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2008년 4월 대국민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차명으로 보유한 자산을 실명 전환하겠다고 했으나, 하지 않았다. 계좌를 해지하고 돈을 인출했을 뿐이다. 규모는 4조4000억 원이었다.
누락된 세금을 낸다던 약속도 어겼다. 금융실명제법은 자산의 차명 보유를 금지한다. 차명 자산이 드러나면 과징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이 회장은 과징금을 내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법에 따르면, 이 회장이 내야할 세금과 과징금은 수조 원 규모다. 정부는 수조 원대 세입 손실을 입었다.
이 회장의 대국민 사과 이후인 2008년 말, 삼성 측은 이 회장의 약속이 지켜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 측도 거짓말을 했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회장이 차명자산을 빼가도록 길을 열어준 금융 당국의 적극적 '방조' 때문이다.
4조4000억 원대 차명 자산, 실명 전환 없이 인출
발단은 지난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다. 당시 김 변호사는 삼성이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을 관리하며, 정·관·법조·언론계에 뇌물을 준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삼성 비자금 규모를 10조 원대로 추산했었다. 이를 수사하기로 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삼성이 차명으로 보유한 자산 약 4조5000억 원을 찾아냈다. 조 특검은 이를 회삿돈을 횡령한 게 아닌 상속 자산으로 규정해서 논란이 일었다. 특검 수사가 끝난 2008년 4월,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차명 자산의 실명 전환, 미납 세금 납부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당시 밝혀진 차명 자산의 거의 전부인 4조4000억 원이 실명 전환되지 않았다. 이 회장이 돈을 빼갔다. 낸다던 세금도 내지 않았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5일 발표한 내용이다. 금융감독원이 박 의원에게 제출한 ‘2008년 조준웅 특검 시 확인된 은행별 차명계좌 및 실명전환 현황’ 자료가 근거다. 이 자료를 보면, 차명으로 관리된 64개 은행계좌 가운데 1개만 실명 전환됐고 957개 증권계좌는 실명 전환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계좌에 있던 돈 4조4000억 원을 이 회장이 인출한 사실이 금감원 자료로 확인됐다.
금융위, 수상한 유권 해석…자체 발간 <금융실명제 종합편람>에도 어긋나
이 회장은 대체 왜 그랬을까. 배경에는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이 있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이 회장 측이 차명으로 관리한 계좌에 대해 "금융실명제에 따른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이를 근거로, 이 회장은 기존 차명 계좌를 해지한 뒤 찾은 돈을 자기 계좌에 넣었다. 이는 '명의 변경'이며, 금융실명제법에 따른 '실명 전환'과는 다르다.
금융위원회 측 해석의 근거는 1997년 4월 선고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판례다. 하지만 금융위원회가 인용한 대목은 이 사건에서 다수 쪽 대법관 2명의 보충 의견이었다. 보충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이를 바탕으로 유권해석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이듬해인 1998년 8월 21일에는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심지어 이 판결문은 금융위원회가 2008년에 발간한 <금융실명제 종합편람>에도 실려 있다. 요컨대 금융위원회는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판례를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시기적으로 앞선 판례에서 보충 의견을 찾아내 인용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였던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전광우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다.
박용진 "수조 원대 세금 및 과징금, 추징할 수 있다"
박용진 의원은 "결국 삼성은 대국민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고 금융위원회는 이건희 회장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라면서 "지금이라도 징수하지 못한 과징금과 이자 및 배당소득세를 추징해 경제정의와 공평과세를 실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박용진 의원은 "수십 년간 차명계좌를 유지해 이자 및 배당소득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경우에 따라 과징금과 소득세를 수조 원까지 추징할 수 있다"면서 "아직 10년 시효가 살아있는 만큼 금융위원회도 금융적폐를 청산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