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할 때 농협하나로마트 들러서 바나나 좀 사와요.”
어디이든 과일코너에 가면 늘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가 가득 쌓여 있다. 당연히 수입농산물이다. 제주 열대과일농장 등이 아니면 국산 바나나를 구경할 데가 드물고, 유별나지 않다면 ‘바나나는 수입산’이 소비의 정석으로 일상화돼 있다.
1990년대에 들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에 따른 수입자유화로 국내 재배농가가 큰 타격을 입었던 ‘바나나 파동’ 이후에도 ‘싼 과일’ 대명사를 유지하고 있는 바나나는 그만큼 서민들에게 친숙해진 먹을거리가 됐다.
“농업인이 주인인 농협이 왜 수입한 바나나와 파인애플, 포도, 체리 등을 팝니까?”
듣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소비자들 대부분은 어쩌면 단 한 번도 의심을 가져보지 않은 질문일 가능성이 크다. 농협이라는 조직의 정체성과 수입농산물 판매의 불합리한 연관성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각종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수입농산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와 농촌 골목까지 수입과일 판매 트럭이 돌아다니는 게 현실이고 보면 농협 유통점에 수입 과일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은 공급과 수요의 일상화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농협중앙회가 ‘수입농산물 판매금지 기준’에 따라 농협 판매장을 대상으로 수입농산물 판매를 일절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소비자들은 드물다.
더구나, 수익 극대화에 혈안이 된 지역농협조합이 중앙회의 지침에는 아랑곳을 하지 않고 버젓이 수입농산물 판매를 지속하고 있어 농업인들의 탄식이 크다는 것도 덜 알려진 게 현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농협중앙회의 강제성 없는 지침과 형식적 제재 규정이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내부규정으로 무이자 자금 지원과 점포 신규 개설, 업무실적에 따른 포상 등에서 제한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규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 9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농협중앙회는 ‘수입농산물 판매금지 기준’에 따라 농협 판매장을 대상으로 수입농산물 판매를 일절 금지하고 있지만, 최근 3년간 어떤 단속과 처벌 지시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전국 농협하나로마트 가운데 82곳에서 수입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농협중앙회 자료 분석 결과에서 나타났다고 밝혔다.
더구나,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에 앞선 지난 8월 3일 ‘농협 하나로마트의 수입 농산물 취급 중지’ 공개서한을 농협중앙회에 보낸 뒤 전국 농협지역본부에서 현장지도까지 펼쳤지만 그때뿐이고, 일부 매장에서는 여전히 수입농산물 판매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실상 농협중앙회가 수입농산물 판매를 거들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또 있다. 농협의 전자시스템이 수입 바나나 등에 대해 ‘기타과일’로 분류하고 있어 수입농산물 판매실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그럼에도 농협 측은 지역농협조합의 탓으로 돌리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원칙적으로 판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독립적 개별 법인인 지역농협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항변이다.
농협 경남지역본부 관계자는 “지역농협에 수입농산물 판매를 하지 말도록 권고 또는 공문을 수시로 하달하고 있지만 일부 매장에서 이를 어기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며 “중앙회나 지역본부에서 직영하는 매장에서는 절대 팔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지역조합장들이 품목 다변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며 “농협 정체성과 공신력 실추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농업인들은 이에 대해 농협과 축협이 수입농산물을 판매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로서, 그 어떤 핑계도 용인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군섭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 의장은 지난 19일 경남 창원의 농협 경남지역본부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농협이 수입농산물 판매의 앞잡이가 돼 농업인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김 의장은 “농협하나로마트의 수입농산물 판매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근본 이유는 정부와 농협중앙회에 있다”며 “판매금지 지침을 따르지 않는 농·축협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하지 않고 비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와 감독을 해야 할 정부마저도 뒷짐만 지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전남 담양 고서농협 하나로마트의 경우 지역 농업인들이 그날 가져온 농산물을 바로 구매해서 판매를 대행하는 로컬푸드 판매장을 운영하고 있다”며 “이런 좋은 선례를 확산시키기는커녕 농업인의 등골을 빼먹는 농·축협은 매국집단이자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농협과 축협이 수입농산물 판매를 포기할 수 없다면 판매장과 집회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규탄하고 응징하는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방침을 밝혔다.
현재 전국의 농협하나로마트는 2,427곳이다. 그중 경남이 355곳으로 가장 많으며 지역별로는 서울 50곳, 인천 30곳, 부산 37곳, 대구 44곳, 광주 34곳, 대전 52곳, 울산 40곳, 세종 15곳, 경기 300곳, 강원 200곳, 충북 135곳, 전북 201곳, 전남 322곳, 경북 316곳, 제주 49곳이 운영되고 있다.
NH농협 홈페이지 ‘농협소개’란에는 ‘농업인에게는 풍요로운 미래를, 고객에게는 최고의 가치를’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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