으실 마을이 마음에 든 건 아니었어요. 시골 생활이라고 하면, 일단 탁 트이고, 전망도 있고 그래야 하는데, 여기는 너무 골짜기이고 다 산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어서 보이는 전망도 없고. 그래서 처음 이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자고 했을 때 저는 반대를 했거든요. 전 홍성으로 가자고 했어요.(웃음)"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귀농지의 선택은 처음이자 마지막과도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이유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까? 한참 커가는 성장기의 아이들이 셋이나 있는 가족이 말이다.
"따뜻한 남쪽, 특히 눈이 절대로 오지 않는 지역에, 가능하면 지리산 가까운 데서 사과 농사를 지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처음에는."
"저는 전국 어디든 열려 있었는데 저 사람은 항상 남쪽이었어요. 그랬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형님들'이 있어서인 거 같아요. 형님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지요."
도수경 님이 정확하게 딱 짚어서 말하자, 상협 님도 "맞아요, 친구 따라!"라고 인정한다.
자발적 가난이란 말에 끌려
직장생활로 바쁘던 상협 님과 가정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없던 수경 님은 2011년 초 어느 날 평소 지나다니며 보았던 군포 갈치저수지 뒤편의 텃밭에 가보았다. 아직 추운 기운이 가득한 2월인데 밭에서 뭔가 하는 두 사람을 보았다.
"평소 다니면서 밭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텃밭 분양하면 한번 해볼까 생각했던 차였죠. 그분들과 텃밭, 귀농,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 어른이 '귀농은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말을 하는데, 멋지게 들리더라고요.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게 인연이 된 거지요."
그분은 당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본부장이자, '소농학교'의 교장인 정용수 선생님이었다. 그날 인연으로 다음 해 소농학교에 3기로 입학했고 그곳에서 '형님들'을 만나게 된다. 현재 같은 마을에 살며 복숭아 농사를 하는 윤태일 님과 상협 님의 농사 파트너인 류지수 님이다. 2012년 소농학교를 다니던 중에 이미 제천에 땅을 사서 먼저 귀농한 윤태일 형님을 방문했던 그해 12월을 상협 님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밭을 보여준다고 차를 타고 복숭아밭 위로 올라갔거든요. 차가 어떻게 올라가나 싶게 경사가 심했어요. 보니까 주변이 다 돌이야. 이런 땅에서 풀인들 자랄까 싶을 정도로 척박하기 그지없더라고요. 그런데 또 그 골짜기에서 찬바람이, 골바람이 확 몰아치는데… 태일이 형님의 길고 하얀 머리가 바람에 막 휘날리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어떻게 사람이 이런 데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휴, 몸서리치면서 내려왔어요. 그게 이곳에 대한 내 첫인상이에요."
"절대로 여기 살 생각은 없었겠어요?"
"그럼요! 그때 겨울이 영하 12도까지 내려갔거든요."
상협 님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데, 이번엔 수경님이 제천 생활의 좋은 점을 덧붙인다. 몸서리쳐지는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다. 도시 출신이라 시골에 아는 친척도 없는 상태에서는 마음 맞는 사람이 있는 곳이 적응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어딜 가도 비슷할 거라면, 그럴 바에는 이곳에 정말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역동적인 사람들이니까, 같이 일을 하면 재밌겠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기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이 마을이 재밌더라고요. 아무리 따져 봐도 개발 가능성이 제로인 지역이에요."
흔히 사람들은 개발 가능성이 없는 지역의 땅을 안 산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싶고 이곳에서 계속 삶을 꾸리고 싶은 상협 님에게는 역으로 이곳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길이 새로 나거나 관광지로 새롭게 부각되거나 축사가 들어서는 등의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게 맘에 들었다.
만 평에 연봉 300만 원, 그리고 길고 긴 해명
"재작년엔 7000평, 올해부터는 1만 평 농사를 짓고 있는데, 1만 평으로 계산할 때 따져보니까 1년 연봉이 300만 원이더군요."
적게 벌고 적게 쓸 생각으로 내려왔지만, 아이들이 있다 보니 소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데다가 이래저래 돈이 들어가는 일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만 평이라고 하면 결코 작지 않은 농사인데 그 소득으로 생활이 유지될까 궁금했다.
