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헬스케어 보험상품' 관련 규제를 풀었다. '건강증진형 보험상품'이라고도 하는데, 보험 가입자의 건강관리 노력을 반영하는 상품이다. 예컨대 당뇨병 환자가 혈당 관리를 잘 하면, 보험료를 깎아주는 식이다. 이런 상품을 허용하는 건, 보험 업계의 오랜 요구때문이었다. 하지만 의료법과의 상충 등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었다.
'헬스케어 보험상품' 규제 풀렸다…개인 건강 정보, 재벌에 넘어갈 위험
이런 규제를 풀자는 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입장이었다. 지난 정부가 여러 번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좌초했다. 이른바 '의료 민영화', '의료 영리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반발 때문이었다. 미국식 민간의료보험(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HMO)과 닮은 방식이 한국에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개인의 민감한 건강 정보가 대기업에 넘어갈 때 생길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컸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갑자기 길이 열렸다. 이명박 정부가 입법 추진하다 실패한 '건강관리서비스법', 박근혜 정부가 마련했던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 등의 연장선 위에 있는 정책이 나왔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일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개발·판매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입법이 아닌 행정조치이므로 20일의 공고 기간을 거친 뒤 시행된다. 지난 정부가 도입하려던 '건강증진형 보험상품'을 허용하는 내용이다.
혈당 관리 잘 하면 인센티브
이번 가이드라인을 보면, "보험회사는 기기 또는 보험회사 또는 보험회사와 업무제휴를 체결한 자가 운영하는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앱) 등을 통해 피보험자의 건강관리노력을 직접 측정, 수집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보험회사는 보험계약자에게 사전에 약정한 바에 따라 건강관리노력에 관한 자료를 제출받을 수 있다"라고 돼 있다.
금융위원회는 "당뇨질환자의 합병증을 보장하는 상품에서 관련 지수(당화혈색소)를 일정수준(예:7.0% 또는 7.5%) 이하로 관리하면 보험료 할인 또는 일정기간의 보험료 할인 분을 일시금(예: 매년 10만원)으로 지급"하는 사례를 들었다. 이런 보험 상품을 출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평균 혈당 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검사하는 게 당화혈색소다.
박근혜 정부 투자활성화 대책과 판박이
이번 가이드라인은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2월 발표한 9차 투자활성화대책에 담긴 "ICT와 웨어러블기기 등을 활용한 건강관리서비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는 내용과 거의 똑같다. 당시 발표 내용에도 "스마트기기를 활용한 생활 습관 정보 축적 ·관리 및 이를 활용한 서비스" 등이 담겨 있었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스마트 기기'를 '휴대폰'으로 바꾸는 등 단어만 조금 고친 수준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이번 가이드라인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과 동일한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식 민간의료보험 모델과 닮았다"
그는 금융위원회가 이번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당화혈색소 검사를 사례로 든 점을 특히 주목했다. 이런 검사는 보험회사가 할 수 없다. 따라서 가이드라인 속 "보험회사와 업무제휴를 체결한 자"는 의료기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보험회사가 개별 의료기관과 직접 계약해서 상품을 만드는 길이 열렸다. 이는 미국식 민간의료보험(HMO)과 닮은 꼴이다. 국내 여론이 강하게 반발했던 모델이다.
이어 우 위원장은 다양한 인권 침해 가능성을 거론했다. 삼성생명 등 주요 보험회사는 대개 재벌 계열사다. 이들 회사가 개인 질병 정보를 축적했을 때, 영리보다 인권을 먼저 고려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 입법이 아닌 행정조치인가?
그리고 우 위원장은 중환자, 혹은 중환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을 보험회사가 차별하거나 배제할 위험을 거론했다. 이는 보험회사와 보험가입자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목이다. 보험회사는 병에 걸릴 가능성이 낮은 이들을 가입시키는 게 이롭다. 보험가입자의 입장은 정반대다. 병에 걸릴 가능성이 낮다면, 보험에 가입하는 게 손해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보험회사에 이롭다는 게 우 위원장의 설명이다.
우 위원장은 이처럼 민감한 결정을 입법이 아닌 행정조치로 한 데 대해서도 비판했다. 국회 논의를 거치지 않으므로, 여론의 검증을 피하게 된다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가 같은 이유로 비판받았었다. 우 위원장은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한 서비스 제공은 국가가 해야 한다. 보험회사가 영리 목적으로 접근하는 건 잘못"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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