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송전탑 반대 주민들을 대표하여 기품 있는 명연설로 청중을 사로잡던 구미현(여.67)씨를 기억할 것이다.
밀양시 단장면 용회마을 주민인 그는 지난 4년간 송전탑 싸움 현장에서 함께 하고 12년간 긴 싸움을 이어 오고 있다.
밀양 주민들은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백지화되면 이미 들어선 송전탑을 뽑아낼 수 있다는 기대를 모았지만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에 누구보다 실망이 큰 것이다.
그는 밀양출신의 많은 독립운동가와 함께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했지만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된 일우 구영필 선생의 손녀다.
구미현의 조부인 일우 구영필 선생은 구한말 영남 보부상 총책이었고, 당시 밀양의 부호였던 한씨 문중과 혼인한 구성백의 맏아들로 1891년 태어났다.
그는 국권 상실 후 본가와 외가 40여명 전원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전 재산을 처분하여 바쳤다.
구영필의 유가족 측은 “현재 밀양독립기념관에는 독립운동가 한봉근에 대한 일제자료가 벽에 게시되어 있 다며 이 문서는 ‘요시찰인명부’로 대정14년(1925년)에 보고된 것이다”고 밝혔다.
한봉근에 대한 일제 조사자료(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요시찰인명부 1919년)라는 안내 글이 붙어있다.
이 사진 자료에 의하면 ‘밀양독립기념관 측이 연도 계산도 못하는 한심한 수준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왜곡인지 알고싶다며 본문에도 없는 임시정부 관련 이라니 참으로 민망한 안내글이라고’ 직시 했다.
그 문서의 내용에는 구영필의 외사촌인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한봉근이 1920년 밀양폭탄사건 관련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1921년 2월에서 1923년 까지 중국 길림성 영안현영고탑에 거주했고 1923년 6월 부터는 상해에 거주하고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밀양의 독립운동연구가들이 1차 밀양폭탄사건의 친일 밀고자라고 주장하는 구영필이 1920년 이후에 한봉근 교제자라고 기술 되어 있다.
이와 관련 구미현은 “1919년으로 안내된 요시찰인명부에 대정14(1925년), 대정10년(1921년), 대정12년(1923년) ,대정13년(1924년)의 동정이 나오니 실소를 금치 못한다며 요시찰인명부가 아니고 요시찰 인명예언부다” 고 주장했다.
구영필의 장남인 구미현의 아버지 구수만 또한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이었다. 배재고보 5학년 재학 중 항일만세시위 및 배일 전단 배포사건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 보안법위반으로 체포된다.
구수만은 일경에 잡혀가 어린나이에 엄청난 고문을 당해 또 다른 공범의 이름과 거처를 대라고 족쳤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구수만은 퇴학을 당하고 곧바로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구수만의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이들이 바로 구수만 아버지 구영필의 의열단 등 독립운동을 같이 해 온 후배들이었다고 전했다.
구수만의 독립운동 활동은 이렇게 대를 이어 가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해방이 되던 그날까지 그칠 줄 몰랐다.
구미현은 “윤치형 의열단밀양폭탄사건 회고록에 담겨져 있는 내용으로 분명 조부는 한봉근, 김대지, 신채호, 김상윤 등과 같이 의열단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아세아국3과 북정 제97호에도 실려 있다”고 말했다.
그의 조부는 직접 개간한 발해농장에 동포들을 이주 시키는 등 조선독립을 위해 전력하던중 신민부 문우천에 의해 1926네 피살됐다는 사실을 왜곡해 역사자료와 는 단 한구절도 일치 하지 않는다고 많은 분량들의 자료를 제시했다.
유족들은 구영필 선생의 명예회복에만 심혈을 기울이다 2005년에 뒤늦게 아들 구수만을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했으나 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유로 보류 되었다.
보훈처는 구미현 그의 “부친문제 때문에 계속 서훈을 미루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더욱 높이 사야 할 부자의 공적을 아직도 평가받지 못함은 보훈처가 할 일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영필, 구수만으로 이어진 불행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막내딸 구미현씨는 2007년 건강이 악화돼 요양할 곳을 찾다 밀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밀양에서 생활한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헬리콥터가 마을에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그날 이후 2011년부터 송전탑 공사를 몸으로 막기 위해 4년 동안 활동가들과 함께 한여름 한겨울 가리지 않고 몸으로 막아섰다.
주민인 노인들로 구성된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한전에서 산에 올려둔 굴삭기 밑에서 종일 먹고 자고 했다고 당시 4년간을 회고 했다.
밀양에서 구미현은 편안한 노년을 누리려 할 무렵, 집 뒷산을 지나가는 초고압 송전탑으로 몸에 쇠사슬을 걸고 수 천명 경찰력에 맞서 싸우는 할머니 투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는 “지난 20일 공론화 공론화위 발표가 나온 것을 보고 "문재인 대통령이 공론화위에 신고리 5·6호기를 맡기겠다”고 했을 때, 마음이 불안했다.
그렇지만 '촛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론화 기간 내내 전국을 다니면서 또 주시하면서 현격한 불균형을 느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눈물만 나왔다. 심정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힘이 든다.
물론 5, 6호기 공청회와 건설허가 과정에서 시민은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난 상황에 비하면 조금은 나아졌지만, 수 십년간 숙의하고 공론화에 부친 독일의 사례와는 달리 우리는 숙의과정이 거의 생략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실에 팩트 체크가 안된 채 그대로 시민참여단의 표결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급한 손님맞이로 차려진 초라한 탈핵밥상이 되었다. 다수호기와 핵폐기물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12년간 싸워온 밀양에 마지막765kV와 마지막 핵발전소의 전기가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 참담하다. “우리는 5·6호기 백지화와 송전탑을 뽑아낼 때까지 싸울 것이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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