"연봉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해요. 대략 수수가 3000평, 율무가 3000평쯤 돼요. 나머지 땅에는 헛개나무, 두릅, 옻나무를 심었어요. 나무는 성장 기간이 3~4년 필요하니까, 당장 수입이 생기긴 힘든 거죠. 그렇다고 일이 없는 건 아니라, 밭 관리를 주기적으로 해주어야 해요. 그래서 현재 수입이 나는 건 곡물이에요, 수수랑 율무."
나무를 심은 4000평 정도는 초기 투자 기간이라 현재 수익이 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무 심은 땅에 가보았는데 산골짜기의 거친 땅을 나무를 키울 수 있는 땅으로 만들기까지 두 사람이 한 일들이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그 땅까지 접어드는 길이 꽤 오랜 기간 아무도 다니지 않아 나무가 자라고 칡이 우거져 있어 길을 내며 나아가야 했다. 원하는 땅을 만들기 위해, 급경사에 깊이 뿌리 내린 칡을 쳐내는 데 꽤 많은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를 생각하면, 참 뿌듯해요."
아니, 나무는 그렇다 치고, 그래도 수수와 율무 합쳐 6000평인데 소득이 너무 적은 건 아닌가?
"수수는 씨를 굴려요. 씨를 뿌리는 게 아니라, 씨를 넣은 상태에서 굴려요. 톡톡 땅에 박힌다고요. 우리 쪽 두 사람이랑 옆 밭 사람이랑 똑같이 굴렸는데, 젊을 때부터 수수 농사지으신 옆밭 사람은 싹이 잘 올라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똑같이 굴렸는데, 싹이 안 나는 거죠."
그러니까 농사 경력의 차이로 인한 소출량의 문제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도 상협 님 나름의 긴 해명이 따랐다.
"물론 우리가 수수 농사가 2~3년 경력밖에 없어서 아직 서툴러요. 씨를 파종할 때 뿌리 활착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고요. 하지만 작년 경우에는 여름 가뭄이 엄청 심했거든요. 여름에 45일 동안 비가 안 오다 보니까 저희뿐 아니라 지역 일대가 밭작물이 다 타들어 갔거든요. 율무 같은 경우에는 아예 농사 갈아엎는 데도 많았어요."
그러니까 농사 경력보다도 가뭄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신기했다.
"작년에 욕심을 냈어요. 무(無) 경운, 무 투입으로 수수를 한 700평 한 거예요. 시범 삼아 해보기로 했지요. 거기 살던 할머니가 수숫대 베고 난 것을 겨울에 다 거두어서 파쇄해서 밭에 뿌려주었어요. 오줌액비(물거름)도 뿌려주고 좋은 밭을 만들려고 한 거죠. 300평, 400평 이렇게 두 군데만. 그런데 작년 가뭄에 전체 6000평 중에 딱 이 두 곳만 살아남았어요. 나머진 다 가뭄 피해를 봤는데 말이죠. 그 일로 우리 동네에서 인정을 받았어요. 어깨가 으쓱해지더라고요."
가뭄으로 수수가 다 죽어갈 때, 소농 방식으로 제초제를 안 치고 땅을 만들어 키운 곳의 수수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제초제를 안 뿌리니 풀이 남아있어서 풀잎에 맺힌 이슬이 도움이 됐을 수도 있고, 워낙 골짜기 땅이라 일조량이 적어서 가뭄 피해를 덜어준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밖에 칼슘제를 적절히 뿌려준 것이 도움이 된 듯하다.
실험 삼아 해본 700평에서 거둔 예상외의 효과였다. 하지만 전체 6000평에 모두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나머지는 '철저히 관행농'으로 한다고 했다. 관행농 방식이라고 해서 무의미한 게 아니라, 수수 농사를 오래 지어오신 분들의 전체적인 농사 패턴에서 배울 점이 있기에 그 과정을 몸소 겪어보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험적인 소농 방식과 관행농 방식을 통해 거둔 농사의 수익은 농사 파트너와 반씩 나눈다고 했다. 누가 더 팔고 덜 팔고를 따지지 않고. 이게 좋아서 앞으로도 이렇게 할 생각이란다. 개인적으로 오디 뽕나무를 1000평 시설을 갖추어 심어놓은 땅도 있지만 이 또한 아직 투자 기간에 해당한다.
귀농 4년 차 '리얼한' 삶
직장에 다니느라 평일 저녁도, 주말도 없던 삶에서 변화한 이상협 님은 귀농과 농사 이야기를 하는 내내 신이 나 보였다. 까만 초콜릿 빛으로 얼굴이 그을리고, 땀으로 범벅이 되고, 탈진할 만큼 힘을 쓰며 일을 했을 시간들일 텐데 말이다.
"우리 밭에 올라가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보통 집 안에서 밖을 보는 전망을 생각하지마는, 자연에서의 전망이 아주 어마어마하거든요. 이런 곳이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지 싶을 정도로 저는 마음에 들어요."
귀농한 지 꽉 찬 3년을 갓 넘긴 귀농 가족의 '리얼한' 삶은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만족스러울까? 우리가 흔히 생각해볼 만한 고민들을 그들도 여전히 안고 있다. 귀농자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인 아이들의 교육 문제는 어떨까?
처음 내려올 때 큰아이가 4학년, 막내가 7살이었다. 큰아이는 귀농 결정을 왜 엄마 아빠 마음대로 정하고, 자기 의견은 존중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현재는 덕산면의 간디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 초등 이후의 교육에 대한 고민이 마침 이 지역에 대안학교가 있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다. 아이가 커나가면서 교육에 대한 고민이 새롭게 제기될 수는 있겠지만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학부모와 마을 공동체가 있어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귀농한 부부의 경우, 대부분이 남편과 아내 모두 농사일에 매달리게 되기가 쉽다. 그만큼 일도 많고, 손이 모자라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댁에서는 남편에게 농사 파트너가 따로 있고, 아내는 농사 일을 하지 않는 대신 마을 커뮤니티에서 월급을 받으며 활동가로 일한다. 처음 귀농한 지 몇 달 안 되어서 아내는 마을의 사회적기업에서 운영하는 빵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의 마을 커뮤니티가 아이들의 초등학교 및 방과 후 놀이 공간과 접해 있어 일도 하면서 아이들을 가까이서 보살필 수 있는 매우 좋은 여건이라고 했다. 연봉 300만 원의 농사 소출로도 생활이 유지된 비결이 여기에 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아내의 삶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텃밭 농사를 알게 된 후로 한살림 활동가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모임을 하며 지내던 군포에서의 생활이나, 마을 커뮤니티 일을 하면서 '월요일 몸살림, 화요일 회의, 금요일 번개, 꽃다방 차 모임'으로 바쁘게 지내는 여기에서의 삶이 비슷하단다.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해뜨기 전에 나가서 어두워져도 안 들어올' 만큼 열심히 일하며 산다. 보다 못해 귀농 첫해가 지났을 때, 농사는 힘도 들고 돈이 되기도 어려우니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해 둘이 100만 원씩 벌면서 살면 어떨까 하고 제안했다고 한다. 상협 님은 단칼에 거절했단다. 아직 농사지은 지 1년밖에 안 되었다는 이유로.
이제 귀농 4년 차가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타협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마을 사람들도 "농사짓지 말고, 차라리 나가서 일해라"고 하기도 한다. 애가 셋인데 이렇게 약도 안 쳐서 소출이 나겠느냐며 걱정한다고. 그렇지만 몸으로 농사짓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빨리 받아주는 장점도 크다.
같이 가기 위해 한발 먼저 가는 '붉으실 농부들'
엄청 뼈 빠지게 일하다 보니 원래의 귀농 취지인 '적게 쓰고 적게 일하기'와 멀어진다고 느낀 두 농사 동지는 하고 있는 일들을 재점검했다. 일단 역량에 맞게 일을 줄이기로 했단다. 덕수산 일대가 수수와 율무로 전국이 알아주는 곳이고 토양도 잘 맞으니 '붉으실 농부들'이라는 마을 브랜드를 만들어나갈 예정이다. 임씨 문중 집성촌이라 문중의 땅이 많이 있는데, 워낙 높은 지대에 있다 보니 연세 드신 분들이 농사를 쉬게 되면 땅이 버려지게 된다. 그런 땅들을 문중과 협의하여 나무를 심고 가꾸어 장기적으로 나무로 수익을 내는 계획을 잡고 있다.
농사방식에도 고민이 많다. 관행농을 무조건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약을 치는 것은 척박한 땅에서 소출을 많이 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어떻게 바꾸어내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도 살 수 있게 할지, 같이 생각하고 대안도 찾으려 한다.
"아직 이르죠. 우리라도 일단 잘 짓고 뭔가 모델이 될 수 있을 형태가 나와야겠죠. 고민거리를 계속 가지고 있는 거죠. 지수 형님도 나도."
귀농해서 3~4년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귀농 초기 정착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앞으로 3년은 또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골짜기 마을에 마음 맞는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새로 엮어갈 진짜 농사꾼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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